엠프렉.

오이카와의 존재를 모르는 아들의 시점입니다.




옛날부터 아버지는 어딘가 물어볼 수조차 없는 깊이의 빈 조각이 있는 사람이었다. 항상 호쾌하나 어딘가 결여되어 있는 사람 같을 때가 있었다. 예를 들어 혼자 아파트 발코니에서 멍하니 하늘을 본다거나 습관처럼 누군가의 이름을 말하려다 멈추는 그런 때들. 혹은 내 사소한 행동에도 깜짝 놀란 사람의 눈으로 나를 바라볼 때라거나. 분명 아버지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쫓고 계셨다. 아버지께선 늘 그 모습들을 숨기고 싶어 하셨지마는.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아버지의 집은 나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는 공간이었다. 아버지는 매우 좋은 사람임이 틀림없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 옆자리는 항상 텅텅 비어있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내 부모의 한 자리 역시 언제나 비어있었다. 어릴 때의 나는 그것이 늘 궁금했다. 친구들 대부분이 당연하다는 듯 함께하고 있던 어머니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나의 어머니는 누구인가. 그랬기에 어릴 때의 나는 늘 아버지께 질문하기 바빴다. 미완성된 발음으로 아빠. 엄마는?” 나보다 한참 위에 있던 얼굴을 올려다보며 묻곤 했다. 그러면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몹시 난감한 얼굴로 대답할 말을 한참이나 고민하는 것이다.


그는 거짓말을 못 했다. 그래서 내게 단 한 번도. 그 수많던 질문 중 단 한 번도 어머니의 존재에 대해 입을 연 적이 없었다. 나이가 한 자릿수를 맴돌 때야 그것이 야속했지, 12살을 넘길 즈음부턴 직감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방 가장 구석에 처박혀 있던 자그마한 액자 속 사진을 발견한 뒤로 나는 어머니에 대한 존재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나에게 있어 어머니라는 존재는 없을 것이라고 그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내가 보았던 아버지의 추억 더미에 꼭 그 액자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랬기에 더욱 확실하다고 여겼다. 지금에 와서도 느끼지만 어릴 적 가지는 가장 순수하고 정확한 촉이란 무서운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와 둘이서만 함께하는 삶이라거나 아버지의 침묵에 불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남들이 가진 생각보다 훨씬 다정하고 멋진 사람이었으며 나와 함께 하는 시간이 적지도 않았다. 몇몇 간섭 많은 어른의 우려와 다르게 나는 지난 시간동안 외로움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아버지가 나를 그렇게 두지 않았다.


또한 아버지께는 죄송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이별과 침묵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나의 이른 추측으로 덧붙이건대 세상이 많이 누그러졌다지만 아직 남자와 남자에 대한 편견은 남아 있기 마련이었다. 남자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모든 시선이 좋아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아마 나의 또 다른 태초 적 존재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이곳을 떠났을 것이라 여긴다. 그러니 섣불리 원망을 던질 수 없었다. 게다가 나를 낳았을 때 아버지의 나이가 22살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랬다. 내가 불행하지 않은 것처럼 아버지가, 혹은 또 다른 내 추측의 존재가 나라는 생명으로 인해 불행하지 않기를 바랐다. 간혹 호기심이 내 발 밑을 굴러가기도 했으나 못 견딜 정도도 아니었다. 굳이 없는 원망의 이유를 붙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기엔 현재가 굉장히 만족스러운 것이 까닭이었다.


나는 여전히 아버지와 살고 있으며 내가 나이에 비해 제법 성숙한 생각을 하게 될 즈음 벌써 그 수가 14번을 반복했다. 작년,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당시 꽤 감격스러운 얼굴로 나를 끌어안았다. 생각보다 격한 포옹에 당황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퍽 나쁘지 않은 행위였다. 이처럼 아버지는 감정 표현에 서툰 사람이지만 결코 다정하지 못한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종종 저돌적인 직구, 행동을 날리며 나를 당황하게 하기도 했다. 그때의 포옹처럼.


아버지의 직업은 평범한 회사원이다. 대개 7시 즈음 집에 도착을 하고 저녁을 드신다. 그렇기에 아침은 아버지의 몫이고 저녁은 나의 몫이었다. 아버지는 저녁을 먹으며 반드시 내게 오늘은 어땠느냐 물었고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내게 같이 목욕 할 것을 제안했다. 주말이 되면 같이 하루 종일 집안을 뒹굴뒹굴하다 배달 음식을 시켜먹고 때때로 늘어진 티셔츠를 입은 채 장을 보러가기도 한다. 아버지는 맥주를 좋아하시고 나는 탄산을 좋아했기에 냉장고엔 음료가 언제나 그득했다. 남자 둘이 산다는 것을 티내는 듯 곳곳에 다소 아무렇게나 걸린 무채색 양말들이 항상 보였고 아버지와 모으기 시작한 건담들이 그다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진열장 안에 얌전히 자리 잡고 있었다. 이렇듯 나와 아버지의 삶과 집은 지극히 평범했으며 이곳에 굳이 누군가가 더 추가될 필요를 느낄 수 없을 만큼 괜찮은 가정이었다. 그래. 때때로 아버지가 가지는 찰나의 멈춤이 없다면 나는 끝까지 이 생활에서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단언컨대 나의 아버지는 내게 있어 가장 의외성이 짙은 인물이다. 비록 나의 아버지이지만 그는 비밀이 많다. 정확하게 나를 낳은 인물에 대한 비밀이 많다. 내게 결코 허투루 말씀하시는 법이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종종 아버지가 그 사람을 많이 그리워하고 있음을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은 나라는 사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오로지 그 사람의 자리임을 알게 된 것은 오래 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딱 한 번 술에 취한 채 그 사람이 가진 공간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당시 아버지의 말씀은 아마 나는 평생 너한테 엄마라는 존재를 만들어 줄 수 없을 것 같아.” -였다. 필시 아버지께서는 내가 잠에 빠진 줄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그날 얼마나 많은 사과를 하셨는지. 나는 그것을 전부 듣고 있었다. 비록 사과의 횟수가 10번이 넘어갈 때부터 숫자를 세는 걸 포기했지마는. 그래도 그날은 나름대로 충격이었다. 그럴 것이라고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것과 확인사살을 당하는 것은 확실히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깨달았다. 나는 그날 어느 정도 자부하고 있던 나의 성숙이 완벽하지 못함을 또다시 알게 되었다. 본 적도 없는 그 사람의 거대함이 나를 툭툭 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나의 희망이라는 이름과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미래라는 이름으로, 후에 아버지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아마 한 쪽엔 여전히 그 사람의 자리를 두겠지. 새로운 사람이 찾아오는 것과 별개로 그냥 그렇게 둘 것이 뻔했다. 언젠가 그 사람보다 더욱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사람이 생기더라도 말이다. 나의 자리를 그 사람이 채울 수 없고 그 사람의 자리를 내가 채울 수 없는 것처럼. 그건 결코 같아질 수 없는 감정의 주인들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고작 며칠의 방황 이후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그 분한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차라리 아버지답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다음날 그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셨지만(기억하신다고 해도 내가 잠에 든 줄 아실 것이다.) 나는 그때를 잊을 수 없다. 아버지의 처음 보는 표정, 처음 듣는 이 환경에 대한 사과, 채울 수 없는 자리의 공허함에 대한 고백. . 여러모로 강렬했던 날이었다. 그날이 싫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뒤로 지금껏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아버지의 멈춤이 더욱 잘 보이게 되었을 뿐이었다. 잘 굴러가던 세상에서 갑작스레 홀로 우뚝 자전을 멈춘 것 같은 아버지의 공허함을 더 예리하게 포착할 수 있게 된 것뿐이었다.


오늘은 저녁에 외식이라도 할까? 아버지께서 물었다. 나는 무심코 달력을 바라보았다. 25일이었다. 월급날이라서요? 내 되물음에 그가 웃었다.


맞아. 싫어?”

그럴 리가. 저 오늘 고기 먹고 싶어요.”

그래 그럼. 이따가 전화하면 내려와.”

알겠어요.”


갔다 온다. 아버지께서 신발을 구겨 신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장난스러움을 그득 묻히고 입을 열었다.


아버지.”

?”

뽀뽀라도 해드릴까요.”

징그러 임마. 진짜 간다.”


사실 아버지께서 이러한 말에 면역이 없다는 걸 최근에 알았다. 원채 간지러운 말이나 행동을 선호하지 않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몇 가지 행동에는 유독 더 그랬다. 그것이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어렵지는 않았다. 사실 그것을 알기에 던지는 장난이었다. 만약 아버지께서 안다면 알고서 놀리는 것이냐며 머리통을 잡아올 일이었지만 아직 모르고 계신 것 같으니 며칠은 더 유효할 장난이었다. 그나저나 어지간히 농담에 뻔뻔한 사람이었나 보군. 나는 스스로 말하고도 오소소 일어난 닭살을 비비며 고개를 저었다.


한때 내 소원 중 하나는 나의 아버지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지금도 진행 중이나 의미가 많이 바뀌었다. 그랬기에 아버지의 앞에서 많은 장난을 쳐대도 새로운 사람에 대한 언급만은 하지 않았고 아버지도 구태여 말씀하시지 않았다. 서로가 강요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또 그렇게 평범한 우리 부자(父子)의 배려고 나날이다.



 

오늘따라 지루하던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나는 문득 봄이 왔음을 알았다. 아직 겨울의 미련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불어오는 바람은 제법 싸늘했으나 길가에 피기 시작한 꽃봉오리들이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골목까지 함께 걸어오던 친구와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마침 아버지께 전화가 걸려왔다. “벌써 끝나셨어요? 저 이제 집 다 와 가요.” 내 말에 아버지는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말씀하신 뒤 전화를 끊었다. 아마 또 보이지도 않는데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셨을 것이 눈에 선했다. 괜히 웃음이 흘렀다. 나는 발에 차이는 돌멩이들에게 심심한 사과를 전하며 짧은 콧노래를 불렀다. 혈기왕성한 뱃속은 시간 맞추어 배고픔을 알리기 바빴다. 얼른 가자. 나는 누구에게 던지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마지막 코너를 돌았다. 코너를 돌자마자 나를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발걸음을 멈췄다. ……멈췄다? 걸음을 빨리해도 모자를 판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살짝 떨어진 거리에서 보이는 아버지는 혼자가 아니었다. 나에겐 뒤통수만 보이는 키 큰 남자가 한 명 더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건 오직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아버지는 감정 표현에 서툰 사람이지만 결코 다정하지 못한 사람은 아니다. 종종 저돌적인 직구를 날리며 나를 당황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와 함께 해오던 14년 중 단 한 번도 아버지의 그런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것은 나에게 지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한 번도 비어있는 옆자리에 대해 언급하셨던 적이 없다. 그 자리가 누구의 것인지, 나이는 어떤지, 어떻게 생긴 사람이었는지, 어떠한 사람인지, 심지어 여자인지 남자인지조차도. 그래도 나는 그날 아버지를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방구석에 처박혀있던 자그마한 액자 속 사진을 보았던 언제가의 날처럼.

 

, 저 사람이구나.

 

왜 우리를 떠났어요?


한 번쯤 순수하게 궁금해서라도 중얼거려본 질문은 막상 현재에 와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질문이 중요한 때가 아니었다.

나는 그날 평생 만나지 못하리라 단념했던 아버지의 봄을 보았다. 아버지의 가장 이르고 늦던, 가장 춥고 따뜻했을. 그 봄의 귀환을…….

 





 

여행을 앓는 사람이

사라진 계절 저 편에서 걸어오고 있다.


─ 윤성택, 여독





이와오이 온리전에서 발간했던 회지의 본편 전문이며 실제 회지 20p 중 9p 정도의 분량입니다. 본편 외 외전들은 회지에서만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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