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겨울

 

본편기반 컬러버스 AU, 타임리프 소재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에 대한 이와이즈미의 시선

 


 네가 나중에 낳을 아이 말이야. 이름을 하지메라고 짓는 건 조금 그런가? 부정 타려나. 그래도 너랑 내 이름 세트처럼 지어진 건데 하나만 남는 건,”

무슨 소리야?”


병에 걸렸다. 바이러스로 인한 원인 불명, 치료 타이밍을 훨씬 넘겨 이미 손쓰기는 힘들다는 단호함, 시한부 선고, 등등. 내 병을 설명하는 단어들은 하나같이 부정적이었다. 갑작스레 쏟아지는 부정적 진단을 들으며 처음 떠오른 단어는 ?’ 단 한 글자가 전부였다. 장담할 수 있다.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건강하게 살아왔다. 운동을 했고 또 좋아했던 탓에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그로인해 규칙적인 생활과 식단을 행했다. 담배도 뭣도 한 적이 없다. 술이라곤 성인이 되기 전 딱 한 번 몰래 마셨던 적이 전부였다. 그런데 내게 내밀어진 상황은 개죽음이라는 결말뿐이었다. 도대체 왜? 그 의문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커져가는 억울함 말고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았다. 모든 의문과 억울함을 정리하는 단어는 하나였다. 원인 불명. 세상에서 그토록 허무한 단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억울함을 느끼건 말건 병은 착실하게 진행되어갔다. 살아오면서 감기 몇 번 제대로 걸렸을까 말까였는데 익숙하지 않은 통증은 날짜가 바뀔수록 커져갔다. 다른 자잘할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었다. 그건 그냥 완벽한 고통이었다. 빈 말로도 괜찮다고 하기 힘들 정도의 고통이었다. 그래도 처음엔 괜찮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다보면 정말 괜찮아지려니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다.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허세는 얼마 가지 못하고 나가 떨어졌다. 최악. 살면서 처음으로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으려나하는 생각을 했다. 병은 고사하고 매일매일 반복되는 검사와 약이 더욱 큰 고통이었다. 제한되어지는 것은 늘어나고 평화는 줄어들어 갔다. 이 무슨 불합리인가. 그래도 그 불합리 속에서 몇 개월을 버텼다. 그러다 문득 평소처럼 눈을 뜬 하루의 시작에 서서 직감했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순간 누군가 내게 속삭여준 것 같았다. 나는 곧 죽는다. 실낱같던 희망을 끊어뜨린 가위가 나타났다. 그날 하루 종일 구토를 했다. 그때 내가 내뱉었던 것은 비단 고통만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나는 그때 가지고 있던 희망들을 함께 토해냈다. 몸속에 꿈틀거리며 버러지처럼 삶을 연명시키던 감정들이었다.


그즈음, 나는 오이카와게 처음으로 내가 죽고 난 다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당연히 너는 대뜸 화를 내고 병실을 뛰쳐나갔다. 그날 내가 가장 슬펐던 것은 그 뒷모습을 보며 잠깐 기다려! 라고 외치지 못한 사실이었다. 잡아봤자 똑같은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잠깐 기다려. 내가 잘못 생각했어. 죽지 않을게. 그런 희망을 네게 옮겨봤자 그것은 또 다른 구토감을 자아낼 뿐이다. 그날 나는 결국 그대로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악몽을 꿨다.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불길 속에 내가 갇혔고 오이카와가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날 오이카와는 무던히도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댔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와쨩, 자고 갈게.”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했고 나는 아무렇게나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는 비좁은 간이침대에 몸을 구겨 넣곤 내게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건넸다. 그것을 자장가 삼아 잠에 들었다. 비겁하지만 오이카와에게 이별을 준비하라는 듯 입을 뗀 주제에 내 마지막 혜택은 오이카와라고 생각했다. 당연하게. 비겁으로 똘똘 뭉친 눈을 다시 뜬 것은 새벽이었다. 잠이 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머리가 아파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주기가 짧아졌다. 눈을 뜨며 묵직함을 느꼈다. 상체를 들어 묵직함의 이유를 확인했다. 어느새 내 침대에 상체를 엎드려 자고 있는 오이카와가 보였다. 저러다 다음날 근육통이 오지. 나는 한숨을 쉬며 다시 너를 눕히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때 무언가가 왈칵 떨어졌다. 코피였다. 갑작스럽게 제어도 하지 못할 만큼 쏟아졌다. 나는 급하게 손으로 그것을 받쳐내며 간호사를 부르려 했다. 아니. 하다못해 너라도 깨우려했다. 그러나 눈앞이 어지러워 견딜 수 없었다. 머리에 벌레 하나가 들어와 뇌를 갉아먹고 있는 듯했다. 턱을 타고 질질 흐르는 피를 겨우 받쳐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이대로 죽는구나. 객기 한 번 형편없이 부리다 가 버리는 구나. 절로 천천히 시야가 좁아졌다.

 

이와쨩?

 

지금도 생각한다. 그때 내가 보았던 오이카와의 얼굴이 단순한 내 바람이 만들어 낸 착각이었던 건지, 정말로 잠에서 깬 오이카와의 얼굴이었던 건지. 어찌 되었건 확실한 것은 오이카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안심을 했다는 것에 있었다. 오이카와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눈을 감았다. 며칠을 꼬박 샌 것처럼 졸음이 쏟아졌다. 숙면을 취한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오이카와.”


익숙함이란 것은 무섭다. 어떤 사람에 대한 익숙함, 어떤 사물에 대한 익숙함, 어떤 상황이라는 것에 대한 익숙함. 그 모든 것들은 익숙해지는 순간 빛이 바래지고 아득해진다. 사람의 적응력이란 대단한 것이기 때문에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괴로움 속에서도 익숙해져간다. 매일이 새롭다 느껴질 만큼 아픈 고통 속에서도 익숙함을 느꼈다. 그건 고통에 대한 익숙함이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한 익숙함이었다. 몸이 아플 때마다 포기에 대한 익숙함은 늘어갔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너라는 사람에게 지나치게 익숙한 존재이고 너에게 나라는 존재는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익숙한 존재이다. 잔뜩 바래지고 아득해져선 멋대로 온 곳에 스며들어있는 관계가 바로 우리였다. 이 끝에 다다라서 깨달았다. 익숙함이란 빛바래져 가고 아득해져간다. 더불어 그것은 사라지는 순간에야 존재를 더욱 부각시킨다. 익숙한 존재가 빠져나간 자리는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였을까. 그때 들었던 것은 오직 오이카와에게 그 빈자리조차 익숙하게 만들어버리고 싶다는 욕심뿐이었다.


이렇게 연습 소홀히 해도 괜찮아?”

오이카와씨를 어떻게 보고? 난 지금도 충분히 착실해.”

있잖아. 쭉 생각해봤는데 네가 나중에 낳을 아이 말이야. 이름을 하지메라고 짓는 건 조금 그런가? 부정 타려나. 그래도 너랑 내 이름 세트처럼 지어진 건데 하나만 남는 건,”

무슨 소리야?”


오이카와는 아직 나라는 존재의 익숙함이 사라지는 것을 익숙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사라지겠지만 너는 남는다. 나의 시간은 20살의 언저리에서 멈추겠지만 네 시간은 무궁무진하다. 적어도 나와 비교했을 때 차마 셀 수가 없는 시간들을 살아갈 터이다. 어차피 다가올 순간이라면 오이카와가 조금 더 담담해지기를 바란다. 그 뿐이다.


왜 자꾸 이와쨩 답지 않은 말을 해?”


오이카와에게 말을 건네는 와중에도 눈앞에 흐릿한 반점들이 쏟아졌다. 몇 번 힘주어 눈을 깜빡거리면 사라져 갔지만 시시때때로 나를 찾아오는 막이었다. 나는 최대한 눈꺼풀에 힘을 줬다가 풀었다. 그 힘에 순간적으로 네 몸의 선이 흐물흐물하게 보였으나 곧 돌아왔다. 나는 하던 말을 계속 이어하기 시작했다.


오이카와.”

…….”

난 곧 죽어.”


죽음을 실감하지 못했을 때의 사람과 죽음을 실감하기 시작한 사람의 사고방식은 당연히 다르다. 나는 손톱 아래의 여린 살점을 뜯었다. 오이카와는 나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에 비해 내 표정은 얌전했다.


내 몸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알아. 가망이 있는지 없는지 그런 건 내가 제일 잘 안다고. 그런데 그 상태에 있는 걸 뻔히 알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건 너한테나 나한테나 좋을 것 하나 없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당장 나보고 이와쨩을 찾아오는 걸 그만두고 돌아가서 배구연습이나 하라는 거야?”

……그건, 그래. 맞아. 그러라는 뜻이야.”


코피를 쏟아내며 엉망이 되어가던 시야로 오이카와를 쳐다보는 와중에 들었던 생각이 있었다. 부럽다고 생각했다. 미래에 오이카와의 손을 잡고 살아갈 사람은 누구일지 매일 생각했다. 오이카와의 앞으로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매일을 바랐다. 예쁜 여자를 만나 오이카와와 닮은 아이를 낳아도 괜찮고 남자를 만나 연인처럼 친구처럼 지내며 취미로 배구를 함께 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부러웠다. 원래 그 자리는 내 것이 분명한데. 네 행복 이상의 무언가를 바란다면 나는 미래의 누군가에게 자리를 비켜주어야만 한다. 희미해져가는 의식 속에서 이제 그래야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속좁은 질투를 했다. 오이카와. 너는 살아오는 내내 당연하고 익숙한 내 색이었는데. 나는 이제 오이카와의 시야를 칠해줄 수가 없다. 억울한 일이다. 어울리지도 않는 온갖 많은 계획이 있는데. 아직 네게 말하지 못한 수만 가지 말들과 지키지 못한 약속들이 있는데.


듣자듣자 하니까 끝도 없구나. 알겠어. 갈게.”

그래. 잘 가. 배웅은 못해주겠다.”


그날 나는 내 살을 꿰뚫고 피를 착취해가는 주삿바늘을 핑계로 울었다. 이토록 고독한 죽음이라니. 생각해본 적이 없다. 죽음이 이렇게 쓸쓸한 것 인줄 알았다면 지난 번 오이카와와 함께 본 영화 속 주인공이 죽을 때 조금 더 울어줄 것을 그랬다.


나는 흑백 세상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흑백 세상 속에 살았던 때는 고작 태어난 뒤 한 달이 전부였다. 기억이 존재하는 시절부터 내 세상은 줄곧 색깔이 가득했다. 사람들은 모두가 입을 모아 그렇게나 일찍 만나다니 너희는 정말 어쩔 수가 없구나.” 그렇게 말했다. 그때의 나는 그것을 어떤 뜻으로 받아들여야하는지 알지 못했다. 물론 그것은 지금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좋다고 받아들여야 할까? 어쩔 수 없는? 무엇을? 결국 지금에 와서 좋은 엔딩은 일어날 수가 없는데 말이다. 너무도 짧은 러닝타임이었고 너무나 빠른 엔딩 크레딧이다. 주연 이와이즈미 하지메, 오이카와 토오루. 그리고 이어질 후속작에 나는 없다. 그토록 빨리 만났기 때문에 이토록 빠르게 헤어지는 걸까. 내가 사라지면 네 세상은 곧바로 흑백이 되려나. 그 생각을 하니 죄책감에 몸이 쑤셔왔다. 어린 날, 아이들에게 자랑스럽게 색깔들을 설명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날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나이가 들어 주위의 모두가 색을 찾아가도 그 자부심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이걸로 오이카와와의 질긴 인연도 끝인 걸까? 이 한 마디로.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안녕.”

……뭐야?”


이럴 수가. 예상을 깨고 다시 만날 수 있기는 할까 생각했던 오이카와는 다음날 다시 나를 찾아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얼굴이었다. 오이카와는 내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며 뭐야, 못 볼 거 봤어? 아니면 내가 너무 잘생겨서?” 하는 실없는 소리를 내뱉은 뒤 들고 온 음료수들을 냉장고에 차곡차곡 쌓아 넣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결국 궁금증에 먼저 입을 열고 말았다.


왜 왔어.”

내가 영영 간다는 말은 안 했잖아?”

?”

어제는 배구연습을 하러 갔어. 정말이야.”

,”

생각해봤어. 이와쨩이 죽는다고? 하면서 하루 종일.”


그런 생각 정도는 예전부터 해야 했던 것 아닌가. 너무 경각심이 없다고. 나는 하체에 덮고 있던 이불의 끄트머리가 잔뜩 구겨지도록 말아 쥐었다. 일으키고 있는 상체의 허리가 뻐근했다.


근데 나. 지금 이와쨩을 만질 수 있어.”


오이카와가 냉장고 속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작게 말했다. 오이카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겨우 냉장고 문 위로 삐죽 보이는 머리칼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네 목소리는 마냥 단정함을 담고 있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마른 침이 식도를 타고 지나가며 천천히 위장으로 떨어졌다. 이불을 쥐고 있는 손등 위로 핏줄이 솟았다. 오이카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전히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이와쨩도 나를 만질 수 있잖아.”


아마 언젠가의 시간부터 너는 내일을 살고 나는 어제를 살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여전히 20살의 언저리에 머물러 너를 바라볼 것이고 오이카와는 그것보다 족히 배는 더 오래 걸음을 떼어야만 한다. 생각해봤다. 시간이 지나면 오이카와도 무뎌질 것이라고 말이다. 지금 당장 아프고 괴롭고 슬픈 감정들도 가차 없는 시간의 뭇매를 맞다보면 익숙해지고 견뎌낼 만한 것이 되리라. 설령 오이카와가 나에 대한 감정의 아픔을 변함없이 느낀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나처럼 그 고통조차 무뎌지는 순간이 올 것이다. 아픔이 무뎌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아픔의 시간조차 무뎌지는 순간이 분명 올 것이다. 오이카와가 나를 기어이 한 평생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이별을 아쉬워하고 후회한들 그로 인해 매일이 아프고 사는 동안 질병을 달고 산다고 해도 그 질병마저 원래 달고 살아왔던 고질병처럼 익숙해지는 순간이 올 것이 확실하다. 오이카와에게 허락된 시간은 아주 많으니까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때에 좋은 사람을 다시 만난다면 그깟 고질병 즈음이야 다른 약을 먹는 것으로 저 멀리 던져버릴 수 있을 것 또한 확실하다. 네가 그러기를 바랐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올바른 생각이었다. 네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지금 이 순간부터 네게서 멀어지는 것이 나중에 너를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게 할 방법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이제 이와쨩은 죽을 거니까 더 이상 안 돼. 라고 생각할 수 있어?”

…….”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음료수는 빨간 색 병이야.”

오이카와.”

난 네가 없었으면 이 병의 색깔조차 몰랐을 거야.”

애초에 내가 아니었다면 다른 사람이 보여줬을 색이야.”

그래. 그렇겠지. 근데 어떡해? 이미 만나버렸잖아.”


내가 멋없다는 것 즈음이야 알고 있다. 제대로 된 무엇 하나 남기지 못하고 무려 색을 보여준 상대를 두고 가버리는 모습이 얼마나 책임감이 없는지, 또 그런 상대에게 보여주는 마지막의 마지막 모습들이 고작 코피를 쏟고 괴로워하고 토악질을 해대는 모습이라니. 만약 오이카와를 불쌍히 여긴 신이 시간을 돌려 오이카와에게 영원히 함께 살아갈 상대방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쥐여준다면 절대로 나를 택할 리 없는 추함이다. 어쩌면 그랬기에 다가올 가장 최악의 모습을 오이카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 모른다. 눈 감은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 최악 중의 최악을 보이기 전에 오이카와를 위한 척, 오이카와를 보내주는 것이 미래에 조금 더 괜찮은 성과를 얻을 수 있게 하는 방법이지 않을까 고민했다.


이미 만나버렸잖아. 돌릴 수가 없어. 그래. 만나지 않았더라면 몰라. 그런데 만나버렸어. 정말 많고 많은 사람 중에 너를 만났어. 그것도 눈을 뜨자마자.”


혹 그것이 맞는 답일 수도 있다. 조금 더 모질게 굴어 너를 떨쳐내고 네가 내게 질리도록 만드는 것이 정답일 수 있다. 사실 가능성은 그게 더 높을지도 모른다. 그딴 자식과 함께 지냈던 내가 멍청하지. 네 입에서 그 말이 쉽게 나올 수 있도록 어떻게든 만들었어야 했을지 모른다. 그러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할 수도 있다. 내가 후회하지 않더라도 오이카와가 후회할지도 모르지. , 그때 그 자식과 그냥 영영 이별했어야 했는데. 그때 먼저 미련을 떨쳤어야 했는데. 그렇게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상황이 반대였다면 넌 나와 똑같은 말을 했을 거야. 그래. 물론 나도 너랑 똑같은 말을 했겠지. 난 알 수 있어. 조금만 생각해봐도 나오는 답이잖아. 이와쨩. 맞아. 넌 죽을 거야. 근데 내가 웃긴 거 하나 알려줄까? 나도 죽어. 사람은 누구나 죽어. 그게 대수야? 알게 뭐야. 이러고 당장 내가 교통사고로 먼저 죽어버릴지, 그런 거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 아무도 몰라. 정말 아무도 모른다니까.”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당장 내가 내일 죽어버린다고 가정을 해보자.”

그딴,”

그럼 내가 제일 하고 싶은 게 뭘까.”

오이카와.”

정답은, 나는 지금 하루 종일 이와쨩과 함께하고 싶어. .”


드디어 냉장고의 문이 닫혔다. 너는 굽혔던 허리를 천천히 펴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꽉 쥐고 있던 이불을 놓쳤다. 오이카와가 운다. 당차게 말하던 것과 달리 울고 있다.


네 말대로 네가 곧 죽는다면, 좋아. 네가 내일 죽는다면 제일 하고 싶은 게 뭐야? 말하기 쪽팔린다면 내가 알려줄까?”


나는 흑백 세상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흑백 세상 속에 살았던 때는 고작 태어난 뒤 한 달이 전부였다. 기억이 존재하는 시절부터 내 세상은 줄곧 색깔이 가득했다. 사람들은 모두가 입을 모아 그렇게나 일찍 만나다니 너희는 정말 어쩔 수가 없구나.” 그렇게 말했다. 그때의 나는 그것을 어떤 뜻으로 받아들여야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에야 그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답. 당장 나한테 보고 싶었다고 말해.”


오이카와. 우리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오이카와. 세 살 때 일을 기억 해?”

……그건 왜.”

기억이 날 리가 없지. 거의 17년 전이니까. 너한테도 나한테도.”


마지막까지 구질구질하다. 그래도 마지막 검문과 같은 질문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내가 없는 네 미래의 삶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불가항력적으로 나에 대해 잊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많은 것들을 오이카와에게 떠넘기고 사라지는 사람은 내가 될 것이고 남아서 그것들을 처리해야하는 것은 네가 된다.


그런데 너한텐 앞으로 25년 전이 될 수도 있고 30년 전이 될 수도 있어. 50년 전이 될 지도 몰라. 무려 20년보다 훨씬 긴 시간이 될지 모른다고. 우린 벌써 17년 전도 기억나지 않는데. 오이카와.”

…….”

나에겐 여전히 17년 전이겠지만. 너한텐 아니게 될지 몰라.”


지금의 치기어린 억지로 그 긴 시간들을 더 괴롭게 보낼 자신이 있어? 희망은 토해낸 지 오래이다. 그것들을 잔뜩 토해버리고 난 뒤 토사물로 엉망이 된 나를 너는 감당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거냐고 자꾸만 부정을 했다. 그게 더 너를 더럽고 힘들게 만들 뿐이라고 여겼다. 좋았던 순간들조차 떠올리지 않고 싶을 만큼 괴로워지는 것이 아니냐고 묻고 싶었다.

그래도 오이카와.


이와쨩.”


만약 정말 내가 가장 추하고 나약한 눈감음을 너라는 존재의 품에 숨긴 채 전부 보여줘도 괜찮다면 그 순간까지, 아니 그 후에까지 나는 가장 추하고 진득한 모습으로라도.


고작 50년이야.”, 오래도록 네게 기억되고 싶다.

이와쨩. 정답을 바꾸자. 지금 당장 나한테 키스해줘.”


그날 엉망으로 짠 맛이 나던 키스 이후 우리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돌아갔다. 삶의 아주 커다란 부분이 달라지거나 후에 펼쳐질 미래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내 병은 착실하게 진행되어 가는 상태였으며 툭 하면 어디 하나가 고장 나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이렇다 할 기적 같은 호전도 없었고 뭐 하나 제대로 말 할 특별한 일도 없었다. 말 그대로 언제나 같은 하루들을 보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나는 오이카와 몰래 녹음기 하나를 구입했다. 그다지 좋은 기종은 아니었다. 사실 그냥 인터넷을 검색해본 다음 가장 빠르게 배송이 올 수 있다고 하는 것 중 색이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주문했을 뿐이다. 편지가 나을지 그게 아니라면 일기 따위를 쓰는 것이 이로운 선택이었을지 모르겠으나 글씨엔 영 재주가 없으니 별 다른 도리가 없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무엇을 위한 것이냐 물었지만 나는 번지르르한 말 주변도 없었기에 그냥 웃어넘겼다. 그래. 말 주변도 없으면서 이걸 어떻게 사용할지 걱정이 되기는 하지마는. 그래서 더욱 이것을 고른 것이기도 했다. 일부러 고른 어려운 기종의 녹음기였다. 그리고 또 일부러 녹음기의 삭제버튼은 알아두지도 않고 설명서를 버렸다.


나는 알고 있다. 아마 글을 쓴다거나 하는 일을 했다간 얼마 지나지 않아 전부 찢어버리고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방법도 없겠지. 찢어버릴 수도 없으니 없애버리고 싶다면 박살을 내버리는 수밖에 없으나 지금의 내게 그럴 힘은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녹음기의 버튼을 눌렀다. 잘 녹음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랬기에 그냥 무작정 입을 열었다. 생소한 행동이었다. 녹음기는 작은 소음도 없이 작동했다. 녹음기에 이름 따위를 붙이는 건 우습지만 굳이 붙인다면 오이카와라고 부르고 싶다 생각했다.


 

1일째. 지금 시각은 오전 912.

보통 색을 보는 순간은 두 가지로 나뉜다. 그 사람을 만나는 순간 온 세상이 색에 물들거나 처음엔 아무렇지 않던 사람과 마음이 깊어지다 어느 순간 세상이 색으로 물들거나. 특히 요즘 들어선 후자의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들었다. 그러나 나와 오이카와는 전자의 경우로 색을 만났다. 태어난 지 한 달을 겨우 넘긴 나와 갓 태어난 오이카와가 서로를 보며 감정을 쌓을 시간은 없었을 테니 당연했다. 그런데 곰곰이 되짚어 보았을 때 그 어린 날에 오이카와를 만나 색을 보았다고 해서 당장 오이카와를 어떤 특수한 감정으로 바라보았다는 건 설명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남들이 말하는 필연적인 관계, 색을 보여준 사이라는 것을 떠나 내가 오이카와를 정말 특별하게 보고 있음을 인정한 이유는 분명 따로 있을 것이라는 소리였다. 왜 어느 순간부터 당연하게 내 옆자리는 네가 되었는지. 언제는 하루를 통째로 빌려 생각해보았는데 사실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내게 그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색은 당연히 보이는 것이고 그것에 도움을 준 것이 너이고. 딱 그 정도 마음가짐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색을 봐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냥 오이카와와 평생 같이 있겠거니, 짐작정도? 정확하게 기억한다.


그렇게 태평히 생각을 하며 살던 도중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처음으로 나와 오이카와의 관계에 의구심을 가졌다. 의구심이라기보다는 감정을 자각하기 전 가진 혼동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오이카와에게 고백을 했다. 그 뒤로는 쭉 이 상태. 변함이 없다. 당연히 함께인 사람에서 당연히 함께일 유일한 사람이 된 것은 묘하게 다른 의미를 지녔다.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 차이를 깨달았다. 너는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 그 차이를 꼬집은 순간을 말해보라면 참 우습게도 오이카와의 점프 서브를 보았던 날로 기억된다. 그날은 오이카와가 어설프지만 처음으로 꽤 강렬한 점프 서브에 성공한 날이었다. 몸을 뒤로 젖히고 코트 위에서 발을 뗀 그 순간부터 쭉 오이카와의 모습은 전부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있다. 그래. 생각해보면 그 강렬함에 반했던 것 같다. 반했다는 단어를 쓰기엔 조금 낯간지럽지만 새삼 깨달은 날 말이다.


오이카와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조용하다. 물론 내 기억에 남은 대부분의 오이카와는 언제나 입을 가만히 두는 법이 없었지만. 그래도 내 기억의 파편 속엔 오이카와의 고요가 남아있다. 조잘거리는 입을 멈추고 앞을 응시할 때가 있었다. “이와쨩.” 중요한 말이라도 할 것처럼 무게를 잡고 이름을 불렀으면서 입을 다물어버리는 때가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고 내 손길에 머리칼을 맡기던 때가 있었다. 눈에 띄게 조용한 순간이 지나면 오이카와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러고 있으면 꼭 이와쨩 소리가 들려.” 나는 그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상하지. 조용한 네 곁에 있던 나 역시 항상 침묵을 유지했는데 내 소리가 들린다니. 그리고 나는 그 의미를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미세한 고통에 눈살이 찌푸려지며 눈이 떠지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엔 고개를 돌리면 간이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는 오이카와가 보였는데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그 고요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그 침묵 속에선 누구보다 강렬한 오이카와가 존재감을 빛내고 있었다. 오이카와의 소리다. 네 소리가 들렸다. 지구가 회전하는 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한 순간 속에 네 소리만이 들린다. 그래. 지구가 회전했다. 이곳은 너와 있는 세상이다.


 

6일째. 지금 시각은 오전 1137.

어머니가 내게 공책 하나를 건네셨다. “청소를 하다 발견했단다.” 어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시곤 웃어보였다. 나는 어머니의 고른 치열을 바라보다 끝이 뜯어지고 군데군데 물에 젖었다 마른 자국이 있는 공책의 처음을 넘겼다. 공책의 내용을 본 나는 곧 어머니와 같은 웃음을 짓고 말았다.


나는 잔병치례조차 없었던 건강한 인물이었지만 딱 한 번 중학교 시절 호되게 감기에 걸렸던 적이 있다. 답지 않게 사흘 정도 학교를 쉬어야할 정도였다. 어찌나 아팠던지 골골거리는 숨만 겨우 내쉬며 이불 속에 파고들었던 기억이 있다. 평소엔 답답하여 잠을 청하는 내내 발로 뻥뻥 차댔던 이불이었으나 그날만큼은 아무리 목 끝까지 끌어당겨도 온몸에 한기가 들었다. 결국 또 기침을 내뱉은 다음 억지로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래에서부터 탁탁, 무언가 달려오는 소리에 귀를 열었다. 이와쨩! 오이카와였다. 나는 경쾌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오이카와는 곧바로 내 앞까지 달려온 주제에 막상 눈앞에 다다르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뭐야. 내가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로 싱거운 감탄 아닌 감탄 같은 질문을 내뱉고 나자 그제야 너는 입을 열었다. “이와쨩, 많이 아파?” 척보면 모르겠냐. 평소라면 그렇게 쏘아주었을 법도 한데 그날 내가 정말 많이 아프기는 했는지 대충 고개만 끄덕거리는 것으로 그쳤다. 오이카와는 미지근한 손바닥을 내 이마 위로 올렸다. 미지근한 것과 뜨거운 것이 만나 온도를 더해갔다.


정말 평소라면 더 더우니까 치우라 소리를 쳤을 텐데 그날의 나는 눈만 껌뻑거렸다. 그때 네가 무언가를 척 내밀었는데 그게 이 공책이었다. 처음 받았을 땐 이 녀석이 기특하게 수업요점정리라도 해온 줄 알았지. 펼쳐본 공책엔 한 가득 배구에 대해 적혀있었다. 사흘간 부에서 무엇을 했고, 누가 무엇을 성공했고, 누구는 이것을 더 보완하면 좋겠다! 하는 식의 문장들이 즐비했다. 나는 어이없는 웃음을 내뱉으며 이게 뭐냐는 투로 물었고 오이카와는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정말 지겨울 정도네.”


질린다. 아픈 사람한테 격려의 선물로 배구 요점정리를 건네는 녀석이라니. 단단히 삐어도 뭔가 삔 것이 분명하고 뭔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걸 받고 얼른 낫겠다며 다짐을 한 내가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놈이었다거나.


오이카와는 어린 시절 내가 아직 배구에 큰 재미를 가지지 못했을 때 자주 내게 이와쨩이 같이 배구를 해줘서 다행이야, 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할까. 기억을 못한다면 조금 억울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때의 오이카와는 어울리지 않게 소심한 척을 하며 말해 귀여운 맛이 있었는데. 징글징글한 지금에 비하면 그때가 오히려 많이 나았을지도. 그래도 그때의 너는 정말 약았다고 생각한다. 이와쨩이 같이 배구를 해줘서 다행이야. 그 말, 아무리 생각해도 계획적으로 한 것 같단 말이지. 손목으로 튀어드는 공에 대한 지겨움에 이제 잠시 다른 것을 하자, 라고 말을 하려해도 그 말 한 마디를 들으면 또 배구공을 집어 들었던 나를 오이카와는 알고 있었던 것인지. 알고 있었다면 내 예상대로 너는 그때부터 벌써 꽤 약았던 녀석이 분명하고, 아니라면 태어나길 천성이 그렇게 태어났는가 보다. 배구를 하자며 조른 것은 오이카와였지만 결국 함께 오랜 시간 배구를 하겠노라 먼저 선언했던 것은 나였다.


오이카와는 그런 나를 알고 있었던 것인지 천성이 그렇게 태어난 것인지. 개인적으로 후자가 아니길 바란다. 천성이 나를 잡고 흔드는 것이라면 그건 너무 내가 잡혀 사는 것 같잖아. 그런데 나 또한 오이카와한테 말하진 않았는데 네가 그때의 나한테 배구를 하자고 칭얼거려줘서 다행이다. 오이카와.


 

12일째. 지금 시각은 오후 89.

의사는 늘 나에게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물음표가 있는 질문은 지겨울 정도로 많이 건네지만 정작 그가 먼저 마침표가 있는 확신을 준적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엔 그 점이 답답하기만 했는데 후에 가선 그가 말할 단호한 결론이 겁나 견딜 수가 없었다. 오이카와는 항상 그를 부정남이라고 불렀다. 왜 좋은 이야기를 해줄 때가 없어? 투덜거리고는 했다. 네 말이 맞다. 그는 내게 있어 부정밖에 하지 않는 존재였다. 그러나 분명 그는 진실만을 이야기한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경우의 수만을 데이터로 뽑아서 내게 내민다.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불평불만을 해도 결국 수긍을 할 수밖에 없다고. 그날도 그는 내게 정확한 데이터를 내밀었다. 나는 장시간의 침묵 끝에 겨우 겨우 고갯짓 한 번을 해보였는데 처음으로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알고 있으려나. 입원을 한 후로 수백 번 내게 말하던 부정적 어투보다 단순히 그 찌푸림 하나가 더 와 닿았다. 그토록 와 닿을 수가 없다 여길 수 있을 만큼 지금의 상황을 잘 알려주었다.


오늘의 오이카와는 연습 시합이 있어 오지 못한다고 말했는데. 그가 나간 뒤 나는 계속해서 병실 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오늘 토오루가 온다고 했던가?” 내게 물으셨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코피가 났다. 익숙한 일이다.


 

18일째. 지금 시각은 새벽 5.

뭔가 움직이기가 힘들어졌어. 어젠 화장실에 가려다 넘어졌는데. 조만간 네가 와도 상체를 일으킬 수조차 없어지면 너는 화를 내려나, 아니면 울어버리려나. 오이카와. 이왕이면 내 위로 올라와 키스를 해주었으면 하는 욕심이 있었다.



24일째. 지금 시각은 오후 13.

오이카와한테 모르는 척 해주던 일이 하나 있다. 오이카와는 내가 눈을 감고 있으면 때로 내 코 밑에 손을 대본 다음 다시 제 자리에 눕고는 한다. 뭐가 널 그렇게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냐고 묻기엔 양심이 아팠다. 미안. 언제의 우린 서로가 숨 쉬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는데 말이지.


 

28일째. 지금 시각은 오후 1015.

무슨 바람이 분 것인지 오늘 오이카와는 시도 때도 없이 제 턱 밑에 두 손을 가져다 대며 이와쨩, 선물!”을 외치기 바빴다. 무슨 반응을 바라는 것인지 잘 모르겠어서 그냥 무시를 했는데 전혀 굴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33일째. 지금 시각은 오전 78.

오전 7시만 되면 간호사가 병실에 들어와 피를 뽑아 간다. 덕분에 내 기상시간은 자연스럽게 오전 7시가 되었는데 나는 바늘이 살갗을 뚫고 들어오는 느낌을 굉장히 싫어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내 피를 뽑으러 온 주사바늘을 보며 미친놈처럼 웃음이 흘렀다. , 아직 살아있구나. 그 따끔함을 느끼며 생각했다.


 

38일째. 지금 시각은 오후 55.

부쩍 나와 함께 야위신 어머니께 처음으로 먹먹한 목소리를 냈다. 직감할 수 있다. 지금이 아니면 그동안 쑥스러움을 핑계로 감춰둔 말을 할 수 없다. 어머니는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내 앞에 앉아계셨고 나는 어색하게 병원 복 소매를 잡아 뜯으며 입을 열었다. 얼마나 입술에 침을 발랐던지, 입술이 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이럴 때면 말주변이 좋은 오이카와가 부러워지곤 한다. 오이카와에게 물어봤더라면 더 좋은 말을 어머니께 건넬 수 있었을까. 나는 뒤늦은 탄식을 뱉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뱉으려는 말은 짧은 주제에 준비 시간은 너무도 길다. 그래도 어머니는 나를 기다려주셨다. 어쩌면 울고 계셨던 지도 모르겠다.


죄송해요.”


나오는 목소리가 어색하진 않을까 걱정했다. 한 번도 꺼내본 적이 없는 류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괜스레 손에 땀이 흘렀다.


……그 녀석은 저한테 색을 보여줬지만,”


그러나 마음이 무겁지는 않았다. 머뭇거림은 있어도 망설임은 없었다.


차마 사랑한다고 내뱉을 순 없었다. 다음에 너와 함께 내뱉고 싶다고 생각했다. 오늘이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는 것을 직감하여 입을 열었음에도. 나는 괜한 머쓱함을 느끼며 느릿하게 손장난을 쳤다. 세상을 보여준 이와의 작별이 곧이다.


 

39일째. 지금 시각은 새벽 425.

혹 누군가 내게 지금과 똑같은 삶을 반복할 것이냐 묻는다면 나는 단숨에 그러겠노라 말할 수 있다. 혹 모든 것을 거스른 뒤 이 삶을 연장하겠냐고 묻는다면 그 역시 단숨에 그러겠노라 말할 것이다. 혹 그래서 다음 생이 없어지고 앞으로의 행복도 보장할 수 없다는 리스크가 있어도 괜찮으냐고 묻는다면 나는 또 그럴 수 있노라 말할 수 있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른다. 시야 위로 어른거리는 불빛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정말 잘 모르겠다. 나는 어째서 이번 생의 반복을 허락할 수 있는지, 피를 토하고 가죽이 따가워지는 순간을 굳이 다시 걸어보라 한다면 걸을 수 있는지, 어쩌면 영원한 평화를 코앞에 두고 어떻게 또 가시밭길을 걷겠노라 신발을 벗어던질 수 있는지 용기의 출처를 알기 힘들다.


내가 오이카와의 말을 이렇게 인정하는 순간이 올 것이라고 어느 누가 예상은 했을까. 이미 만나서 어쩔 수 없다고 울어버리던 오이카와가 떠올랐다. 그 말이 우리에게 참으로 완벽하고 걸 맞는 변명이라고 생각한다. 면죄부도 이런 면죄부가 없다고 여긴다. 이해가지 않는 스스로의 선택에 가장 이론적이지 못하면서도 모두를 가장 완벽하게 설득시킬 수 있는 문장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맞아. 오이카와.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혹시 모른다. 지금과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졌을 수 있겠다. 내 이름도 이와이즈미 하지메가 아니었을지 모르고 네 이름이 오이카와 토오루가 아닌 것부터 시작됐을 지도. 나는 배구를 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우리의 인연은 어쩌면 평생 한 번도 마주치지 않고 끝나버렸을 수도 혹은 길거리에서 스쳐지나가고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살면서 존재의 유무(有無)조차 모르는 존재가 되었을 수도 있지. 지금은 제대로 상상도 가지 않지만 네가 누군지조차 모르는 삶 속에서 자연의 섭리에 따라 눈 감을 때까지 행복했을 수도. 그러나 이제 와 다 부질없는 만약의 이야기들이다. 오이카와의 말대로 이미 만나버렸기에 어쩔 수가 없다.


나에겐 태어나서 한 달하고도 열흘이 되는 순간 생겨버린 가장 비정상적이고 비논리적인 이유가 하나 있다. 오이카와. 나는 그것에도 네 이름을 붙였다. 그것은 가장 비정상적이며 가장 비논리적인 이름이다. 동시에 그 이름은 가장 확실한 색을 가지고 있다. 나의 모든 색은 그 이름으로부터 비롯된다. 스스로도 납득하기 힘들만큼 내 삶을 좌지우지하는 이름이었다. 오이카와. 나는 네 이름에 생각보다 많은 단어들을 담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훨씬 많은 단어들의 대체어로 네 이름을 불렀는지 모르겠다. 차마 너를 잡고 줄줄 다 외워줄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수를 말이다.


오이카와.”


끝내도 그 이름의 크기에 파묻혀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40일째. 지금 시각은 오후 1159.

혹 누군가 내게 지금과 똑같은 삶을 반복할 것이냐 묻는다면 나는 단숨에 그러겠노라 말할 수 있다. 혹 모든 것을 거스른 뒤 이 삶을 연장하겠냐고 묻는다면 그 역시 단숨에 그러겠노라 말할 것이다. 혹 그래서 다음 생이 없어지고 앞으로의 행복도 보장할 수 없다는 리스크가 있어도 괜찮으냐고 묻는다면 나는 또 그럴 수 있노라 말할 수 있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른다. 시야 위로 어른거리는 불빛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정말 잘 모르겠다. 나는 어째서 이번 생의 반복을 허락할 수 있는지, 피를 토하고 가죽이 따가워지는 순간을 굳이 다시 걸어보라 한다면 걸을 수 있는지, 어쩌면 영원한 평화를 코앞에 두고 어떻게 또 가시밭길을 걷겠노라 신발을 벗어던질 수 있는지.


그 해 겨울, 가장 춥던 한파 속 나는 눈을 감았다. 그날이 1231일이었다. 끝내 20살의 오이카와를 보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첫눈이 왔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다.

 

 

 

다시 눈을 떴을 땐 꼭 긴 터널을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처음 보는 장소였다. 꼭 처음 보는 아이보리 색 벽지가 눈앞에 존재했다. 그리고 거실에 보이는 커다란 남색 소파. 반대쪽 벽에 있는 커다란 시계와 달력. 시계는 이제 막 정오를 알리고 있었다. 그리고 달력은 XXXX610일을. 잠깐. XXXX610……? 나는 몸을 한 바퀴 돌려 다시 구석구석을 바라보았다. 현관에 보이는 빨간색 배구화. 혼자 살고 있음을 여실히 티내면서도 어설프게 두 사람 몫의 물건들을 배치해놓은 선반. 그 위에 큼직하게 놓인 상장들을 눈으로 훑어볼 때 하마터면 중심을 잃을 뻔 했다. 상장 밑에 적힌 이름은. 문소리가 들렸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거의 문소리가 들리는 것과 미세한 차이로 고개가 돌아갔다. 마음보다 시선이 앞서 길을 비추었다. 잠깐. 고개를 돌리고 시야를 확보한 다음에야 그 단어가 머릿속을 울렸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이와쨩?”


돌린 고개 끝엔 네가 있었다. 나의 가장 비정상적이고 가장 비논리적 인물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건 누가보아도 알 수 있는 오이카와 토오루였다.


오이카와.”

 



그 해 겨울, 完




타임리프 소재라고 했지만 어째 샘플에서는 제대로 나오지 않은 느낌이네요. (머쓱

실제 시간 순서는 그 해 겨울 -> Y에 대하여 -> 친애하는 어떤 이에게입니다만 추천 순서는 친애하는 어떤 이에게 -> Y에 대하여 -> 그 해 겨울입니다. (실제 회지에서는 친애하는 어떤 이에게 -> 그 해 겨울 -> Y에 대하여로 나옵니다.)

 

너와 나의 블루는 본편기반 소설로 컬러버스 + 타임리프 소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죽었던 이와이즈미가 살아 돌아오며 벌어지는 일들이 나옵니다. 모브의 비중은 샘플에 나온 길이가 전부이며 기타 등장은 일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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