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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HQ / 미래날조



그날은 특별한 날이었다. 이와이즈미는 평소 눈을 뜨고도 한참 침대에서 꾸물거리던 지난날과 다르게 한 번에 몸을 들어 올렸다. 어쩐 일로 맞춰 놓았던 알람보다 빨리 눈을 떴다. 이와이즈미의 어머니도 그런 그가 신기하다는 듯 농담 몇 개를 던지며 아침밥을 이야기했다. 이와이즈미는 식탁으로 향하는 와중에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역시나 그가 예상했던 대로 알림창이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다. 진동으로 설정해놓은 탓에 잠시 핸드폰을 올려둔 그의 무릎이 떨렸다. 이와이즈미는 끊임없이 제 존재를 알리며 온몸을 부르르 떨어대는 핸드폰을 무심하게 열어보았다. 무수히 쏟아지는 연락들과 축하들. 특히 고교 시절 배구 부 라인 방은 채팅을 하나하나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메시지가 쌓이기 시작했다. 평소였다면 시끄럽다고 면박을 줄 법도 하건만 오늘의 이와이즈미는 오히려 오늘이 정말 오고야말았다며 싱거운 웃음을 내뿜는 게 고작이었다. 어쩌면 이들 중 가장 오늘을 기다렸다. 아직 다 사라지지 않은 그의 소년미가 그 웃음 위에 적나라하게 올라탔다.


그날 이와이즈미의 예상과 다른 점이 있다면 분명 채팅 방에서 가장 화려한 이모티콘과 시끄러움을 담당해야할 누군가가 조용했다는 것이다. 아직 자고 있나? 이와이즈미는 오늘따라 유독 조용한 누군가의 라인 프로필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짐작이 가는 사람이었다. 이와이즈미는 그의 프로필을 클릭해보았다. 꼭 제 삐죽한 머리가 모퉁이에 살짝 드려져 있는 사진이었다. 프로필의 주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든 채 혀를 약간 내밀고 있는 사진부터가 시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이즈미는 확대된 프로필 사진을 잠시 바라보다 그 갈색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이와이즈미의 손길에 제 멋대로 액정 속 사진을 확대한 핸드폰의 화질이 선명했다. 이와이즈미는 그 모습을 보며 또다시 중얼거렸다. 오늘이네. 드디어 오늘이 밝아오고야 말았다. 몇 번을 중얼거려도 부족한 깨달음이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이와이즈미에게 있어 디데이와 같은 날이었다. 조금 지겹다면 지겨운 레퍼토리이다마는 오늘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에게 그동안 이어온 친구 관계를 그만두자 선언할 생각이었다. 떨어진지 고작 이주일이 조금 넘었다. 졸업 이후 대학이 떨어져 예전에 비해 만남이 줄어들기는 했으나 그래도 꼬박꼬박 만나왔다. 기실 그리 먼 대학도 아니었기에 못해도 사흘에 한 번씩은 짧게나마 눈도장을 찍어왔다. 그리고 열아홉의 겨울이 찾아왔다. 장기 합숙 훈련을 떠난 오이카와 덕에 제대로 얼굴을 보지 못한지 벌써 이주가 넘었다. 어떻게 본다면 둘의 인생에 있어 가장 멀리 떨어져 지낸 기록이었다. 고작 14일이 말이다. 그러나 이와이즈미는 그 14일 남짓 되는 시간 동안 몇 년을 참고 참아오던 감정의 폭발을 참느라 혼쭐이 난 참이었다. 알음알음 쌓아오던 벅차오르는 감정들을 어르고 달래길 14일이었다. 그러니 그만큼 오늘은 그에게 결전의 날이었다. 이미 선고는 끝냈다. “내일 12. 시간 비워놔.” 거의 결투장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만큼 일방적이고 공격적인 선언이었다.


어제 오이카와에게 그 라인을 보내었을 때 오이카와는 오이카와씨는 장미꽃 같은 건 별론데.” 따위를 주절거렸다. 눈치만 빨라 얄미웠다. 새삼 그 얄미움을 회상하니 다시 헛웃음이 그의 얼굴을 스쳐지나갔다. 이와이즈미는 문득 제 방 책상 위를 쳐다보았다. 괜히 주위를 둘러본 다음 조심스럽게 뻗은 손길에 잡혀온 것은 오이카와가 늘 사용하고 있는 브랜드의 하얀 무릎 서포터였다.


그날이 열아홉의 1231일이었다. 약속 시각은 12, 현재 시각은 11. 어찌 보면 결과를 뻔히 알고 있는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바닥에는 가볍게 땀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혀를 차며 입고 있는 정장바지 위로 손바닥을 문질렀다. 그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박하사탕을 입안에 넣고 굴리며 나갈 채비를 했다. 입안에서 굴려지는 박하사탕이 온몸을 녹여가며 시원함을 내뿜고 있었다. 상쾌함이 발끝을 스쳐갔다. 아마 이후에 돌아오는 발걸음 역시 상쾌하리라.


그의 계획대로라면 원래 그날은 그런 날이어야만 했다.



 

이와이즈미는 완전히 부서진 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그날 오이카와는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았다. 조금 늦을 것 같다는 라인에 속으로 핀잔을 주고 기다린 지 한 시간이 흘렀을까? 결국 답답함을 참지 못한 그가 오이카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받지 않았다. 몇 번을 반복하여 걸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은 기계음뿐이었다. 두 시간을 기다렸을 때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의 집으로 찾아갔다. 오이카와의 어머니는 그가 이미 집을 나간 지 꽤 시간이 흘렀다고 대꾸했다. 설마 동네에서 길을 잃었으려고. 이와이즈미는 당최 어디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 모를 오이카와를 열심히도 기다렸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나타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와이즈미를 만나주지 않았다. 이와이즈미가 아무리 그를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오이카와 토오루가 실종됐다. 이와이즈미가 제 스스로 던져 깨트린 손목시계를 무시한 채 핸드폰을 들었다. 오이카와와의 라인 방은 여전히 1231일 오전 1159분에 도착했던 미안 조금 늦을 것 같아! 사랑해 완전 사랑해 이와쨩하는 메시지와 엉엉 울고 있는 이모티콘 하나가 전부였다. 그것이 끝이었다. 그리고 오이카와 토오루는 아무 실마리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그 누구도 그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소멸로 향한 전력질주였다.


하루 하고도 8년 남짓이 흘렀다. 그사이 이와이즈미는 피할 수 없는 성년을 맞이했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모두에게 있어 미성년의 모습으로 머문 채였다.

 

 

이와이즈미는 구두의 앞 코로 바닥을 두들겼다. 오늘 아침 막 비가 그친 바닥은 그가 두들길 때마다 아직 남은 습기를 피어 올리며 작은 물방울들의 튕김을 만들어내었다. 이와이즈미는 그것을 바라보다 들고 있던 곤봉을 휘휘 돌려대었다. 근래, 그는 곤봉을 들고 마을의 가장 큰 사거리에 서 있는 시간이 늘었다. 이와이즈미는 이제 손에 착 감기는 곤봉을 다시 한 번 힘차게 휘두르며 서로 크락션을 울리기 바쁜 자동차들의 방향을 정해주기 시작했다. 가끔 큰소리로 고함을 치며 다리를 바쁘게 움직이기도 했다. 그가 소리를 칠 때마다 가느다랗게 핏줄이 섰다. 핏줄을 따라 그의 답답함도 불룩거리는 기분이었다.


이 짓을 시작한지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이와이즈미는 오늘도 어김없이 삿대질을 하며 화를 내는 아줌마 아저씨들을 말리다 나가버린 목에 걸걸한 가래를 내뱉었다. 젠장. 이놈의 신호등은 언제 즈음 정신을 차릴 런지. 이와이즈미는 계속해서 색을 왔다 갔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신호등을 쳐다보았다.


최근 마을에 일어나는 일들이 심상치 않았다. 아니. ‘심상치 않았다.’ 라고 하기엔 어쩐지 사소했고 사소하다고 끝내기엔 계속해서 눈에 밟히는 거슬림이 가득했다. 몇 년이고 멀쩡하던 신호등이 일주일에 몇 번씩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깜빡거렸고 아직 초여름임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비정상적일 정도로 기온이 올랐다. 그 더위 때문인지는 몰라도 광장에 있는 커다란 분수대는 하루에 적어도 세 번 이상 수도관이 터져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갑작스러운 단수와 정전의 횟수도 늘었으며 핸드폰 통신 이상도 마찬가지였다. 하나씩 떼어놓고 보자면 참으로 사소한 일일지 몰랐으나 그 모든 것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 사람들은 답답함을 느끼고 한껏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일주일이나 지났음에도 아무런 원인도 찾지 못했다. 그러니 당연하게 해결법도 없었다. 그때 까마귀가 울었다. 몸집이 꽤 커다란 녀석이 여럿이다. 전봇대에 일렬로 앉은 그들은 깍깍, 절대로 빈말로도 예쁘다 할 수 없는 목소리를 내며 저들끼리의 곡조를 읊어댔다. 이와이즈미는 목울대를 만지작거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막 하늘 정중앙에 멈춰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여름 햇살이 사방에서 그를 찔러댔다. 근심을 가득 담은 땀 한 방울이 그의 이마를 날렵하게 타고 흘렀다.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어느새 어엿한 경찰이 되었다. 잠깐의 방황을 제외하면 누구보다 그 과정을 착실히 밟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이와이즈미는 하루 종일 머리에 얹고 있는 경찰모를 살짝 벗겨내며 그 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었다. 하얀 와이셔츠의 등 부분이 땀으로 정복당하기 시작했다. 이와이즈미는 제 손목에 조금 헐겁게 매달린 채 달랑거리고 있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오후 2시 반. 30분의 휴식 시간 다음 다시 마을을 한 바퀴 돌아야 했다. 그가 아침부터 곤봉을 휘두른 것을 하늘도 가엽게 여겨준 모양인지 마침 신호등도 멀쩡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와이즈미가 얼른 그곳을 빠져나왔다.


더워.”


그는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는 단어를 짓뭉개며 발걸음을 옮겼다. 내내 소매를 걷고 있었던 탓인지 강렬한 햇빛에 노출되었던 팔 부분이 빨갛게 그을린 채 화끈거렸다. 그는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 무심하게 손끝으로 꾹 눌러보았다. “이와쨩, 그러다 진짜 새카맣게 변해버린다!” 어느 목소리가 울렸다. 그는 여지없이 찾아오는 두통에 눈을 감았다 뜨며 잠시 일사병과 비슷한 현기증을 느껴야 했다. 그래.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어느새 어엿한 경찰이 되었다. 그리고 오이카와 토오루가 실종된 지 8년 하고도 반년이 넘게 흘렀다. 19살의 1231일에 실종된 오이카와 토오루를 28살의 여름이 되도록 찾지 못했다.


마을이 이유를 찾을 수 없는 미묘한 일들에 둘러싸인 이후 누구도 함부로 언급할 수 없는 경계가 생겼다. 모두들 예민함과 경계심을 안고 매일을 살아갔다. 이와이즈미는 몰래 골목에 숨어 급하게 담배를 입에 물었다. 들키면 사살.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는 두 볼이 움푹 들어가고 폐가 살짝 쪼그라들 정도로 연기를 끌어마셨다. 그리고 그는 새삼 골목 안 쪽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쪽은 관할 구역이 아니라는 이유로 제대로 둘러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생각하니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딱히 그의 성격에 관할 구역이 아니라는 이유로 30cm 정도 차이 나는 골목 안 쪽을 돌아보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것이 요즘 같은 판국이라면 더욱이. 이와이즈미는 담배꽁초를 발로 비벼 끈 다음 그것을 주워들어 주머니 속에 쑤셔 넣었다. 그의 마지막 양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는 담배 냄새가 깃들었다. 그는 골목 안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곳에 이런 장소가 있었던가? 순간적으로 고개를 스쳐가는 의문이었다.


이와이즈미는 마치 이방인처럼 그곳을 둘러보았다. 높지 않은 건물들의 높이가 그의 눈 안에 딱 들어맞게 박혔다. 그때 까마귀가 울었다. 순간적으로 소리가 울리는 곳에 고개를 돌렸던 이와이즈미는 제가 쳐다보자마자 푸드덕거리며 날아가는 까마귀 떼에 다시 시선을 옮겼다. 꽤 이른 감이 있는 움직임이었다.


폐가?”


이와이즈미가 중얼거렸다. 그의 말 그대로였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천장이 반 즈음 가라앉은 폐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한 눈에 보아도 거미줄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분명 작년 초봄 마을의 대대적인 재개발이 있었는데 이 골목은 아니었던가? 그는 느릿한 시선으로 폐가의 풍경을 눈 안에 담기 시작했다. 그때 이와이즈미는 그 풍경을 보며 어떠한 말을 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무전기가 울었다. 이와이즈미는 급하게 무전기로 손을 뻗었다. 그의 허리춤에 걸려있던 무전기에서는 제 구역 이름을 외치고 있는 선배의 목소리가 바쁘게 울리고 있었다. ! 이와이즈미는 선배가 부르는 목소리에 우렁차게 대답하며 바쁘게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 망할 신호등이 또 고장 난 모양이었다.


그래서 내가 무슨 말을 하려했지? 이와이즈미의 삐죽거리는 머리칼 위로 물음표가 그려졌지만 이내 그 의문문조차 머리에서 사라졌다. 아마 이와이즈미는 알지 못했겠지만 그는 그 말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내뱉을 수 있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그 천장이 반 즈음 내려앉고 거미줄이 즐비한 폐가를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어떠한 단어 혹은 문장을 내뱉으려했다는 사실이다. 발걸음에 묻는 미련이 애매했다.


 

이와이즈미는 뭉친 어깨를 앞뒤로 돌리며 스트레칭을 했다. 수고하십시오. 이와이즈미는 홀가분함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담고 있는 목소리로 그 말을 내뱉고 신속하게 경찰서를 벗어났다. 그의 등 뒤로 그래, 수고했다!”, “쉬어라!” 부러움과 수고의 인사가 쏟아졌다. 오랜만의 휴일이었다.


오랜만의 휴일. 단어만으로도 무너질 것 같던 허리가 곧추서는 기분이었다. 꼬박 일주일을 내도록 밤샌 뒤 생일이라는 핑계로 겨우 얻어낸 하루의 휴일이다. 하긴. 하루도 엄청난 성과였다. 이마저도 그가 현재 근무 중인 경찰서에서 가장 어린 와중에 또 가장 많은 일을 처리한 것을 인정받아 겨우 받아낸 것이다. 이와이즈미는 집에 도착하여 제복을 벗자마자 마법이 풀린 것처럼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담배로 손을 뻗었다. 그가 베란다로 향했다. 이 순간만큼을 기다렸다는 듯 재빠른 행동이었다. 그때의 시간이 69일 오후 1130분이었다.


물론 경찰들은 하루 종일 담배를 피울 수 없다! 하는 법이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그는 근무복을 입고 있는 시간 동안은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피우지 못했다. 굳이 피우려면 눈길을 피해 못 피울 것도 아니었으나 그는 적어도 근무 중에는 담배를 멀리했다. 정말 간혹 그 절대 잊고 싶지 않지만 떠오를 때마다 어김없이 손끝을 쑤시게 만드는 누군가를 생각했을 때가 아니라면 말이다. 가령 오늘처럼. 기실 그러한 것들을 다 떠나서 굳이 매일 매일 모든 근무 시간에 경찰복을 완벽히 입을 필요는 없었다. 특히 근무 시간 내도록 모자까지 전부 착용하고 있는 인물은 이와이즈미 혼자였다. 그러나 이와이즈미는 근무를 하는 모든 순간동안에는 무조건 제복을 입고 있었다. 가끔 더운 여름이 와 일사병이 일어도 그는 절대로 무엇 하나 벗지 않았다. 모자를 벗어내고 땀을 닦는 행동조차 조심스러웠다. 주위에서는 도대체 왜 그러느냐며 그의 답답함에 의문을 가졌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순찰 다녀오겠습니다.” 하는 지극히 그답고 고지식한 회피의 기술을 이용할 뿐이었다.


이와이즈미는 매캐한 담배 냄새를 들이마시며 피로를 함께 뱉어내었다. 생각해보면 성인이 되자마자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던 마츠카와에게 그런 걸 왜 피우냐며 핀잔을 주었던 때가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오히려 반대였다. 마츠카와는 담배를 끊었고 이와이즈미는 소위 말하는 골초가 되어 있었다. 이젠 이와이즈미가 잔소리를 듣는 입장이었다. 이와이즈미는 그 뒤바뀜에 의미 없는 웃음을 보이며 베란다의 난간에 기대었다. 평화롭네. 베란다 난간에 기대어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히고 있던 이와이즈미는 제 머리칼을 살랑거리며 지나가는 바람을 만끽했다. 이와이즈미가 젖혔던 고개를 똑바로 들었을 땐 베란다 창문 너머 TV 모니터가 보였다. 뉴스가 틀어진 TV를 바라보자 오래도록 손대지 않았던 게임기가 떠올랐다. 오늘 밤개기월식…」동시에 깜빡하고 사오지 못했던 맥주 한 캔이 떠올랐다.


, 결국. 이와이즈미는 새삼 욕망에 충실한 스스로를 향해 감탄을 내뱉으며 주머니 안으로 손을 찔러 넣은 채 부지런히 다리를 움직였다. 그는 얇은 후드 티 모자를 푹 눌러쓰고 휘적거리며 밤거리를 걷고 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 수상해보이기 좋은 차림새였다. 귀찮아. 입은 끊임없이 그 말을 외치고 있었지만 그는 어느새 기대감 섞인 발소리의 볼륨을 높이고 있었다. 그의 집은 혼자인 남성이 살기에 가격 대비 꽤 넓은 축에 속해있었고 교통편 역시 썩 나쁘지 않은 편에 속했다. 다만 단점이 하나 있었다면 집에서 편의점까지 거리가 꽤 있다는 사실이었다. 뭐 그것도 오늘처럼 괜찮은 기분을 가진 하루라면 산책하는 기분으로 간간이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갈 수 있었으니 나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결론적으로 이와이즈미는 캔 맥주가 든 검은 봉지를 얻는 데에 성공했다. 그는 손가락에 끼운 검은 봉지를 슬쩍 내려 보다 만족스럽다는 듯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얼른 돌아가 샤워를 한 다음 목구멍에 맥주를 들이 붓고 싶었다. 그 뒤는 시시한 계획이지만 오래 눈을 붙이고 싶었다. 골이 아플 정도로 오래 자고 싶은 것의 그의 소박한 소원이었다.


,”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던 이와이즈미의 발걸음을 잡아 끈 가게가 하나 있었다. 낯선 곳은 아니었다. 가끔 그가 들렸던 24시 중고 게임 거래 센터였다. 이 마을에 정말 오래도록 자리를 잡고 있는 가게였다. 그것도 곧 아니게 되는 모양이지만. 아직도 눈이 아프도록 강렬하게 형광등 불빛을 내뿜고 있는 가게의 창문 위로 폐점 정리 세일이라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그 폐점 정리 세일이라는 문구를 보며 걷던 그대로 백스텝을 했다. 자신이 이토록 유혹에 약한 사람임을 절실히 깨닫는 하루였다. 그는 지나쳤던 길을 도로 돌아가 민망한 손길로 가게의 문을 열었다. 그가 문을 열자 딸랑거리는 익숙한 종소리와 함께 여전히 푸근한 인상의 아저씨가 오랜만이네, 이와이즈미군.” 정겨운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그가 이 게임 가게에서 오래된 단골 취급을 받게 된 계기는 무려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8년 전, 20. 이와이즈미는 그때 멀쩡히 다니고 있던 학교에 휴학계를 낼 정도로 게임에 빠져 살았다. 그 당시 이와이즈미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말릴 방법도 없었다. 그는 집 밖으로 나오지도 문을 열어주지도 그렇다고 연락을 받아주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게임만 하며 살았다. 가족들이 울면서 찾아오든 말든, 친구들이 전화기에 불이 날 정도로 전화를 하든 말든. 게임기 하나를 붙잡고 온종일 그것만 붙들고 살 뿐이었다. 배가 고프면 냉장고를 뒤져 한가득 쌓아 놓은 시리얼, 라면, 통조림 따위를 따 먹었고 그 외에 움직일 때는 화장실에 갈 때가 전부였다. 엉망으로 살았다. 다시 생각해보면 민망할 정도로 방탕했던 시간이었다. 그가 그랬던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게임을 하며 그 시끄러운 세상 속에 뛰어드는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게임의 사운드와 눈 아프고 어지러운 모니터 스크린을 보는 것이 좋았다. 눈앞에 펼쳐지는 몬스터들 혹은 미션들을 해치우는 데에만 집중을 하면 된다는 점이 좋았다. 오로지 그것에만 집중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와이즈미는 불을 뿜으며 저를 덮치려드는 몬스터들을 건조한 눈길로 쫓으며 칼로 찔러 죽였다. Game Clear! 그리고 그 창이 뜨면 찰나의 쾌감과 더불어 그 여느 때보다 우울한 박탈감이 그를 덮쳤다. 그러면 그는 그것을 회피하기 위해 다음 게임을 열어볼 수밖에 없었다. 게임 외의 다른 생각이 드는 것을 막기 위한 극단적인 수단이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지금의 그는 그렇지 않았다. 지금도 종종 게임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 때가 있었지만 다시 그 정도로 오래 게임만을 붙잡고 하진 않았다. 이제 완전히 건전한 취미 생활이 중 하나였다. “나는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심장이 떨린다.” 그의 어머니는 이제 겨우 그날에 대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이즈미는 눈에 보이는 게임팩들을 들어보며 이것을 집으로 데려갈지 말지 고민했다. 결국 아주 마음에 끌리는 게임이 없었던 그가 들고 있는 게임팩을 다시 내려놓을 심산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가 주인아저씨와 머쓱한 안부인사라도 나눌까 싶어 고개를 돌렸다. 그때 계산대 옆 선반이 그의 눈에 담겼다. 그 위로 경찰 제복을 입고 있는 장식용 레고 하나가 보였다. 동시에 떠오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당황하여 손에 잡히는 아무 게임팩을 덥석 집어 들고 말았다.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경찰? 멋지지. 제복 입은 이와쨩이라니. 이와쨩은 못생겼지만, 아야, 아파! 아무튼! 어울릴 거야. 멋지잖아. 있잖아, 그 모습 나 꼭 처음으로 보여줘.

 

그는 습관처럼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 풀어내려 했다. 그러나 손에 잡힌 것은 단추가 아닌 얇은 후드 티의 면 자락이 전부였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젠장. 담배를 두고 왔다. 그가 금단 증상처럼 달달 손을 떨었다. 가게 아저씨는 그런 그에게 냉큼 계산된 게임팩을 쥐여주었다. 감사합니다. 이와이즈미는 꾸벅 인사를 하고 밖을 나섰다. 그리고 그때야 제 손에 들린 게임팩을 내려다보았다. SF 판타지가 어쩌고. 이와이즈미는 어쩐지 살짝 싼 티가 흐르는 커버를 쳐다보며 재차 한숨을 쉬었다. 계획 없던 돈을 버린 기분이 들었다. 얄팍한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가게에 들어온 과거의 제가 후회스러웠다. 그래도 그는 그 게임팩을 버리지 못했다. 차마.


이와이즈미는 집에 돌아와 원래 목적이었던 맥주의 캔 뚜껑을 따내었다. 캔 입구가 열리며 시원한 소리가 울렸다. 그와 함께 하얀 거품이 일제히 솟아올랐다. 이와이즈미는 급히 그 위로 입술을 가져다대며 가지고 있던 검은 봉지를 소파 위로 집어 던졌다. 그리곤 맥주와 같이 사왔던 과자들을 펼치며 무미건조하게 TV를 켤 뿐이었다. 기계적으로 리모컨을 눌러 채널을 옮기던 그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오늘은 볼 것이 없음을 인정하고 말았다.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니 무언가 재미난 방송을 바라기에는 양심 없는 새벽 시간이기는 했다. 이와이즈미는 한숨을 쉬며 지루하다는 말을 뱉어버리고 눈을 감았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 보니 잠에 살짝 빠져들 뻔하기를 잠깐, 졸다가 머리통이 한 차례 꺾인 그는 놀라서 눈을 떴다. 차라리 침대에 가서 자자. 그는 그렇게 다짐하며 기지개를 켰다. 그는 방으로 떠나기 전 펼쳐놓았던 간식거리들을 치우려했다.


주섬주섬 쓰레기를 치우고 있는 그의 발끝에 무언가 결렸다. 얼레. 그는 무언가 묵직하게 들어찬 검은 봉지를 바라보다 그제야 둔탁한 탄식을 내뱉었다. 걸어오는 내도록 이것을 왜 샀는가에 대해 고민을 했으면서 집으로 들어온 순간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던 존재였다. 이와이즈미는 뒤통수를 만지작거리며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냥 자려고 했는데. 그는 그새 달아나버린 잠을 아쉬워하며 검정 봉지를 털어냈다. 바닥에 떨어진 게임팩은 여전히 그의 취향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커버 사진을 뽐내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그것을 잠시 쳐다보다 곧 어깨를 으쓱거리곤 이것도 오랜만이라며 스스로와 합의를 했다. 그는 익숙한 손길로 CD를 꺼내 게임기에 집어넣은 뒤 로딩을 기다렸다. 모니터 위에 금세 기다란 바가 나타나 로딩의 끝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검은 스크린. 연결이 잘못되었다는 알림이 떴다. 뭐야. 기껏 사온 CD가 불량인가? 이와이즈미가 역시 돈을 버린 것이 맞았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모니터를 끄려했다.


그 순간 화면 가득 게임 배경이 차올랐다. 고쳐진 건가? 이와이즈미가 중얼거렸다. 커버에 있는 사진과는 느낌이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시대 배경이 고전인 게임이었던가? 아니면 처음 시작만 이런 건가. 이와이즈미는 금방이라도 눈 아픈 빛을 뿜으며 세계를 구해야할 것만 같던 게임 커버와는 다르게 어딘가 조용히 가라앉은 배경을 의아스러워했다. 시야가 조금 따가웠다. 게임 특유의 바람 소리가 이상하게 생동감이 넘쳤다. 그리고 게임은 천천히 카메라 앵글을 돌려가며 주위를 비춘다. 화려하게 장식된 누군가의 방, 온통 붉은 인테리어 속에서 유일하게 파란색을 뽐내고 있는 침대, 못해도 몇 백 년 전인 것 같은 창밖의 풍경, 제 선배가 챙겨보는 사극 드라마의 세트장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와이즈미가 데자뷰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때 스크린이 떴다.

 

게임을 시작하시겠습니까?

.

아니오.

 

딱히 그 질문에 고민을 할 이유가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망설임 없이 .’ 버튼을 클릭했다. 그리고 그때 다시 새로운 스크린이 떴다.

 

이 게임은 실제 과거를 투영했으며 플레이를 오래 지속할 경우 정신적 피곤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정말로 게임을 시작하시겠습니까?

.

아니오.

 

실제 과거, 투영, 피곤함, 이와이즈미는 몇 가지 단어가 거슬린다고 생각했다. 역사를 반영했다는 게임은 많이 보았으나 실제 과거를 투영했다는 문장을 사용한 게임은 처음이었다. 그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등 뒤를 타고 꾸물거리는 것을 느꼈다. 역시 그냥 잘 걸 그랬나.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게임을 하면서 아주 보지 못할 문장들은 또 아니었다. 단순히 단어 선택이 조금 특이한 것뿐이겠거니. 이와이즈미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제 거의 다 마셔가는 식어버린 맥주 캔을 들어올렸다. 이번에 그는 네와 아니오 사이에서 고민을 했다. 그 순간 그를 기다릴 시간이 없다는 듯 급하게 스크린이 넘어갔다.


그때, 스크린 한 가득 오이카와의 얼굴이 스쳐갔다.

 

그 순간 이와이즈미는 눈을 떴다. 언제 잠에 든 것이지? 이와이즈미는 그 순수한 의문을 지으며 게임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게임은 종료되어 있었다. 또다시 연결이 끊어졌다는 듯 검은 화면을 유지하고 있었다. 제가 꿈을 꾼 것일까? 그러나 분명. 아니. 아니다. 그럴 리 없지. 이와이즈미는 그것을 단순 기분 나쁜 꿈으로 치부하며 그대로 그 게임팩을 서랍장 깊숙한 곳에 처박아두었다. 바깥은 어둠이었다. 온통 어둠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날 이와이즈미의 꿈엔 오이카와가 나오지 않았다. 사실 오이카와가 실종된 다음 그는 이와이즈미의 꿈에 나타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그 게임의 기억을 단순 꿈이라 여기며 허무한 욕설을 날렸다. 어떻게 처음으로 꿈에 나와도 그런 모습으로 나오는지. 그는 터져 나오는 허무함과 함께 그 불쾌한 꿈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이와이즈미가 게임을 최초로 실행한 것이 스물여덟의 610.

그 뒤 그는 꼬박 한 달이 넘도록 그 게임의 존재를 잊었다.

 

 




 

 

안녕하세요 비비빅탑입니다.

7편을 끝으로 웹연재 분량은 끝이 났습니다.

덧붙여 카르마는 너와 나의 블루와 평행 세계를 이루고 있는 소설입니다.


다만 따로 읽을 경우 전혀 상관이 없으므로 굳이 두 권을 읽으셔야 내용 이해가 가능하거나 하는 일은 없습니다.


길다면 긴 분량을 함께 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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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HQ / 세이죠


BGM : https://youtu.be/6rS7OUGXUik



덩치 값 좀 해라.”


하나마키는 커다란 덩치를 웅크리고 있는 오이카와를 향해 타박했다. 마츠카와 역시 짧게 혀를 차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굴하지 않았다. 그는 몇 번이고 언급되고 있는 커다란 덩치를 둥글게 만 채 이와이즈미의 어깨에 잔뜩 기대어 있었다. 이와이즈미가 제 어깨에 닿은 정수리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치만 역시 싫단 말이야. 왠지 싫다, 그런 거 있잖아!”

퍽이나.”


이와이즈미를 제외한 이들의 짓궂은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의 얼굴은 더더욱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와이즈미는 어깨의 무게를 느끼며 별 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혼자 저를 타박하지 않는 이와이즈미에게 보란 듯이 엉겨 붙으며 투정을 부려댔다. 물론 이와이즈미는 그 역시 그다지 귀를 기울여 듣지는 않았다. 흔한 광경이었다. 어지간한 귀신이나 공포 영화엔 늘 겉으로만 무섭다며 소리를 질러대던 오이카와는 유독 불길이 거세게 나오는 장면만은 진심으로 피했다. 평소 감정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던 얼굴에 노골적인 더부룩함을 보이고는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마츠카와의 집에서 틀어둔 영화에 불길이 붙자 이와이즈미의 어깨를 파고든 것이다. 이와이즈미에게 있어선 어렸을 때부터 익숙한 오이카와의 불길 혐오였다. 이와쨔앙. 이와이즈미가 아무 말이 없자 오이카와는 그의 팔뚝을 잡아왔다.


머리를 파묻은 상태에서 팔뚝까지 감아온 모양새가 평소보다 배로 어리광을 표현했으나 그래도 이와이즈미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하나마키와 마츠카와는 그러한 이와이즈미의 얌전함에 고개를 저었지만 기실 그들도 오이카와도 알고 있었다. 장난스럽게 들러붙는 것을 제외하고 (이것조차 완벽히 밀어내진 않는다.)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를 밀어내는 일은 없었다. 입으로는 거친 말들을 뱉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오늘의 이와이즈미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이와쨩? 오이카와가 한 번 더 이와이즈미를 불렀다. 시끄러. 이와이즈미는 그제야 오이카와의 얼굴을 손으로 누르며 대꾸를 했다. 분위기는 곧 평소와 똑같이 흘러갔다. 오이카와는 영화에서 불길이 나오는 내내 이와이즈미의 어깨와 팔뚝에 자리를 폈으며 이와이즈미를 팔짱을 낀 채 덤덤하게 영화를 바라보았다.


아까 전 이와이즈미가 잠시 조용했던 이유는 그저 새삼스럽게 과거를 회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언제부터 오이카와가 불을 꺼려했더라? 돌이킬수록 역사가 꽤 길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오이카와와 함께한 과거를 되짚어보면 함께한 시간 내내 불을 싫어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던 날들의 연속이었다. 이유가 뭐였지? 신기하게도 계기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와이즈미는 자신의 생각에도, 남들의 시선에서도 오이카와에 대해 가장 많은 것을 알고 또 기억하는 인물이었다. 그것이 때때로 이와이즈미에겐 묘한 자부심까지 들게 했으니 덜컥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눈살이 찌푸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오이카와가 언제 불에 덴 적이라도 있던가? 그러나 이와이즈미의 과거를 걸고 말하건대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이카와에겐 화상의 흉터도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알 수 없는 계기를 차근차근 생각해내다 결국엔 항복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오이카와의 말대로 단순히 그에게 있어 어쩐지 싫은 것이겠거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자꾸만 등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찝찝함을 억지로 밀어내며 제게 꼭 붙어있는 오이카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쓰다듬었다기보다는 툭툭 건드렸다고 하는 것이 옳겠으나 오이카와에겐 충분히 다정한 손놀림이었다.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를 향해 딱 그에게만 보일 만큼 고개를 들고 웃어보였다.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 조용한 웃음이었다. 익숙한 웃음이었다.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였다. 부모님들끼리 친했던 것을 시작으로 이름마저 꼭 세트처럼 지어진 채 항상 붙어있기 마련이었다. 둘 사이에 기억나는 에피소드를 꼽으라면 셀 수 없었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꼭 그래야만 했던 사람들처럼 이와이즈미의 인생엔 오이카와가 있었고 오이카와의 인생엔 이와이즈미가 있었다. 그냥 놓고 본다면 각자의 인생을 바꾸어 착각할 만큼이나 닮아 있는 모습이었다. 어떻게 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맞는 것이 없었으나 그렇기에 하나부터 열까지 들어맞는 사이였다. 때로 그들을 지켜본 이들은 너희는 지난 생에서도 이렇게 살았을 것 같다며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그때마다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는 간단한 반응 외에는 기타 특별한 리액션을 선보이진 않았지만 말이다. 이와 비슷한 소리야 어릴 때부터 지겹도록 들어왔으니 그럴 법도 했다.


전생이라. 현재의 삶 말고는 딱히 큰 관심이 없는 둘에게 있어서 전생이라는 단어는 다른 이들이 언급을 해야 아주 짧게 생각해보는 것에 불과했다. 그만큼 둘은 현생 외의 삶에 무감각했다. 물론 대부분의 이들이 그렇겠지마는 둘, 특히 이와이즈미는 더더욱 그랬다. 존재하는지도 명확하지 않은 과거 혹은 미래의 생이 그다지 흥미롭지도 호기심이 들지도 않았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지금의 삶이었다. 바로 제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지금의 삶 말이다. 이와이즈미는 영화가 끝난 뒤부터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 오이카와의 옆모습을 곁눈질했다. 감정이 미약하게 피어나기 시작한 날부터를 기준으로 삼아보자면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를 친구가 아닌 다른 감정으로 바라본지 어언 삶의 절반이었다. 이와이즈미의 착각이 아니라면 오이카와 역시 저와 같은 감정일 것이다


이와이즈미는 부지런히 바늘을 움직이는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서로의 감정만 알아챈 상태로 안정된 시기를 보낸 지 벌써 몇 년이다. 이와이즈미는 고교를 졸업하고 난 다음 대학에 입학하고 서로가 안정될 시기만을 기다렸다. 코트 위의 그를 사랑하여 온전한 집중을 배려한 시간도 이제 정말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와이즈미. 네 차례다.” 이와이즈미는 저를 부르는 이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이카와도 즐거운 듯 저를 보고 있었다. 평화로운 주말오후였다. 그날이 졸업 전 마지막 겨울 방학이었다.


 

오이카와는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콧노래를 불렀다. 새벽 2시에 부르기엔 꽤나 흥겨운 리듬이었다. 흥얼거리는 곡조가 한 구간을 반복했다. 오이카와는 파란 불빛이 섞여 흘러나오는 핸드폰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아까 전부터 고정되어 있는 핸드폰 액정 화면은 라인 창을 띄우고 있었다. 상대방에게서 새로운 메시지가 오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오이카와는 마냥 즐거웠다. 이와쨩, 그리고 그 옆에 하트까지 붙어있는 이름 밑으로 어쩌면 평생 타이밍만 찾았던 말이 도착해 있었다.


진짜 귀엽단 말이지.”


혹여나 이 말을 하나마키나 마츠카와가 들었더라면 질색을 했을 터이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진심이었다. 내일 시간 비워두라는 딱딱한 말투를 보면서 느낄 의견은 아니었으나 굳이 다른 날도 아니고 새해가 되기 전 1231일을 맞이해 고백 해오려는 뉘앙스를 알아챈 뒤로는 귀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제가 가족여행을 갔다 오는 동안 계속 고민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웃음이 흘렀다. “오이카와씨는 장미꽃 같은 건 별론데.” 다 알고 있다는 제 답장 이후로 더 이상의 답문은 없었다. 오이카와의 예상으로 또 제 짧은 머리칼을 벅벅 긁고 있을 이와이즈미가 눈에 선했다. 오이카와는 메시지의 핑퐁이 멈춘 핸드폰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마지막엔 그것을 품에 안고 잠들려 했다. 오지 않는 잠을 청하려 눈을 감았다 흥분되는 마음에 다시 뜨는 것을 반복했다. 아무리 눈꺼풀을 내리 누르고 잠에 들려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을 벌떡 일으키는 바보 같은 짓을 계속했다. 이와이즈미도 저와 같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면 도저히 몸을 가만히 둘 수가 없는 것이다.


기실 둘의 마음이 맞닿아 있음을 느낀 순간이야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없을 만큼 횟수가 많았다. 그러나 분명 맞닿고 있음을 막연히 느끼는 것과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비록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가 서로의 성숙을 바라며 일정한 순간까지 초신뢰관계만으로 만족했으나 내일부터는 그 옆에 새로운 관계의 정의가 추가되는 것이었다. 떨리지 않는다면 그것이 거짓이었다.


오이카와의 반 친구는 그에게 좋아하는 여자 아이에게 고백을 하려다 밤을 샜다는 말을 건넨 적이 있었다. 오이카와는 그날에서야 제 친구의 지난날을 이해했다. 그때엔 그래? 어차피 분위기보면 당연히 오케이 할 텐데 왜?” 같은 의구심을 가졌지만 그날에 가서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분위기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간의 새로운 관계 성립은 이미 지나온 길을 지나 또 하나의 출발지를 표시하는 일이었으니 두려우면서도 떨릴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의 관계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이카와는 주체할 수 없는 설렘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빨에 콕 박힌 입술은 살짝 아릿했으나 찢어지진 않았다. 오이카와는 눈가에 주름이 잡힐 만큼 세게 눈을 감았다. 얼른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고 여겼다. 늘 시간이 흐르는 것을 안타까워했으나 그날만큼은 예외였다. 그의 바람대로 밤은 지체 없이 깊어갔다.


오이카와는 잠이 오지 않는 시간을 지나 어느 순간 까무룩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본인도 도통 언제 잠에 들었는지 기억하지 못할 찰나였다. 그날 오이카와는 꿈속에서 그리운 향을 맡았다. 아니. 그것이 정말 그리운 꿈으로 끝났던가? 오이카와는 은은하게 청()색이 빛나는 이불 위에서 눈을 떴다. 오이카와는 보드라운 이불을 만지작거렸다. 둘러본 방안은 온통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대충 눈에 담기는 인테리어들은 박물관이나 사극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느낌들이 가득했다. 오이카와가 누구의 방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이상한 익숙함을 느꼈다. 마치 어제도 이곳에서 잠을 잤다는 듯 잘 길들여져 제 몸에 감겨오는 이불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꿈에 발을 들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것이 현실이 아님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적어도 제가 살고 있는 현실에선 공간 워프가 불가능하니 말이다무슨 소리냐 하며는 오이카와가 기묘하게 익숙한 이불을 한 번 더 잡아볼 때 그가 서 있는 장소가 뒤바뀌었다. 그 모든 게 눈을 감고 뜨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현실에선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이것은 필시 꿈이리라. 오이카와는 그것을 깨닫고 나자 마음이 편해졌다. , 꿈을 꾸는 구나. 간혹 느끼는 자각몽(自覺夢)이라 생각하여 고개를 끄덕거렸다. 평소보다 훨씬 생생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차피 눈을 뜨면 아침밥을 먹는 사이 잊힐 꿈이 분명했다.


뒤바뀐 풍경은 연못가였다.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든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모두가 사용하는 마을의 연못이라기보다는 특정 인물을 위해 만들어진 장소 같았다. 비교적 작은 크기의 정자와 바로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성벽 따위가 그 증거였다. 아마 오이카와에게도 꿈속이라 허용된 출입일 것이다. 그는 올챙이들이 헤엄치는 연못을 바라보며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남의 집 정원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물이 엄청 맑네.”


오이카와는 어쩐지 이 공간의 침묵이 걸려 아무 생각을 내뱉었다. 그의 말대로 물은 정말로 맑았다. 가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제 얼굴이 비춰질 정도였다. 관리가 잘 된 연못이었다. 그나저나 이런 연못의 주인은 어떤 사람이지? 오이카와는 아주 궁금하진 않은 질문들을 연못에 던지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생생함에 비해선 꽤 지루한 꿈이었다. 오이카와는 잠을 자고 있는 꿈속에서 벌어지는 일임에도 하품이 비집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여러모로 이상한 꿈이었다. 오이카와가 지루함에 괜히 연못으로 손을 뻗어볼 즈음 한 외침이 들려왔다.

 

이와쨩!

 

이와쨩? 오이카와는 제가 저도 모르게 이와이즈미의 이름을 발음 했던가 곰곰이 되짚었다. 그러나 필시 그것은 제 입에서 나온 이름이 아니었다. 자신 말고 이와이즈미를 이와쨩이라고 부르는 인물이 있었던가? 절대 없었다. 가끔씩 저를 따라 그렇게 부르는 이가 살면서 한 번도 없었던 적은 없었지만 전부 얼마가지 않아 멈춘 호칭이었다. 꼭 오이카와만의 호칭이었다. 마치 특허를 낸 것처럼 저 혼자 사용해오던 그런 호칭이었다. 이와쨩! 그때 그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렸다. 아까보다 조금 더 가까이서 들려오는 듯 했다. 오이카와가 목소리의 출처를 찾으며 고개를 돌렸다.


뭐야?”


이와이즈미를 부른 것은 자신이었다. 그러니까. 정작 진짜 자신은 가만히 있었으나 꿈속의 또 다른 자신이 이와이즈미를 부른 것이었다. 굉장히 반가운 표정으로 팔까지 일자로 곧게 뻗어 흔들고 있었다. 차림새도 요란했다. 짙은 녹색에 검정색 끈이 촘촘한 기다란 옷을 입고 있었다. 소매의 통이 넓어 제가 손을 흔들 때마다 맨살을 쉽게 노출시켰다. 귀에는 금색 귀걸이가 덜렁거렸다. 두 번째와 네 번째 손가락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배구를 하면서 악세사리는 쳐다도 보지 않는 오이카와와 영 다른 모앙새였다. 그러나 얼굴만큼은 저와 꼭 닮아있었다. 목소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저의 얼굴이었고 목소리였다. 그렇다면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는 문득 든 생각에 꿈속의 제가 달려가는 도착 지점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꿈을 꾸고 있는 자신과 꿈속의 자신이 가진 눈동자가 한 곳을 향해 집중되었다. 꼭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이와쨩?”


시선 끝에 서 있는 남자는 이와이즈미였다. 현실의 이와이즈미와 똑같은 생김새였다. 꿈속의 자신과 바탕색이 비슷하면서도 자수가 전혀 다른 옷을 입은 채 서 있는 남자는 분명 이와이즈미였다. 오이카와는 꿈속의 이와이즈미를 바라보았다. 역시 현실에선 절대로 하지 보지 못할 차림새였다. 오이카와는 바로 제 앞에 있지만 몇 킬로미터는 거뜬히 떨어져 있는 것 같은 꿈속의 둘을 바라보았다. 꿈속의 오이카와는 몇 번이고 이와이즈미의 이름을 부르다 종국엔 그를 끌어안았다. 꿈속의 이와이즈미도 그런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무언가를 살피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대뜸 오이카와의 볼을 붙잡고 키스를 날리는 것이 전부였다. 저 진한 애정행각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오이카와는 꿈속의 둘을 바라보며 인상을 썼다. 마치 꿈이 제게 이것은 네가 몰래 가져온 욕망임을 까발려 보여주는 듯해 불편함을 감출 수 없었다. 게다가 와중에 치졸한 질투심까지 들었으니 비참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저들을 볼 수 있는 자신과 다르게 자신은 저들에게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것을 깨닫자 질투심에 이어 알 수 없는 소외감까지 목뒤를 지그시 눌렀다. 정말 갈 데까지 갔구나. 오이카와는 고개를 빠르게 가로젓다 그들에게 다가갔다. 아니. 다가가려고 했다.


그들에게 다가서려는 순간 오이카와가 서 있는 곳이 또다시 바뀌었다. 새로운 장소는 아니었다. 연못가에 있기 전 앉아있었던 청()색 이불이 있는 방. 오이카와는 왜 자신이 또다시 이곳으로 날아왔는지 영문을 알지 못했다. 기실 꿈을 꾸는 내내 이 꿈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이카와는 제 손에 부드럽게 쥐이는 이불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문소리가 들렸다. 어느덧 오이카와가 앉은 침대 옆에 예의 아까와 같은 요란한 차림을 한 꿈속의 오이카와가 있었다. 문이 열리고 처음 보는 얼굴의 낯선 이가 등장했다. 새로운 등장인물이었다. 새로운 등장인물은 뱀과 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는 분명 처음 보는 인물임에도 묘하게 기분 나쁜 느낌을 받았다.

 

……전쟁…….

 

오이카와는 번쩍 크게 눈을 떴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한 번 남자를 살펴보았다. 처음 보는 이가 맞았다. 현실에서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어딘가……. 오이카와는 익숙함을 느꼈다. 동시에 이유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알 수 없는 본능이 계속해서 그를 거부했다. 미식거리는 속이 뜨거웠다. 오이카와는 덮고 있던 이불을 거둬내고 땅에 발을 디뎠다. 이번에야 말로 둘에게 다가갔다. 장면은 바뀌지 않았다.

 

차라리

그때 장면이 바뀌어야 했다!

 

그는 제가 서 있는 방 바깥으로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보고야 말았다. 오이카와는 내디디던 발을 그대로 옮겨 달렸다. 무언가 생각이 날 것만 같았다. 처음 보는 낯선 이와 낯선 풍경, 낯선 자신, 낯선 이와이즈미. 아니다. 이 모든 것은 낯설지 않다. 오이카와가 그것을 깨달을 즈음 꿈속의 그가 방문을 활짝 열었다. 화염의 증식이 한참인 바깥이 보였다.


이와쨩……!

이와쨩!”


꿈속의 오이카와와 꿈을 꾸고 있는 오이카와가 거의 동시에 그 이름을 외쳤다. 꿈을 꾸고 있는 오이카와가 꿈속의 오이카와를 따라 달음박질을 쳤다. 아까 전 연못에서 시선을 같이 움직인 것처럼 향하는 곳이 같았다. 매캐한 연기가 시야를 흐리게 했으나 발걸음은 어디를 가야하는지 알고 있다는 사람처럼 멋대로 움직였다. 평소 스스로도 의문을 가질 정도로 이유 없이 싫어하고 무서워하던 불길이 지금만큼은 무섭지 않았다. 단지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일까?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불길의 끝에 그가 있다. 불길 속에 그가 있다! 꿈을 꾸고 있는 오이카와가 계속해서 달렸다. 꿈속의 오이카와보다 늦게 달음박질을 시작했음에도 끝엔 그가 앞서고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와이즈미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다. 기억했다. 걸음을 뗄 때마다 불타오르는 나무와 함께 피어오르는 지난날들이 선명했다. 이 기억의 되찾음조차 익숙한 상황이었다. 오이카와는 달렸다. 이와이즈미를 향해 달렸다. 불이 퍼진 방문을 맨손으로 떨쳐내며 불렀다.


이와쨩!”


마침내 이와이즈미가 보였다. 연기 사이에서 기침을 내뱉는 그가 보였다. 피 묻은 검을 들고 있는 우직한 모습이 보였다. 오이카와가 그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달렸으면서 막상 이와이즈미를 발견하자 온 다리에 힘이 빠졌다. 그래도 오이카와는 걸음을 옮겼다. 완연히 들어차오는 기억들에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거의 1000년만의 재회였다. 1000년만의 1000년 전 이와이즈미였다. 1000. 1000. 일천년의 시간을 거슬러 지금에야 다시 처음의 이와이즈미를 보게 된 것이다! 다시보지 못할 것이라 여긴 그 사람을! 그 처음을! 제 사랑의 시초였던 이 남자를!


이와쨩.”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를 안고 싶었다. 그에게 안기고 싶었다. ……그러나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지나쳐갔다. 몸을 겹친 찰나가 있었으나 닿지 못하고 그대로 통과해버렸다. 오이카와가 그 허전함에 고개를 돌렸다. 이와이즈미는 그런 오이카와를 모른 채 여전히 달려갔다. 그리고 껴안았다. 오이카와를. 꿈을 꾸는 오이카와가 아닌 꿈속의 오이카와를. 오이카와는 그 모습을 허무하게 바라보았다. 꼭 제가 바랐던 것처럼 서로를 부둥켜안은 두 사람의 모습이 퍽 애달팠다. 오이카와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1000년 전에도 보지 못한 자신의 얼굴도 함께 바라보았다. 어느새 꿈을 꾸는 오이카와는 울 것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의 자신이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구나. 오이카와는 거의 1000년만에야 알 수 있었다.

 

너는 숨을 곳을 잘 찾고 나는 달리기를 잘 하니까. 그렇게 하자. 혹시 가는 길에 내가 다치면 네가 치료해주고 그러다보면 어떻게든 어디든 갈 수는 있겠지.

 

아니야. 그 말을 하지 말아줘. 오이카와가 중얼거렸다. 닿을 수 없는 살갗과 마찬가지로 닿을 수 없는 외침이었다. 오이카와는 이 장면의 마지막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알고 있음에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자신은 꿈을 꾸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꿈속의, 과거의, 저 과거를 현재로 살아가고 있는 저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미 제가 개입할 수 없는 일천년 전의 결말이었기 때문이다.

 

이와쨩…….

 

참 저때부터 많이도 그를 불러왔구나. 오이카와는 무언가가 저를 관통하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그 순간 눈을 감았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꿈임에도 그 감촉이 생생했다. 오이카와가 다시 눈을 떴다. 관통 당한 기분은 착각이 아니었던지 꿈을 꾸는 오이카와를 꿰뚫은 화살이 꿈속의 이와이즈미에게 꽂혔다. 그 순간에 그 등을 바라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과거의 저는 지금 제가 보는 것처럼 그를 끌어안기만 했다. 그때의 머릿속엔 할 줄 아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다. 한 평생 감흥 없이 손길 하나로 남을 치료해온 주제에 정작 이와이즈미가 다쳤을 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누구에게나 감탄과 경악을 자아냈던 능력이 그날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고 부질없는 것이 되어있었다. 가운데에 화살이 박힌 이와이즈미의 날개 뼈가 꿈틀거렸다. 흐르는 피가 멈춤을 몰랐다. 그래도 우직하고 단단한 등은 고통을 견디고 과거의 자신을 끌어안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그 모습을 보며 오한을 느꼈다.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시림을 참을 수 없었다.


1000년의 재회는 너무도 짧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조금 더 바라볼 걸. 조금 더 눈에 담을 걸. 1000년의 짤막한 재회 이후 곧바로 그의 죽음을 또다시 목도해야한다니 잔인했다. 괴로웠다. 그러면서도 눈을 뗄 수 없는 스스로가 가장 고통스러웠다. 오이카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꿈을 꾸고 있는 자신과 꿈속의 자신이 한 얼굴은 꼭 같은 감정을 담아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모두의 두려움을 받던 존재에서 가장 초라한 존재로 남아버린 스스로를 바라보았다. 스스로의 초라함을 견디지 못하고 모두를 죽여 버린 이기심을 바라보았다. 끝내 이와이즈미의 자국이 남은 곳에서 웅크리고 누운 추잡함을 바라보았다. 단도 끝에 서린 진득한 미련을 보았다.


깨고 싶어…….”


이제 그만 그 꿈에서 일어나고 싶었다. 만약 발버둥을 친다면 눈을 뜰 수 있을까?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럴 기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지르고 잡히지 않는 바닥을 할퀴는 것으로 눈을 뜰 수 있다고 해도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이제 제가 보고 있는 꿈속의 장면이 어디로 워프를 할지 알고 있었다. 그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니 이 토 나오는 과거를 더 이상 바라보고 싶지 않아도 바라봐야만 했다. 아직 여덟 명의 이와이즈미를 보지 못했다. 꿈은 곧 제게 여덟의 이와이즈미를 보여줄 것이다. 저의 소원에 갇혀 매 삶의 영원을 다른 사람은 담지도 못하게 된 불쌍한 이와이즈미들을 보게 될 것이다. 31, 26, 24, 27, 33, 한 번 더 27살과 33살 그리고 34살까지. 그 시작 혹은 중간 혹은 마지막을 보게 될 것이다. 오이카와가 과거의 자신에게로 다가갔다. 이미 리프를 선택한 채 눈을 감은 꿈속의 제 위로 몸을 겹쳤다. 역시 닿지는 못했다. 그저 같은 땅위로 겹쳐질 뿐이었다. 그럼에도 충분했다. 이와이즈미의 자국 위에 몸을 뉘인 것만으로 괜찮았다. 눈을 감았다. 과거의 자신과 함께 다음의 생으로 달려갔다.


오이카와의 예상대로 과거 여행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전쟁에 참전한 병사와 병사로 만났을 때, 평범한 백성과 백성이었을 때,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讎)의 가문 사이로 만났을 때, 목수와 귀족으로 만났을 때, 길거리 악사와 여행객로 만났을 때에도, 무명 소설가와 화가로 만났을 때에도, 소방관과 의사로 만났을 때에도, 그 모든 생의 눈감음을 전부 지켜보았다.

 

어떤 방법으로든 닿게 할 거야.

 

마지막 리프가 끝났을 때에야 더 이상 그의 눈에 담기는 풍경이 없었다. 전부 검게 칠해진 벽지만이 보였다. 더 이상 과거의 자신이 보이지 않았다. 과거의 이와이즈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몇 번째 깜빡거림인지 셀 새도 없이 곧장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야말로 눈을 뜰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이번엔 꿈이 아닌 지금 제가 살아가고 있는 마지막 리프의 삶에서 말이다. 마지막으로 주워 진 현재에서 말이다. 지금의 제가 가장 사랑하는 이와이즈미가 있는 그곳에서 말이다……. 오이카와가 눈을 떴다.


설레는 마음으로 눈을 감았던 것이 바로 몇 시간 전인데 눈을 뜰 때의 오이카와는 누구보다 고요했다. 오이카와는 일어나자마자 날짜를 확인했다. 1231. 오이카와는 직감했다. 왜 자신이 그 꿈을 꾼 것인지. 왜 갑작스럽게 평생 이와이즈미가 죽기 전엔 깨닫지 못했던 과거와 제 사명을 깨달은 것인지. 그는 끓어오르는 미련으로 억척스럽게 모든 것을 기억해낸 스스로를 진심으로 한 번 칭찬해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뒤로는 놀랍도록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행동했다. 이불을 개키고 아침밥을 먹고 샤워를 하고. 틈 사이사이 몇 번이고 이와이즈미가 보낸 메시지를 다시 읽어 내리기도 했다.


시간은 9시였다. 9. 9시라. 괜찮은 시간이었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만나고 오겠다며 현관을 나섰다. 그는 발걸음을 부지런히 했다. 신칸센은 날이 날인만큼 생각보다 붐볐다. 오이카와는 운 좋게 얻어낸 마지막 자리를 바라보았다. 12시가 되기 전 도착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기껏 이와이즈미가 죽기 전 기억을 찾아낸 보람이 없어졌다. 오이카와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처음이었다. 멀게만 느껴졌던 죽음이 이토록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처음이었다. 오이카와는 차창에 얼굴을 기댔다. 오늘이 꼭 남은 20년의 마지막 날이다.


오이카와가 도쿄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11시 반이었다. 그 장소가 도쿄인 것을 알아챌 수 있었던 건 본능이었다. 과연 이곳에 있겠구나, 싶었다. 몇 번이고 삶을 반복하면서 매번 똑같은 곳에 묻어두었으니 당연했다. 제가 오늘 12시에 죽을 것임을 알아챈 것과 마찬가지였다. 1000년 전의 시간과 지금의 날짜 계산이 같을 리가 없었다. 그냥 본능적으로 오늘 아침 눈을 뜨는 순간 과거의 자신들이 귓가에 속삭여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쿄의 이곳, 12시까지. 이런 식으로 말이다. 오이카와는 성큼성큼 걸음을 움직였다. 잠시라도 길을 헤매거나 시간을 지체했다간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 긴장 어린 땀이 등을 축축하게 적셔왔다.


오이카와가 이십 여분을 더 걸었을 때일까? 눈앞에 허름한 폐가가 보였다. 주택가가 밀접한 골목 사이에 굉장히 부조화적인 장소였다. 아마 오이카와가 아닌 다른 인물들은 저것이 존재하는지도 모를 것이다. 오이카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신 외엔 아무도 없었다. 오이카와가 그곳으로 발을 들였다. 마침내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도 자신도 살아있는 시간에 그것을 되찾았다. 꼭 매번 기억하지 못하고 후회했던 그것이다. 오이카와는 시간을 바라보았다. 1158. 초침은 빠르게 흘러갔다. 오이카와는 다급히 핸드폰을 꺼내어 라인창으로 향했다.


미안 조금 늦을 것 같아! 사랑해 완전 사랑해 이와쨩

 

장난기가 가득했으나 진심뿐이었다. 오이카와는 눈을 감았다.

12시가 되었다. 그의 1000년이 전부 끝났다.

 


처음을 합쳐 그들이 만난 것은 총 열 번. 그곳에서 오이카와 토오루가 이와이즈미 하지메를 만나기 위해 바친 수명의 시간은 도합 일천년. 무려 1000년의 시간이 사용되었을 때 오이카와는 제가 숨겨둔 세상의 절반을 발견한다. 한때 시대를 군림한 적()은 어디로 갔으며 또한 오이카와가 그토록 모든 삶에서 찾아 헤맨 그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오이카와 또한 첫 번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쉽사리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에 들이마신 세상의 절반이라면 알고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이번엔 일천년의 기록을 지켜온 이들에게 묻겠다.

과연 오이카와는 죽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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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HQ / 전생파트 / 유혈 주의



때는 적()의 통치 이후 역사에 두 번째로 오래 남는 전쟁 당시이다. ()과 적()이 대등한 힘을 가지고 서로의 영토와 힘을 탐낸 지 햇수로 5. 16세 이상의 성인 남성들 및 참전 의지를 보인 여성들은 전부 전장(戰場)으로 보내진지가 5년이었다.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적군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제 1군과 제 2군 진지(陣地) 중 제 1군에 발령받아 있었다.


어이. 오이카와. 벌써 자냐.”


오이카와가 번쩍 눈을 떴다. 겨우 잠에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어깨를 흔드는 손길이 제법 매서운 탓이었다. 오이카와는 꽤 촘촘히 내린 어둠 속에서 자신을 집어올린 손길의 범인을 살폈다. 범인은 역시나 이와이즈미였다. 오이카와는 군용 담요를 얼굴까지 끌어올리며 잠투정을 했다. 이제 잠들었는데! 오이카와의 볼멘소리에 이와이즈미가 살짝 민망하다는 어깻짓을 해보였다. 그러나 머쓱한 얼굴과 다르게 그를 깨우는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어이, 오이카와. 부르는 목소리가 일정하게 반복되었다. 이와이즈미 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차라리 오이카와가 했더라면 어울렸을 행동이었다. 오이카와는 그의 평소 같지 않은 행동에 계속해서 짜증을 내면서도 결국엔 고개를 들었다.


대체 뭔데 그래.” 평범한 날들과 전혀 반대되는 상황이었다. 이와이즈미는 스스로도 떼를 쓰는 것 같은 말투가 어색한지 헛기침을 해보였다. 그는 오이카와가 덮고 있던 요를 치우고 손짓을 했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잠이 붙은 얼굴을 한 그대로 그를 따라 일어났다. 더 캐묻거나 잠을 자겠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은 것은 그의 눈치였다. 이와이즈미가 잠든 자신을 이유 없이 깨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막연한 눈치 말이다. 오이카와는 눈곱이 낀 오른쪽 눈을 비비며 살짝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이와이즈미를 쫓았다. 이제 막 31살에 접어든 나이치고는 여전히 아이 같은 행동과 얼굴이었다. 이와이즈미가 꼬박 31년을 빈틈없이 바라봐왔지만 한결같은 얼굴이었다.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가 함께 보낸 시간이 벌써 31년이었다. 친밀한 가문에서 한 달 간격으로 태어나 지금까지 쭉 함께해온 죽마고우(竹馬故友)였다. 적어도 남들이 보았을 때는 그 말만큼 둘을 표현해주는 것이 없었다. 다만 서로가 생각하기에 죽마고우라는 호칭은 조금 애매했다. 성격이 전혀 달랐던 탓에 몇 번의 부딪힘이야 당연히 존재했지만 끝으로 가면 매번 흐지부지하게 얼버무려지기 일쑤였다. 완벽한 해답이 나온 것도 아니고 어느 순간 적당히 침묵하는 기분을 느낄 때가 있었다. 어딘가 딱 맞는 듯 삐거덕거리는 순간들이 있었다. 무언가 해결이 된 것도 완전히 갈라진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 애매한 삐끗거림을 안고 살아온 시간이 바로 그 지긋지긋한 31년이었다. 며칠 전부터 오이카와의 혼사 이야기가 자꾸만 수면 위로 떠오르던 참이었다. 둘은 아직도 혼사를 지내지 않았다. 기실 오이카와는 한 번 혼사를 맺기로 한 가문과 날짜까지 잡았으나 식이 고작 15일이 남았을 무렵 여자의 가문이 역적으로 오인당하여 전체가 몰락하고 말았다. 그 후로는 둘 다 이렇다 할 혼사 자리 없이 세월을 보내는 중이었다. 마침 오이카와의 파혼과 이어 곧바로 전쟁이 터진 덕에 누구도 혼사를 재촉하지는 않았으나 전쟁이 끝나갈 때가 되자 어김없이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가 긴 전쟁에 참전한 후 벌써 5년이 흘렀다. 5년의 전쟁이었다. 나라는 지쳐갔으며 식량과 인력을 고려해서라도 빠른 시일 내에 결판을 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아군도 적군도 모두가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기본적 눈치로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당장 내일만 해도 급습을 앞두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잠자코 이와이즈미를 따라가던 오이카와가 물었다. 오이카와의 성격치고는 인내심이 길었다. 이와이즈미도 그것을 알았기에 무작정 걸어가던 발길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밤이 밤이었던지라 서로의 얼굴이 평소처럼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얼굴이 낯설거나 하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당연했다. 31년을 보고 산 얼굴인데 고작 밤의 깊이 따위로 그리지 못할 것이 아니었다. 이와이즈미도 마찬가지였다. 이와이즈미는 그 캄캄하게 내린 밤사이에서도 오이카와의 눈 코 입을 전부 그리며 입을 열었다. 밤공기는 가을의 건조함에 잔뜩 메마른 상태였다.


전쟁이 시작되고 5년이야. 아마 내일 승패가 갈리겠지.”

……그런 내용은 오이카와씨도 다 아는데.”

말 주변이 없어서 그런 거니까 그냥 들어.”


이와이즈미는 스스로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다시 입을 여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이와이즈미도 알고 있었다. 어차피 정리를 한들 깔끔하게 뱉을 수 있을 리 없는 것을 본인도 매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예상과 다르게 한 번 입술을 깨문 뒤 곧장 입을 열었다. 하나도 정리되지 않은 목소리가 군데군데 텁텁함을 안고 떨어졌다.


승전(勝戰)하고 나면 함께 살자.”

……?”


정돈되지 못한 목소리의 내용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때까지 아직 눈가에 잠을 그렁그렁 달고 있던 오이카와가 화들짝 놀라 대꾸했다. 제가 지금 잠결에 잘못 들은 것인지 아니면 애당초 지금 이 순간 자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판단이 필요했다. 이와이즈미는 그 침묵을 기다렸다. 오이카와는 눈살을 찌푸리고 되물었다. 마지막 확인이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그래. 허투루 말하지 않았다.”


끝에 이어진 마침표가 꽤 단호했다. 이번의 오이카와는 당황하지 않았다. 밤하늘의 어둠으로 잘 보이지 익숙한 얼굴은 시야의 적응으로 점차 윤곽을 드러냈다. 오이카와는 가만 드러나는 이와이즈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기억도 나지 않는 갓난아기 때부터 함께였으니 물론이었다. 오랜 전쟁으로 인하여 얼굴 살이 빠지면서 날카로움이 더해진 얼굴이었다. 짙은 눈썹 아래로 오목조목하게 들어찬 눈 코 입. 아까 전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의 얼굴을 그리며 생각했던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오이카와의 시선이 내려갔다. 곡선으로 떨어져 근육이 잘 잡힌 어깨 위가 시선의 종착지였다. 그 근육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 오이카와는 그 순간 깨달았다.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가 함께 보낸 시간이 벌써 31년이었다. 친밀한 가문에서 한 달 간격으로 태어나 지금까지 쭉 함께해온 죽마고우(竹馬故友)였다. 적어도 남들이 보았을 때는 그 말만큼 둘을 표현해주는 것이 없었다.


다만 서로가 생각하기에 죽마고우라는 호칭은 조금 애매했다. 성격이 전혀 달랐던 탓에 몇 번의 부딪힘이야 당연히 존재했지만 끝으로 가면 매번 흐지부지하게 얼버무려지기 일쑤였다. 완벽한 해답이 나온 것도 아니고 어느 순간 적당히 침묵하는 기분을 느낄 때가 있었다. 어딘가 딱 맞는 듯 삐거덕거리는 순간들이 있었다. 무언가 해결이 된 것도 완전히 갈라진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 애매한 삐끗거림을 안고 살아온 시간이 바로 그 지긋지긋한 31년이었다. 애매한 삐끗거림……. 오이카와는 순간 그것이 완벽하게 들어 맞춰지는 기분이 들었다.


좋아.”


그러니 오이카와의 대꾸는 자연스러웠다. 삐끗거림의 이유를 알자 오히려 차분해졌다. 이와이즈미 또한 놀라지 않았다. 이제 완벽히 적응한 어둠 속에서 서로를 끌어안을 뿐이었다.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겨울을 코앞에 둔 바람이었으나 시리진 않았다.


두 사람의 포옹으로부터 4시간이 지났을 때 말발굽 소리가 시작되었다.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는 각자의 행렬 가장 앞 쪽에서 고삐를 틀어쥐고 있었다. 우렁찬 나팔 소리가 허공을 가르고 끝없이 올랐다. 이와이즈미는 손에 두어 번 휘감은 고삐를 다시 한 번 단단히 고정하며 시선을 돌렸다. 오이카와는 늠름한 자태로 안장 위에 앉아 있었다. 그때 오이카와도 이와이즈미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팔은 또다시 울렸다. 병사들은 사기를 돋우려는 듯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적진이 바로 앞이었다. 오이카와가 먼저 적진의 요새를 열었다. 그가 열어둔 길 뒤로 수많은 완전무장(完全武裝)의 병사들이 쏟아졌다. 나팔 소리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울렸다. 완벽한 선전포고(宣戰布告)였다.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가 이제 울리지 않는 나팔을 대신하여 제 허리춤에 있는 검을 높게 들어올렸다.


돌격하라!”


아마 뒤에 가서는 그 돌격하라는 말이 아군에서 나온 말인지 적군들이 뱉은 말인지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전쟁터란 원래 그런 곳이었으니 놀랄 것은 없었다. 귓가가 멀어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울려 퍼지는 비명과 고함이 공존했다. 그러나 그 비명과 고함의 주인은 중요하지 않다. 자신만 아니라면 됐다. 스스로가 죽지 않기 위해 상대를 죽이는 것이 전쟁터의 유일한 희망이었으며 그것이 바로 승리의 밑거름이었다.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는 착실히 희망과 승리를 쌓았다. 5년을 쌓아왔으니 오늘이야말로 끝장을 봐야할 터였다. 또한 그날은 더더욱 사기가 높았다. 급습의 성공과 더불어 오늘이 5년의 진정한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오이카와는 높게 든 검을 저 아래로 내려치며 이를 악물었다. 그날의 그는 아마 그 전쟁터 사이에서 손꼽히게 많이 검을 휘둘렀을 것이다. 그만큼 그가 쥐어짜낸 상대의 출혈 또한 상당했다. 오이카와는 아까부터 공중에 자욱한 비린내에 익숙해짐을 느꼈다. 무뎌졌다. 계속되는 광기의 광경조차 5년이 흐른 오늘에 와서는 제게 충격을 줄 수 없었다. 이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자 제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도 잊고 몸이 가벼워지는 착각까지 들었다.


오이카와?”


그즈음 이와이즈미가 돌연 오이카와를 찾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적정선이라는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이카와는 그것을 한참 뛰어넘은 채 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어느새 훌쩍 멀어진 넓은 등을 바라보며 고삐의 방향을 돌렸다. 반면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가 저를 부르는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느낌이 좋았다. 오늘은 기필코 이 전쟁의 마지막 단추를 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 나라의 적()도 지금 제 2군과 함께 성안으로 돌격했을 터이니 제가 조금만 더 이곳을 정리하면 후에 제압이 더욱 쉬워질 것이었다. 돌아갈 수 있다. 그리운 고향, 그리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돌아가면 31년간 찾아 헤매던 애매함의 해답 대신 딱 들어맞은 하루들을 보낼 수 있다. 다름 아닌 이와이즈미와 함께 말이다. 여러 문제들이 있겠지만 지금의 그에겐 그런 암울하고 복잡한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때의 오이카와는 단지 승리가 필요했고 돌아갈 내일이 중요했다. 전쟁의 끝이 한 걸음 앞인 와중에 그와 같은 생각이 들 리 만무했다. 오이카와는 끊임없이 적진을 갈랐다. 목을 베고 배를 찌르고 팔을 잘랐다. 그가 재빠르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올라탄 안장이 흔들렸다.


오이카와?”


이와이즈미가 그 이름을 다시 외쳤다. 그러나 이와이즈미의 목소리가 들리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이와이즈미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주위를 맴도는 비명과 고함 소리에 묻혀 쉽게 목숨을 잃었다. 이와이즈미는 제 앞을 가로막는 인물들을 차분하게 갈라나가며 급히 눈으로 오이카와의 등을 쫓았다. 어떻게든 놓치지 않으려는 그의 발악이었다. 그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벌어진 거리는 쉽사리 좁혀지지 않았다.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를 따라가는 만큼 오이카와 역시 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오이카와가 인파를 가르며 붉은 액체들을 계속해서 뒤집어썼다. 한 번은 오이카와의 팔이 잘릴 뻔하였으나 마침 날아온 화살에 적군이 말에서 떨어져 바닥을 뒹굴었다. 화살. 오이카와는 뒤에서 날아온 날카로운 촉을 보았다. 바닥에 쓰러져 피를 토하는 남자의 어깨를 보았다. 당최 정체를 알 수 없는 덩어리들을 쏟아낼 때마다 남자의 어깨가 가파르게 움직였다.


오이카와!”


오이카와가 이상한 기시감을 느낄 즈음 이와이즈미가 핏대를 세워 그의 이름을 외쳤다. 오이카와의 귓가에도 그 목소리가 희미하게나마 걸려왔다. 오이카와는 바라보던 남자의 시체에서 놀라 시선을 떼며 마구잡이로 팔을 휘둘렀다. 무언가가 베이는 소리와 함께 몇 차례 앞이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시야가 어지러웠다. 오이카와는 제 바로 앞까지 도달한 날카로운 칼날을 보며 침을 삼켰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왼쪽 눈 하나가 날아갈 수 있었다. 오이카와는 간발의 차이로 꽂아 넣은 제 검을 다시 회수했다. 갑옷을 뚫고 심장을 꿰뚫은 뾰족한 날에 군데군데 빠짐없이 피와 살점이 들러붙었다. 여린 살점에 머물렀던 찰나가 아쉽다는 듯 줄줄이 딸려 나오는 것들이 덜렁거렸다.


오이카와가 그것을 털어내며 눈가에 다닥다닥 여유 없게 붙은 피딱지들을 닦아낼 즈음 갑작스레 북과 나팔 소리가 들렸다. 아까 전 자신들이 출장을 할 때 불어댄 나팔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용맹하고 커다란 소리였다. 모두가 소리의 출처를 찾아 고개를 움직였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성 위로 깃발 하나가 올라왔다. 오이카와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 글자를 읽으려 애를 썼다. 설마, 설마! 승리의 글자가 올라왔다. 오이카와는 그 글자를 눈에 담는 순간 옆을 바라보았다. 제 나라의 적()이 보였다.


……이겼다…….”


오이카와가 중얼거렸다. 감격이 절로 섞인 목소리였다. 그 끝이 떨리는 것도 같았다. 오이카와는 들고 있던 팔을 내렸다. 오이카와 뿐만이 아니었다. 그 자리의 모두가 승리를 했기 때문이든 패배를 했기 때문이든 팔을 내렸다. 더 이상의 살생은 유효하지 않았다. 이미 모든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아까까지 죽음 바로 직전의 발악만이 울리던 들녘 위로 각자의 이유를 담은 울음소리가 퍼졌다. 누군가는 승리의 기쁨으로 울었다. 누군가는 패배의 통탄함으로 울었다. 포효 소리 또한 울렸다. 오이카와 또한 주책 맞게 올라오는 울음을 간신히 참아내며 뒤를 돌았다. 보고 싶은 얼굴을 마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돌아갈 수 있다. 이곳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목표로 삼았던 미래가 현실이 되었다. 돌아갈 수 있다. 오이카와가 그 사실을 되새김질하며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입을 열었다.


이와쨩.”


그때 분명 이와이즈미도 만면에 안도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고삐를 돌려 그에게 가려고 했다. 이제 거리가 아주 멀지 않았다. 이와지미가 열심히 앞으로 헤쳐 나온 덕이었다. 오이카와가 꽤 기다란 심호흡을 반복했다. 돌아갈 수 있다. 그 문장이 다시 한 번 오이카와의 머리를 지나쳤다. 몇 번을 생각해도 달콤한 문장이었다. 이와이즈미가 잔뜩 풀어진 오이카와의 표정을 보며 그를 부르려 했다. 가장 감격스러운 매순간마다 불러야만 할 것 같은 이름이었다.


오이카……,”


목젖을 타고 올라오던 이름이 멈추었다. 잔뜩 풀어진 채 이와이즈미를 바라보던 오이카와의 눈꺼풀이 팽창했다. 반대로 동공은 수축했다. 그의 입에서 피가 튀어나왔다. 울컥 터져 흐르는 피의 색이 선명했다. 턱을 타고 흐르는 피가 폭포수처럼 끊임없었다. 승리의 나팔 소리는 또다시 들녘을 울렸다. 그랬기에 사람 한 명이 쓰러지는 소리 따위는 들리지도 않았다.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으며 아무도 그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와쨩? 오직 오이카와만이 그 존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와이즈미의 가슴께를 관통한 그 칼날! 그의 가슴이 칼날을 낳았다. 탄탄한 가슴께 위로 칼날이 비집고 들어찼다.


이와쨩?”


오이카와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를 한 번 더 불렀다. 돌아갈 수 있다. 돌아갈 수 있다. 분명 이제 전쟁은 끝났다. 아까 전 승리의 포효로 모든 것이 끝났다. 그런데 왜? 오이카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이와이즈미가 왜 이 순간 말에서 떨어진 것인가. 도대체 왜 이와이즈미가 하필 이 시점에서 심장을 관통당한 것인가. 모두가 아주 슬퍼하거나 아주 기뻐하는 지금 이 시간에서 왜?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는 전쟁에서 승리했다! 돌아갈 수 있다! 돌아가야만 했다! 승전(勝戰)이 울리고 함께 손을 맞잡고 돌아가야만 했다! 함께 지내던 그곳, 고향으로! 이제 우리의 집을 만들어 함께 살아야만 했다! 돌아가야 했다! 오이카와는 울렁거리는 속을 참기가 괴로웠다. 조금만 고개를 숙인다면 토사물이 역류할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천천히 안장에서 내려왔다. 고작 안장에서 내려왔을 뿐인데 저 깊은 곳으로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그에게로 다가갔다. 환호와 울분 사이에 조용하고 얌전히 누워있는 그의 모습이 초라해보였다. 그에게 걸어가는 내내 그와 같이 누워있는 자들이 많았다. 오이카와는 그들 사이를 겨우 걸어가며 그에게 다가갔다. 오이카와를 쫓아가던 이와이즈미처럼 열심히 또 묵묵히 그를 향해 걸었다. 그때 누군가가 오이카와의 발목을 붙잡았다.


살려줘.


오이카와의 발목을 붙잡은 남자는 제대로 목소리조차 내뱉지 못했지만 필시 그 말을 뱉고 있었다. 그러나 오이카와에게 적군인지 아군인지도 모를 남자의 간청은 중요치 않았다. 아니. 만약 저를 잡은 것이 아군이었다 해도 그는 도움의 손길을 뻗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그의 두 손은 남자에게 뻗기 위한 손이 아니었다. 오이카와가 남자의 붙잡음을 무시하고 다시 발을 떼려했다. 아마 남자 또한 그즈음 오이카와가 저를 구해줄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남자가 경련이 일어난 손을 움직여 바닥을 나뒹구는 제 검을 쥐었다. 마지막 오기였다. 상대를 잃은 남자의 치졸한 복수였다.


이와쨩…….”


남자가 붙잡았던 발목 위로 칼날이 스쳤다. 오이카와는 그대로 넘어졌다. 시체더미 위로 코를 박았다. 악취가 그대로 코를 타고 올라왔다. 결국 오이카와는 더 참지 못하고 구역질을 시작했다. 꼭 제 뱃속의 창자를 전부 끄집어 내뱉을 기세로 몸을 들썩거렸다. 악취가 한층 심해졌다. 그때 오이카와는 제 발목을 쳐다보았다. 잘리기 일보직전으로 덜렁거리는 허연 살점 사이에 빼곡히 들어찬 핏줄과 은근하게 보이는 뼈가 그를 반겼다. 오이카와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구역질을 했다. 이제 한 발자국만 더 걸어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이와이즈미의 시체를 보며 구역질을 멈출 수 없었다. 그때 누군가의 말발굽이 이와이즈미의 팔을 짓눌렀다. 오이카와의 눈이 새빨갛게 부어올랐다. 눈으로 피가 흐르는 착각이 들었다. 착각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것을 분간할 수도 없었다. 오이카와가 바닥으로 고개를 더더욱 처박으며 어지러움을 느꼈다.


함성소리는 갈수록 커져갔다. 이와쨩. 오이카와가 제 목을 틀어막은 구역질에 그 이름을 부르지도 못하고 속으로만 겨우 발음할 즈음 제 기억이 아닌 다른 사람의 기억 같은 장면이 떠올랐다.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던 기억이 왜 제 과거처럼 생생히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 제가 끌어안은 등짝 위로 꽂혔던 화살! 타들어가던 그! 허망하게 바라보던 자신! 아득하게 밀려오는 기억이 있었다. 오이카와가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의 시야는 평소보다 반이 줄어있었다. 제가 얼마나 잠에 들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부어오른 눈두덩이가 무거웠다. 오이카와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간신히 상체를 지탱하고 제일 처음 마주한 것은 엉망이 된 제 다리였다. 거의 다 떨어져나갔음에도 용케 붕대와 함께 붙어있는 발목을 바라보던 오이카와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이와이즈미의 이름을 외쳤다. 밖에선 희미하게 북소리가 울렸다. 북소리? 오이카와는 또다시 머리가 아팠다. 이명(耳鳴)이 들리는 듯 했다. 그러나 아무리 이명이 어지러이 울려와도 북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언뜻 북소리와 함께 곡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오이카와는 그 소리에 몸을 일으키려다 한바탕 몸을 굴러야 했다. 완전히 낫지 않은 다리 때문에 절뚝거림이 심했다. 멀쩡한 곳이 없는 듯 온몸이 뻐근했다. 그래도 오이카와는 걸었다. 이 불안한 예감을 확인해야만 했다. 북소리가 가까워졌다. 더욱 선명해졌다. 오이카와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문을 열었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발걸음을 절뚝거리며 옮겼다. 몇 번이고 어색한 발목에 쓰러지기를 반복하다 종국엔 기어서라도 그곳을 향해 갔다. 무릎이 까졌다. 그 위로 자잘한 자갈이 박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미약한 고통이 오히려 오이카와가 살아있음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평소보다 낮은 시선으로 많은 인파사이를 헤쳤다. 모두가 이상한 사람을 쳐다보듯 오이카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수십 개의 눈동자가 오이카와에게 꽂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이카와는 잠에서 덜 깼던 그날처럼 비틀거리는 모양새로 무릎을 폈다. 무릎과 발목이 아렸다. 허리를 기준으로 밑의 감각이 아예 사라지는 착각이 들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돌렸다. 제 옆에 있는 여자가 울고 있었다. 섧게도 울고 있었다.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며 울고 있었다. 보낼 수 없다며 울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새파란 하늘 위로 지상에서부터 먹구름이 올라갔다. 불꽃과 함께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오이카와의 키보다 살짝 높게 쌓아올린 장작 위로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시체들이 놓여 있었다. 그 사이사이엔 여자인지 남자인지 분간도 되지 않을 만큼 형체가 불분명한 인물도 분명 존재했다. 오이카와는 가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다가오시면 안 됩니다.”


오이카와는 그제야 저를 가로막은 팔을 내려다보았다. 언제 이까지 걸어 나왔지? 저를 막아선 남자가 곧 혀를 찼다. 오이카와가 시선을 내렸다. 발목에서 또다시 피가 터져 흐르고 있었다. 반 즈음 꺾인 발목이 꼭 제 것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냥 모든 것이 제 것이 아닌 기분이 들었다. 제가 들이쉬고 있는 공기조차도 원래는 제가 마시면 안 되는 것만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불길이 치솟았다. 오이카와가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의 끝에서 이와이즈미를 발견했다. 수없이 많은 인물들이 뒤섞여 있어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들었으나 그는 이와이즈미를 발견했다. 그것은 분명 이와이즈미였다. 오이카와는 발갛게 달아오르는 시야 안의 이와이즈미를 똑똑히 바라보았다. 타들어가는 연기와 향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그 사이에서 이와이즈미의 체취를 맡았다. 이와이즈미였다. 그건 분명한 이와이즈미였다. 제 모든 삶을 다 걸고 말할 수 있었다.


누군가 북을 울렸다. 그들을 기리는 북소리가 점점 빠르게 반복되었다. 소가죽을 몇 겹으로 쌓아올려 만든 북을 내리칠 때마다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오이카와가 눈도 제대로 깜빡이지 못하고 그 소리들을 고스란히 듣고 있었다. 고막을 타고 들어온 둔탁한 소리들이 무언가를 자극했다. 생경한 기분이었다. 자신조차 모르는 제 과거를 건드리는 것 같았다. 자꾸만 꽁꽁 숨겨져 있는 어딘가를 두드렸다. 무언가 생각날 것만 같았다. 북소리가 이명의 손을 잡고 그를 찾아왔다. 오이카와의 머릿속이 울렸다. 뇌 속에 벌레를 집어넣은 사람처럼 꿈틀거림을 느꼈다.


절반.”


오이카와가 그것을 중얼거리며 갑작스레 몸을 틀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이었다.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제가 묻어둔 그곳이 바로 제 1군의 진지(眞知), 저와 이와이즈미가 함께 쓰던 천막의 밑이었다. 오이카와는 점점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다급한 마음과 다르게 성하지 못한 몸은 몇 번이고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으나 그래도 그는 흙을 닦지도 못하고 달렸다. 피가 나도 달렸다.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발목이 꺾이고 당장이라도 잘려 나갈 것만 같아도 달렸다. 지금의 오이카와는 발목이 하나 사라진다고 해서 알아챌 수 있을 정신머리가 아니었다. 오이카와는 달렸다. 발목이 덜렁거릴 때마다 그 사이로 기억의 조각들이 피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꼭 그 정도의 고통이 동반되면서 자꾸만 후회의 크기가 커졌다. 오이카와가 달리고 또 달려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이제 다 정리해가는 진지의 천막 앞에 섰을 때. 그는 고개를 숙였다.


소리 나게 주저앉아 손을 뻗었다. 꽤 오랜 시간 비가 오지 않아 단단하게 메마른 흙 사이로 기어이 손을 집어넣었다. 손톱 사이사이로 기분 나쁜 돌멩이들이 박혀왔지만 상관없었다. 그걸 느낄 여유도 없었다. 오이카와가 메마른 흙을 적셔가며 땅을 팠다. 어느 샌가 흐르고 있는 눈물을 뿌리기도 했고 침을 뱉기도 해가며 어떻게든 제 손으로 아래를 후벼 팠다. 한참을 그곳만 파댔다. 모두가 떠나고 이제는 찾을 필요가 없는 과거의 숙소에서 그 혼자만이 남아 더 깊숙한 과거를 찾았다. 종국엔 눈물과 침을 뱉지 않아도 손끝에서 자라난 핏방울이 흙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가 손바닥 가득 흙을 퍼낼 때마다 슬픔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내던진 흙이 그대로 제 머리 위에 쌓이는 착각이 들었다.


찾았다.”


오이카와가 탄식처럼 외쳤다. 제 양팔이 전부 깊숙이 들어갈 정도로 땅을 파고 나자 작은 병 하나가 튀어나왔다. 오이카와는 제 네 번째 손가락만한 크기의 병을 쥐었다. 모든 것이 허무해질 정도로 작은 병이 피와 흙투성이가 된 손바닥 가운데에 얌전히 자리 잡았다. 오이카와가 그것을 끌어안았다. 제가 이번 생을 몇 번이고 다짐하며 묻었던 것인데 어째서 또다시 이와이즈미가 죽은 후에야 이것을 떠올린 것일까. 오이카와는 흘러나오는 울음을 굳이 참지 않았다. 한참을 울었다. 파냈던 흙무더기 위로 머리를 들이박으며 오랜 시간을 후회했다. 한 번의 해가 저물고 다시 뜰 때까지 그 짓이 반복되었다. 눈앞이 어질어질하고 제 손바닥이 네 개로 보일 때까지 울었다. 한 번의 생을 건너뛴 것치고 형편없는 결과였다. 결국 또 이와이즈미가 죽었다.


이와이즈미를 살릴 수 있었는데도 또 그의 죽음을 바라만 보았다. 자꾸만 이와이즈미가 죽고 난 후에야 후회했다. 다시는 후회하지 않고 싶어서 아직 완벽한 이해조차 하지 못했던 새 삶을 선택했던 주제에 결국 또다시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했다. 멍청했다. 너무도 멍청했다. 오이카와는 애써 파낸 구덩이가 무색하게 그 안으로 다시 작은 병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위를 파냈던 만큼 흙을 덮어 채웠다. 다시금 눈물과 침과 피를 섞어 단단히 채웠다. 몇 번이고 덮인 흙 위를 매만지며 다짐했다. 다음엔 절대로. 다음엔 절대로 이와이즈미를 살려낼 것이다. 기필코 이와이즈미와 함께 평화롭고 오랜 세월을 살 것이다. 다음 생에서도 그의 평생, 그 영원에 남을 것이다. 오이카와가 봉긋 솟아오른 흙더미 위로 마지막으로 짧게 입을 맞춘 뒤 일어났다. 다 허물어져가는 천막 아래로 들어갔다. 그는 제가 덮고 지내었던 담요의 밑을 들춰 단도를 꺼내들었다. 두 번째 삶과 만남과 두 번째 후회였던 만큼 두 번째 죽음이었다. 두려움은 처음보다도 없었다. 오이카와는 조금의 지체 없이 심장을 찔렀다.


 

그때 그의 수명 중 80년의 몫이 또다시 빠져나갔다. 그의 두 번째 리프였다.

 

 

 

 

처음을 합쳐 그들이 만난 건 그 후로 총 아홉. 그곳에 바친 오이카와의 시간이 어느덧 900년이 되었다. 왕과 적()의 신분으로 만난 태초의 25년부터 처음 리프를 사용하고 죽은 31살의 시간을 지나 이후로도 오이카와는 일곱 번이나 이와이즈미를 쫓았다. 그러나 그 모든 만남의 끝은 이와이즈미의 죽음이었다. 무슨 타이밍의 장난인지 오이카와는 항상 억울하고 이른 죽음 후 타오르는, 혹은 죽음으로 타올라가는 이와이즈미를 보며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두 번째 리프 이후 26, 24, 27, 33, 한 번 더 27살과 33, 그리고 34살까지. 모두 젊고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더불어 그건 오이카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와이즈미가 죽고 난 뒤 기억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리프를 선택했다. 그 시간이 채 사흘을 넘긴 적이 없었다. 언제나 이와이즈미가 먼저 죽고 태어났으며 그 뒤를 오이카와가 따라 죽고 태어남을 반복했다.


어쩌면 그 긴 시간 동안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는 한결같지 않았을 것이다. 기실 몇 번의 삶을 반복하며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의 이름이 매번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 였던 것은 아니다. 생김새가 늘 똑같았던 것도 아닐 터이다. 항상 같은 장소에서 태어났을 것도 아니었다. 동양과 서양을 오가며 여러 이름과 여러 생김새로 몇 번을 태어났을 것이다. 다만 그래도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는 만났다. 어떤 이름과 어떤 생김새와 어떤 환경을 가지고 있든 서로를 만났다. 왕과 적()으로 만났을 때에도, 전쟁에 참전한 병사와 병사로 만났을 때에도, 평범한 백성과 백성이었을 때에도,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讎)의 가문 사이로 만났을 때에도, 목수와 귀족으로 만났을 때에도, 길거리 악사와 여행객로 만났을 때에도, 무명 소설가와 화가로 만났을 때에도, 소방관과 의사로 만났을 때에도, 그리고 지금 또다시 오이카와가 제 심장에 스스로 칼을 꽂는 이번 생까지도.


그들은 길지 않은 시간을 두고 나란히 태어나 생의 대부분을 함께했다. 아마 갖가지 언어로 서로의 이름을 매번 불렀을 것이다. 다 다른 언어로 뻔한 고백의 서사를 읊고 늘 다른 얼굴과 이름을 마주하며 지내왔으리라. 오이카와의 능력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이즈미의 옆에서 태어나는 것이 전부였으나 그들은 매번 고백의 서사를 읊게 되었다. 비록 어떤 삶을 살든 결말은 항상 같았지마는.


이번 생에서 심장을 찌르기 전, 오이카와는 제게 남은 시간을 계산해보았다. 25, 31, 26, 24, 33, 27, 또다시 33년과 27, 34. 그곳의 사이사이에 80년을 더하자 정확히 900년의 값이 구해졌다. 자그마치 900년이었다. 수두룩한 실수와 후회 그리고 그것의 반복이 진행된 시간을 계산해보면 900년이었다. 오이카와는 충혈 된 눈을 비볐다. 그러나 900년을 바쳐 같은 어리석음과 결말이 반복되어도 이와이즈미의 죽음만큼은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누구보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제 심장을 찌르는 것은 쉬웠으나 이와이즈미의 죽음을 받아드리는 것은 언제나 고통스러웠다. 오이카와에게 남은 시간은 이제 100년뿐이었다. 애초에 가지고 태어난 수명의 10분의 1만이 남았다. 말이 100년이었지 여기서 리프를 사용한다면 또 80년이 빠져나가 20년이 고작일 터였다. 20. 20년이라. 그렇다면 다시 만났을 때 함께해온 삶들 중 가장 짧은 만남일 것이었다. 혹 처음으로 오이카와가 먼저 죽음을 겪게 되는 삶일지 모른다.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제게 한 번도 다음 생에서 만나자는 말을 한 적이 없는 이와이즈미를 굳이 몇 번의 생에 걸쳐 따라다녔다. 어쩌면 이와이즈미는 처음의 삶부터 그 후로 모든 삶을 저 때문에 죽었던 것일 수도 있다. 멋대로 바꿔버리고 꼬아버린 운명을 보답하듯 신이 이와이즈미의 목숨을 앗아간 것일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자신이 그의 곁으로 태어나길 바라지 않는다면 이와이즈미는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개소리.”


오이카와가 중얼거렸다. 부질없는 고민이고 걱정이었다. 오이카와가 제 심장을 칼로 찔렀다. 터져 흐르는 핏줄기 사이에서 오이카와가 곱게 눈을 감았다. “또 만나 이와쨩.” 입을 벌려 뱉어낸 목소리 사이로 그리움이 묻어있었다. 80년의 몫이 빠져나갔다. 남은 건 20년이었다.


그리고 610, 일본 미야기에서 이와이즈미 하지메가 태어났다. 720, 오이카와 토오루가 따라 태어났다. 이름부터 생일까지 모든 것이 비로소 딱 들어맞는 삶이었다. 이와이즈미 하지메와 오이카와 토오루의 열 번째 만남이었다. 이제 막 울음소리를 내며 세상에 눈을 뜬 그들이야 알지 못하겠지만 태어남과 동시에 20년의 시한부 선고가 떨어졌다. 오이카와가 힘차게 울었다. 20년의 카운트가 시작되었다.


어떤 방법으로든 닿게 할 거야.”


유언은 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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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오이] KARMA (카르마) 2  (0) 2017.01.20

FHQ / 전생파트 / 유혈, 폭력 요소



오이카와는 제 방을 정리했다. 이 방에서 생활한지도 벌써 7년이 가까이 흘렀다. 오이카와는 제 침구 밑바닥을 살폈다. 그 안에 위치한 자그마한 통은 마찬가지로 7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와이즈미에게도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잠들어 있는 곳이었다. 통은 어머니가 남기신 마지막 선물로 짐승의 뼈를 깎고 엮어 만든 것이라 들었다. ()의 물건을 함부로 건드릴 경우 악재가 따른다는 소문은 오이카와가 편리해하는 몇 안 되는 거짓 소문 중 하나였다. 덕분에 7년째 오이카와의 손길 외에는 누구의 손길도 묻지 않은 물건이었다. 기실 안에 들어있는 것들은 별 대단한 조각들이 아니었다. 그가 이와이즈미에게 선물 받았던 몇 가지 자그마한 물건들과 아끼는 장신구 그리고 아무 낙서나 적어댄 종이 몇 장이 전부였다. 그러나 존재만으로 감격스러워지는 것이 누구에게나 존재하지 않은가. 오이카와에겐 이것이 그와 같은 위치의 물건이었다. 오이카와는 슬쩍 꺼내본 통을 다시 안으로 집어넣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3년 전 전쟁이 한 차례 지나간 후로 오이카와가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일은 많이 줄었다. 그것이 못내 심심하기도 했으나 여유로움을 즐기는 것이 싫지는 않았다. 그때 문소리가 들렸다. 기척 하나 없는 방문이었다.


뭐야?”


지난번 시녀와 다르게 정말 발소리 하나 없는 시녀이겠거니 싶었지만 그의 눈앞에 나타난 존재는 의외의 인물이었다. 오이카와는 나타난 인물을 향해 흔치않게 노골적인 인상을 써보였다. 누가 보아도 명백한 거부의 표정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그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능글맞게 웃어보였다. 2년만의 만남인가? 낯선 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언뜻 반가움까지 서려있는 목소리였다. 오이카와는 끝내 석연치 않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낯선 이의 말대로 2년만의 만남이다. 낯선 이가 오이카와의 정면을 마주했다. 붉은 눈동자 두 개가 얽혔다. ()이었다.


갑작스럽게 오이카와를 찾아온 이는 멀리 떨어지지 않은 구역의 적()이었다. ()과 적()이 만나는 순간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두 가지 정도가 전부였다. 첫 번째로 서열의 정리를 위해 대립 구도로 마주치거나 두 번째로 새로운 적()이 임명될 때마다 그것을 알리기 위해 마주치는 것이 끝이었다. 그마저도 둘만의 만남은 극심한 찰나에 불과했다. 처음 마주했을 때 혹은 모종의 사건으로 별도의 친목을 쌓지 않는 한 적()과 적()이 다시 만나는 일은 드물었다. 그것이 동족을 꺼리는 오이카와라면 더욱 그랬다.


오이카와와 남자는 2년 전 남자가 적()의 자리를 계승받으며 한 번 만났던 적이 있다. 남자는 제 누이에게 리프의 순간을 선물하고 그 자리를 꿰찼다. 말이 좋아 리프를 선물한 것이지 빼앗은 것과 다름없었다. 마지막 자비라며 제 누이가 직접 리프를 할 수 있도록 지켜본 것이 협박과 빼앗음이 아니면 무엇일까. 그 당시의 첫 만남만으로 오이카와는 남자의 인상을 좋지 않게 평가했다. 제게 웃으면서 술잔을 건네는 모습이 영 능구렁이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오이카와는 이유 없는 남자의 등장에 의문을 감추지 못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방문이었다. 그 어떤 공지도 예고도 듣지 못했다.


왜 찾아온 거야.”


오이카와의 경계 어린 목소리에 남자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오이카와의 경계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얼굴이었다. 남자는 준비해온 대답처럼 매끄럽게 말했다.


곧 전쟁이 있을 것 같아서 도움을 청하고자 왔지.”

전하께는 미리 언질을 한 건가?”

이쪽에서 먼저 말을 꺼내주셔서 말이야. 고맙게.”

전하께서 먼저 말씀하셨다고?”

갑자기 왜 어울리지 않는 극존칭이야?”

원래 적()도 전하껜 존칭을 쓰는 법이잖아. 뭐가 문제야?”


오이카와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목소리에 콕콕 박힌 의심의 가시들은 쉽게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입을 열면 열수록 더욱 깊게 침투할 뿐이었다. 남자는 경계를 늦추지 않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남자는 마치 이제 막 글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에게 한 글자 한 글자를 설명해주는 것처럼 입모양을 지나치게 똑똑히 했다.


그거야 공식적인 자리에서만 아니었던가?”

상관하지 마.”

이해가 안 되는데.”


남자는 부자연스러운 손동작을 이어갔다. 그는 제 턱을 괸 채 인위적인 콧소리를 내보였다. 관절이 어긋난 나무 인형처럼 삐걱거리는 모양새가 거슬렸다. 오이카와는 제 귀에 달린 귀걸이 끝을 만지작거리며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이와이즈미에게 언질을 주고 온 것이라고 하기엔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이와이즈미가 정말 다른 나라 적()의 방문을 이리도 쉽게 허용했다고? 게다가 자신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이 자가 자신의 방에 찾아오는 동안? ……그럴 리가 없었다. 오이카와가 손가락으로 귀걸이를 타고 올라 제 귓불을 만지작거릴 즈음 갑작스럽게 비명소리가 들렸다. 날카롭게 찢어지는 목소리가 굵직했다. 오이카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자가 말했다.


너 정도 힘이라면 더 큰 세상을 가질 수 있을 텐데 왜 조용히 지내는 거지?”

그런 거 관심도 없어. 쓸데없는 질문 하지 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왜 온 거야.”

전쟁을 도와달라니까.”

난 전하의 허가가 없으면 안 움직여.”

그 전하가 죽고 나면?”

……?”


오이카와는 남자의 마지막 물음에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자칫 사고회로까지 멈출 뻔했으나 아득해지기도 전 남자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비명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오이카와는 그제야 기억을 더듬거렸다. 남자의 능력이 뭐였지? 제 기억으로 남자의 능력은 분명…….


전쟁이라고 했잖아?”


불이다. 오이카와가 그것을 깨닫는 순간 아까보다 더더욱 가까이서 한 차례 비명이 들렸다. 짐승이 화살에 꽂혔을 때 내는 것과 비슷한 죽음 앞의 단말마! 오이카와가 깨닫는 동시에 무릎을 움직여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갔다. 한지를 덧바른 문지방 너머가 평소보다 훨씬 붉었다. 왜 눈치를 채지 못한 것인지 스스로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애당초 남자가 이곳을 들어오는 걸 왜 몰랐지? 오이카와가 이와 같은 생각을 할 즈음 문지방이 불타올랐다. 그 흔한 효과음 하나 없이 불타 재가 되었다.


그러나 그 침묵도 찰나였다. 곧 여러 명의 비명 소리가 한데 뒤엉켜 곳곳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기괴한 소리가 당최 어느 쪽에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여기저기서 튀어 올랐다. 꼭 누군가 북을 치고 있는 것 같았다. 북이 찢어질 정도로 내려치고 있는 착각이 들었다. 둥둥거리는 뭉툭하면서도 공격적인 소리가 오이카와의 귓전을 맴돌았다. 그것이 제 심장 소리임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실 그 소리가 무엇이든 큰 상관은 없었다. 오이카와의 붉은 눈동자에 붉은 정면들이 틀어박혔다. 이상한 일이었다. 고개를 조금만 측면으로 틀어도 방금처럼 평화로운 색들이 한참이건만 제 정면만큼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꽉 깨물어 삼킨 후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목적지는 정해져있었다. 당장 제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난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야.”

기회는 얼어 죽을.”


오이카와는 제 발길을 잡아끄는 남자를 향해 침을 뱉었다. 시간만 있었다면 다가가 얼굴에 뱉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남자는 웃었고 오이카와는 걸음을 떼었다. 한 번 떼진 발걸음에 점점 속도가 붙었다. 고개만 돌리면 평화로운 장면이 나오던 제 방과 달리 방문을 나서자마자 허물어져가는 궁이 보였다. 기풍이 넘치던 고목은 초라한 소리와 함께 타들어가고 있었다. 곳곳에 어딘가가 관통 당한 신하들이 드러누워 있었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발바닥에 끈적거리는 피가 들러붙었다. 그 미끄러움에 몇 번 넘어질 고비를 넘긴 오이카와가 아무리 시야를 뻗어도 똑같은 상황 속에서 중얼거렸다.


이와쨩……!”


불안한 감정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목소리엔 믿음이 있었다. 그를 찾았더니 죽어있더라. 같은 이야기가 현실성이 없기 때문일까? 오이카와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일어날 수 없는 문장이었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가 있을 법한 곳으로 계속해서 달음박질을 쳤다. 발목이 꺾이고 무릎이 휘고 발바닥이 축축해져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이와쨩, 이와쨩. 오이카와는 갓 태어나 부모를 찾는 병아리 새끼처럼 그 이름을 울어댔다. 그 사이 몇 명이 더 바닥을 향해 엎어졌다. 오이카와는 그동안 두 차례의 전쟁을 겪어왔으며 여러 책이나 이야기 혹은 제 눈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봐왔으나 이렇게 얌전히 바스러지는 죽음을 목도한 것은 처음이었다.


전쟁터에선 당장 바닥에 떨어진 머리통 위로 말굽이 꽂혔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바닥에 떨어진 머리통 위로 말굽 대신 불씨가 흩날렸다. 북소리는 이제 사람들의 머리가 떨어지는 곳에서 들리고 있었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일정한 규칙 없이 제 멋대로 울려댔다. 뇌수가 터지는 소리였다. 짐짓 그 사이로 칼과 칼이 맞닿는 소리가 들렸다. 오이카와가 바닥에 쓰러진 한 신하의 검을 빼들고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비록 불타오르고 있으나 전체가 불길에 휘감긴 것은 아니었고 나무가 타들어가고 있으나 분명 타지 않는 재질의 물건 또한 존재했다. 다만 달구어질 뿐이었다. 그가 잡아챈 검도 달리는 바닥도 잔뜩 달구어져 뜨거웠다.


이와쨩!”

오이카와,”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를 부르는 동시에 제 앞에 있는 남자의 복부를 깊이 찔렀다. 피가 튀었다. 이와이즈미는 제 볼에 뛰어든 피를 닦아낼 새도 없이 다가오는 오이카와를 끌어안았다. 오이카와를 끌어안은 몸이 한참 위로 들썩거리다 차분해지기를 반복했다. 평소보다 숨을 크게 쉬어야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왔다 나가는 듯 했다. 오이카와가 빼곡하게 들어찬 탄 냄새 가운데에서 이와이즈미의 체취를 들이마셨다. 땀 냄새가 진했다. 이와이즈미는 한 손으로는 오이카와의 어깨를 감싸고 한 손으로는 여전히 검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오이카와의 눈꺼풀에 짧게 입을 맞춘 후 주위를 살폈다. “왕이 적()에게 나라를 팔아 넘겼다.” 제 앞에서 쓰러지던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추잡하고 더러운 왕 같으니!” 어디에서부터 나온 소문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번엔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를 끌어안은 채로 검을 던졌다. 이미 복부가 뚫린 남자는 다시 한 번 비명을 질렀다이와이즈미는 창자 끝이 튀어나온 죽은 자의 모습을 바라보다 오이카와와 함께 숨을 들이마셨다. 들이마신 숨을 내뱉는 시간은 조금 달랐다. 이와이즈미는 꽤 오래 숨을 머물고 간직하다 그것을 내뱉었다.


신뢰를 얻기란 어렵다. 얻는다 해도 유지는 보장되지 않는다. 신뢰는 어렵고 의심은 쉽다. 신뢰를 얻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값을 치러야만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 신뢰이다. 이와이즈미는 가슴이 잔뜩 올라갈 정도로 가득한 숨을 오랜 시간에 걸쳐 뱉었다. 자신은 이들이 요구한 값을 치르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피해갈 수 없는 심판이었다. 이와이즈미는 빠르게 상황을 정리해가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상황이 극에 치달으면 치달을수록 차분해지는 착각이 들었다. 일전에 제가 반란을 일으키고 제 손으로 직접 아버지와 형제들을 죽였을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그때의 아버지 또한 자신과 같았을까. 이와이즈미는 제게 달라붙어있는 오이카와의 팔을 잡아채며 입을 열었다. 아니다. 그럴 리 없다. 아버지는 저와 같은 감정을 가졌을 리 없다. 이와이즈미의 머릿속으로 살려달라고 말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나갔다. 그러나 자신은 그럴 수 없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비단 혼자가 아닌 것은 사람을 강하고 또 나약하게 만들었다.


잘 들어.”

안 들을래.”


이와이즈미가 입을 열자마자 오이카와의 대답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이와이즈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오이카와가 곧장 제 말을 들어줄 것이라 생각하진 않은 덕분이었다. 이와이즈미의 귓가에 발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없다. 그의 판단으로는 그랬다. 기름 냄새가 자꾸만 후각을 자극했다. 간간이 그 안에 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필시 그것은 저를 찾아온 향이리라. 이와이즈미는 안고 있던 오이카와를 떼어냈다. 이와이즈미가 열린 입술을 부러 더 크게 벌려가며 단호히 말했다.


옆 나라로 가. 살 수 있어. 넌 능력도 좋으니까 어디든 일단 받아줄 거다. 당장 왕궁을 빠져나가서 세 번째로 보이는 마을에 가면 그곳에,”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오이카와.”

설마 내가 그러라 한다고 정말 그럴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나며 입을 열었다. 이와이즈미 만큼이나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 사이 발소리는 더더욱 가까워졌다. 용케 몸을 피해 지금까지 숨어 있던 인물들의 비명소리도 함께했다. 이와이즈미는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를 올려다보는 눈길이 곧았다.


……표적이 누구라고 생각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해.”


그는 객관적인 사실을 읊었다. 그러려고 했다. 막다른 길에 몰렸을 때 그의 방법은 많지 않았다. 한 번 터진 말은 지나치게 빨리 이어졌다. 속사포처럼 뱉어진 말들은 감정이 제대로 묻어있는 것이 없었다. 과연 오이카와가 제 거짓말을 눈치 채지 못할까? 서툰 원망에 자신을 떠나줄까? 이와이즈미는 제 형편없는 연기력을 탓했다.


다 너 때문이야. 사람도 아닌 존재한테 내가,”


이와이즈미는 눈을 깜빡거리고 싶을 때마다 어금니로 입안을 깨물었다. 피가 터지는 맛이 생생했다. 내벽을 타고 흘러 식도를 내려가는 비릿함이 얼얼함에 가려져 점차 무뎌졌다. 그는 그때마다 다시 같은 곳을 깨물었다. 입안에 침 대신 피가 가득 고일 때까지 이와 같은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깨물고 깨물고 깨물고 깨물고……, 깨물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나중에는 아무 감각이 들지 않았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괜히 너를,”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의 말에도 그의 옷깃을 놓지 않았다. 다시 한 번 폭언을 외치기 위해 입안을 깨문 다음 목소리를 준비했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날카로운 말을 뱉어야 했다. 이와이즈미는 피가 흐르는 턱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젠장!”


그러나 튀어나온 것은 얼마나 유약한 외침이던가. 이와이즈미는 들고 있던 검을 내던지고 머리칼을 헝클었다. 차마 끝까지 손에서 내던지지 못한 갈등이 그의 머리칼 곳곳에 파고들었다. 이와이즈미가 다시 오이카와를 끌어안았다. 원망을 외치려던 찰나의 과거와는 엇나간 행동이었다. 제 머리칼을 헝클이던 손가락이 이번엔 오이카와의 머리칼 사이로 깊게 뻗어나갔다. 꼭 제가 있어야 하는 곳을 찾았다는 듯 강하게 움켜쥐었다. 오이카와의 얼굴이 그의 손힘을 견디지 못하고 어깨 위로 파묻혔다. 곧 오이카와도 그의 겨드랑이 사이를 비집고 팔을 집어넣어 그의 등짝을 끌어안았다. 오이카와의 손바닥에 이와이즈미의 날개 뼈가 느껴졌다. 둘은 다시 서로를 마주 안았다. 그들의 머리, , 가슴, , 어느 한 곳 빈틈이 없었다. 그 틈으로 작은 먼지조차 허용하지 않을 만큼 강한 포옹이었다. 그때만큼은 세상이 고요했다. 그때만큼은 적어도 감은 눈이 평화로웠다. 물론 그 평화가 긴 시간 지속될 수는 없었다. 둘만이 존재하는 세상을 만끽하기엔 시간이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기름과 피 냄새 속에서 어떻게든 그의 체취를 들이마셨다. 오이카와도 다를 건 없었다. 덕분에 둘의 숨소리는 자꾸만 커졌다. 나무로 된 기둥 하나가 쓰러졌다. 나무가 타들어가는 소리의 간격이 점점 짧아졌다.


……오이카와.”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와이즈미였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끌어안은 채 말을 이었다. 그랬기에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가 어떤 표정으로 제게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느껴지는 느낌만으로 자신과 비슷한 얼굴을 하였으리라 생각했다. 비록 지금 거울이 없으니 제 얼굴을 볼 수도 없었지만 말이다. 오이카와가 조금 더 세게 이와이즈미를 끌어안았다. 숨소리는 여전히 컸다. 이와이즈미의 목소리에도 평소보다 숨소리가 더 많이 섞여 나왔다.


네가 먼저 도망가고 내가 따라가는 걸로 하자.”

…….”

너는 숨을 곳을 잘 찾고 나는 달리기를 잘 하니까. 그렇게 하자. 혹시 가는 길에 내가 다치면 네가 치료해주고 그러다보면 어떻게든 어디든 갈 수는 있겠지.”


낮게 읊조리는 말투엔 쇳소리가 심했다. 오이카와가 끌어안고 있는 날개 뼈 부근이 그가 입을 열 때마다 짧게 움직였다. 오이카와는 그 움직임을 느끼며 침을 삼켰다. 기실 그의 말은 온통 희망 덩어리였다. 최악의 상황과는 거리가 먼 아주 희망차고 밝은 미래였다. 적어도 화약 냄새와 피 냄새가 득실거리는 이곳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당장 죽음과 이별의 기운이 어느 때보다 다가오는 이 순간에서 신용이 가는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와이즈미는 희망을 나열했다. 가장 극적인 전개만을 열거했다. 그것이 오이카와를 안심시키기 위한 것인지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한 것인지 애매모호했으나 그는 끊임없이 이상적인 내일을 말했다. 평소 지극히 현실적인 사실만을 말하던 그가 내뱉으니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아무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반박을 하면 정말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와이즈미가 입술을 깨물었다. 습관처럼 깨물어댄 입술은 이제 지겹다는 듯 피를 굳혀 검붉은 딱지를 만들어냈다. 목소리에도 향이 있다면 필시 그의 목소리는 비릿한 향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어디든 가자. 오이카와. 그러니까 오늘은 제발 먼저 가줘.”


마지막 목소리엔 공기가 잔뜩 섞였다. 오이카와가 천천히 이와이즈미에게서 떨어졌다. 긴 포옹 이후 처음 얼굴을 마주했다.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에게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 했다. 언뜻 그의 입술에 오이카와.” 그 이름 하나가 머물렀다. 지내온 계절의 순간마다 몇 번을 발음한 이름이었다. 후에 눈을 감는 때 무엇이 가장 생각나느냐고 묻는다면 고민 없이 외칠 이름이었다. 혹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지나 만약 세상이 두 쪽 나고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어 기억 속의 얼굴과 목소리가 어쩔 수 없이 조금 흐릿해진다고 하더라도 끝내 선명할 단어였다. 절대로 평생 뇌리에 남을 이름이었다. 그럼에도 이와이즈미는 몇 번이고 되새기기 위해 그 이름을 불러야만 했다. 살아있는 이유 중 어딘가에 그 이름을 불러야 한다는 사실이 포함된 사람처럼 굳이 할 말이 없어도 그 이름을 중얼거려야 할 것 같았다. 이와이즈미는 입을 열었다. 입술을 둥글게 말았다.


이와쨩……!”


그러나 상대의 이름을 먼저 외친 것은 오이카와였다. 이와이즈미의 등 뒤에 꽂힌 화살 하나와 함께 덩그러니 그 외침 하나가 튀어나갔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등에 꽂힌 화살을 보며 어찌할 줄을 몰랐다. 짧게 비틀거리며 제게 기댄 이와이즈미를 바라보며 손을 떨었다. 이와이즈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화살이 너무도 비현실적이었다. 오이카와가 제어되지 않을 만큼 흔들리는 손길로 꾸역꾸역 그의 등을 더듬었다. 치료할 수 있다. 치료할 수 있다. 치료할 수 있다. 그는 그 사실을 되뇌며 심호흡을 했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손만 가져다대면 다 나을 것이다. 지금까지 제가 얼마나 많은 이들을 살려왔던가.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등에 박힌 화살을 힘주어 빼내었다. 이와이즈미가 짧게 신음했다. 오이카와를 붙잡은 손목에 힘이 들어갔다. 오이카와가 피가 흐르는 부분에 손을 가져갔다.


!”


피가 멈춰야 했다. 오이카와의 능력대로라면 당연히 피가 멎어야 했다. 그러나 오이카와의 손길이 닿았음에도 이와이즈미의 피는 멈추지 않았다. 오이카와가 다급하게 제가 바닥에 던졌던 화살을 바라보았다. 오이카와의 손바닥에 이와이즈미의 피가 흥건했다. 오이카와가 제 손바닥을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때 그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린 다는 것이 어떤 감정인지 알았다. 오히려 덤덤했던 것은 이와이즈미였다. 이와이즈미는 여전히 손을 떨며 이해하지 못하는 오이카와의 팔뚝을 다시금 붙잡았다.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그 물음만이 정신을 지배한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사람처럼 목소리를 쥐어짜내 한 번 더 물었다. 누구에게 묻는 질문인지 알 수 없었다. “……?” 억울한 의문이었다. 이와이즈미가 더 이상 참기 괴롭다는 듯 턱으로 피를 흘려보냈다. 입안이 끈적거렸다. 오이카와가 놀라 손을 뻗었다.


소용없어. 그 화살 내가 만들었거든.”


그때 낯선 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이와이즈미가 반사적으로 오이카와를 밀었다. 마지막 남은 힘을 다 쥐어짜낸 동작이었다. 그건 일시적인 본능이었으며 덧붙여 이와이즈미의 마지막 이성이었다. 오이카와가 생각지 못한 힘에 그대로 나뒹굴어졌다. 딱딱하면서도 뜨거운 바닥이 등 뒤로 느껴졌다. 건방진 온도였다. 오이카와는 바닥에 넘어지자마자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방금까지 제가 있던 곳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불길이 차올랐다.


이제와 우습지만 비극적인 결말을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다는 소리는 하지 않겠다. 제 존재의 근원이 마냥 아름답지 못하니 상상하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그러나 이토록 비극적일 줄이야. 이렇게나 비극적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현실은 상상보다 시시하다고 하지만 이 역시 제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일까? 지금의 현실은 상상보다 훨씬 더 비극적이고 괴로웠다. 오이카와가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숨을 억지로 끌어 모았다. 그조차 입을 벌렸을 뿐 제대로 숨이 들어차지는 못했다.


기회를 주는 거라고 했잖아.”


()의 목소리가 울렸으나 오이카와의 시선은 이와이즈미에게 향한 그대로였다. 그때 누구의 목소리가 울렸든 오이카와에게 별 영향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설사 세상을 창조한 조물주가 내려와 입을 열었다고 해도 지금의 오이카와에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에 있어선 어떤 존재든 제 3자에 불과했다. 오이카와는 천천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짧게 자른 손톱 덕에 아무리 세게 주먹을 쥐어도 자국 하나 남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제대로 들이마신 적도 없는 숨을 끝까지 내뱉었다. 기도와 폐가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코끝엔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타는 냄새. 그것이 이와이즈미라고 특이할 것은 없었다. 이와이즈미 또한 바닥에 쓰러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어가고 있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같은 향을 냈다. 오이카와가 즐겨 맡던 체취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단지 살이 타는 냄새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건 살이 타는 냄새였다. 살이 타는 냄새가 났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와이즈미의 살이 타는 냄새가! 이와이즈미의 뼈가 타는 냄새가! 이와이즈미의 머리카락이 타는 냄새가! 이와이즈미의 옷이 타는 냄새가! 이와이즈미가 타고 있는 냄새가! 오이카와는 그것을 받아드리는 데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머리와 코는 전부 이해하고 있는 내용이었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이 모든 상황을 인정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오이카와는 그 난리 속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 방금까지 축축하던 눈가가 급속도로 메말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코끝엔 여전히 이와이즈미의 살이 타들어가는 냄새가 잔류했다. 오이카와는 제가 바닥에 나뒹구느라 제대로 보지 못한 이와이즈미의 마지막을 회상했다. 화살이 꽂혔던 등. 저를 밀치고 뜨거운 불에 집어삼켜진 저보다 조금 작은 덩치. 마지막으로 저를 쳐다보는 것 같던 눈길. 발음하려다 그대로 바닥에 꽂히고만 제 이름. 오이카와는 마침내 모든 것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눈을 떴다. 다시 눈을 뜬 오이카와의 눈에 담긴 것은 마지막과 마찬가지로 타들어가는 이와이즈미였다.


오이카와는 그 광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재가 되어가는 이와이즈미의 분해 그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쓸데없이 효과음이 많았다. 그 사이에서 오이카와만이 침묵을 품에 안고 있었다.


오히려 그것을 바라보는 적()이 당황한 참이었다. 남자는 스쳐가듯 있었던 표정 변화 뒤로 내내 덤덤한 오이카와를 가만 바라보았다. 기실 남자는 눈치를 보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짓고 있는 저것은 어떤 표정인가, 어떤 감정인가에 대하여 말이다. 분노를 넘어선 허무? 단순한 아쉬움? 현실에 대한 부정? 그것도 아니라면 제 생각과 다르게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유흥거리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것일까? 남자가 그 모든 경우의 수를 재빠르게 돌아봤다. 애써 드러내지 않는 표정과 다르게 남자의 머리는 해답을 찾기 위해 바쁘게 회전하고 있었다. 생각에도 소리라는 것이 있다면 지금쯤 남자의 머리 위는 커다란 맷돌이 갈리는 소리가 반복되었을 것이다. 남자가 끊임없이 맷돌을 돌렸다. 오이카와는 그제야 남자의 존재를 깨달았다는 듯 그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고개를 돌리는 것도 아니었다. 한 번 눈길을 옆으로 돌렸다가 만 것이 전부였다. 오이카와가 입을 열었다. 낮은 목소리였다. 아마 그의 목울대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낮은 목소리임이 틀림없었다.


……. 내가 이와쨩이 죽으면 사리분별도 하지 못하고 날뛸 것 같았어?”

아니라는 말은 못하겠네.”

착각이 너무 많아.”


끝으로 갈수록 누군가에게 말한다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운 크기였다. 남자가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 끝에 인상을 썼다. 주변이 너무 소란스러웠기에 더욱 들리지 않았다. 그 사이 오이카와는 스스로가 뱉은 말에서 홀로 해답을 찾은 것인지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다들 너무 많은 착각을 했다. 심지어 자신까지도. 오이카와는 이제 완벽히 재가 되어가는 이와이즈미의 형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이와이즈미의 잔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내가 이와쨩을 가지고 협박한다고 네 말을 들었을 거라고 생각해? 이와쨩이 죽었다고 고분고분하게 당할 거라고 생각했니?”


이곳의 모두가 지난 시간동안 너무 많은 착각을 했다. 그토록 오이카와를 경계하고 두려워하고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믿지 않았던 주제에 오이카와가 가진 믿음만큼은 믿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이카와의 믿음은 그들을 향한 것이 아닌 이와이즈미를 향한 것이었다. 그들이 오이카와를 믿지 않았던 것처럼 오이카와 또한 그들을 믿은 적이 없다. 더 높은 권력을 가지고 싶다 생각한 적이 없는 것처럼 이 나라를 지키고 싶다 생각 한 적도 없다. 기실 그는 이 나라가 어디든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애정 없이 제 할 일을 하고 시간을 보내고.


오이카와가 그것보다 조금 더 나라에 개입을 했던 이유는 순수하게 이와이즈미 때문이었다. 귀찮음을 이기고 끊임없이 다친 자들을 치료했던 것은 순전히 이와이즈미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이카와는 단 한 번도 이들에게 애정을 가진 적이 없다. 오이카와는 단 한 번도 이들을 믿은 적이 없다. 당연히 지키고 싶었던 적도 없다. 그래도 이와이즈미의 믿음이 버려질 줄이야. 이와이즈미는 이들을 애정 했고 믿었고 지키고 싶어 했다. 이들도 이와이즈미를 애정하고 믿고 있는 줄 알았다. 그랬는데 이와이즈미를 버릴 줄이야. 감히 이와이즈미를 배신할 줄이야! 오이카와는 그것이 싫었다. 이와이즈미는 이들을 믿었고 이들을 지키고 싶어 했다. 그가 이 작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오이카와는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오이카와는 그다지 애정 없는 이곳을 게을리 살피지 않았다. 제가 이들을 믿지는 않았으나 이와이즈미를 믿는 이들의 믿음을 믿었고 이들을 지키고 싶지는 않았으나 이와이즈미가 지키고 싶어 하는 이들을 지키고 싶어 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결론인가. 이들은 이와이즈미의 믿음을 배신했다. 이와이즈미가 죽었다. 자신의 생각보다 더욱 비참하고 더욱 비극적으로 목숨을 달리했다. 이와이즈미가 죽었다. 이와이즈미가 죽었다……. 그 사실을 곱씹을수록 뚜렷해지는 듯 했다. 이제 오이카와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들을 향한 어쭙잖던 믿음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도. 무엇 하나 남은 게 없다. 이와이즈미의 죽음과 동시에 모든 것이 죽어버렸다. 재 한 줌 남기지 않고 전부 사라졌다. 전부 죽어버렸다. 전부 살해당했다. 전부 목숨을 잃었다. 다름 아닌 이들의 선택에 의해서! 이와이즈미가 애정하고 믿고 지키고 싶어 했던 이들의 손끝에서! 오이카와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숨소리가 작게 섞인 목소리는 건조했다.


그래. 이와쨩이 죽었네.”

내가 아니었어도 저 왕은 이렇게 됐을 거다. 애초에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네 말이 맞아.”


오이카와는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굳어가는 핏줄 아래로 굵직한 손금 몇 개가 보였다. 완연한 인간도 아닌 주제에 우스운 흔적이었다. 오이카와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이왕이라면 전쟁을 치른 놈들 중 미래를 볼 수 있는 녀석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오이카와는 의미 없는 손짓을 반복하다 어느 책에서 보았던 구절을 떠올렸다.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을지 알지 못할 선대의 책이었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는 우리가 때때로 서열 싸움을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단순히 힘만으로 누구의 서열이 더 높은지를 따지기 위해서? 그저 영토를 늘리기 위해?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이들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았다. 간단하게 생각해보자. 이들이 혹할 만큼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일천년을 살 수 있는 이들에게 고작 조금 더 넓은 땅덩어리와 별로 부딪히는 일도 없는 동족과의 서열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몇 없는 동족의 심장에 칼끝을 꽂아 넣는 이유가 무엇일까.


바람이었던가.”


오이카와는 지난번 제가 죽였던 적()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일천년을 살 수 있는 이들에게 고작 조금 더 넓은 땅덩어리와 별로 부딪히는 일도 없는 동족과의 서열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몇 없는 동족의 심장에 칼끝을 꽂아 넣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건 평범한 이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이유였다. 오이카와는 이제야 적()과 평범한 이들의 공통점을 찾은 기분이 들었다. 욕심의 색만큼은 종을 막론하고 같았다. 몇 년 만에 찾은 공통점이 이런 것이라니 허무했다. 이들이 싸움을 이어온 원인은 간단했다. 평범한 이들이 더 큰 부, 더 큰 영토, 더 큰 명예를 갖기 위해 싸우는 것처럼 이들 역시 그렇게 해야만 원하는 것이 손에 들어왔으니까. 이들은 각자를 죽일 경우 그들이 가진 고유의 힘을 어느 정도 습득할 수 있다. 만약 누군가가 오이카와를 죽이고 리프의 순간을 선사한다면 오이카와의 능력을 가질 수 있을 거란 얘기였다.


그러나 능력이란 그 능력이 가진 속성이 같아도 그것을 누가 쓰느냐에 따라 또 달라진다. 아무리 거대한 힘이라도 쓰는 자가 어리석다면 빛을 볼 수 없다. 아무리 미약한 힘이더라도 영리한 자가 쓰면 빛을 볼 수 있다. 운이 좋았던지 지금까지 오이카와가 만난 이들은 대부분이 어리석었다. 거대한 능력을 쥐고도 할 줄 아는 것이 휘두르는 것 밖에 없었지. 그러나 혀가 차질 만큼 안쓰럽던 그들의 어리석음이 새삼 감사해지는 순간이었다. 오이카와는 영리하다. 영리하고 또 힘을 가졌다. 이토록 완벽한 그릇이 있을까. 오이카와는 남자를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여기저기 갈라진 입술이 벌어졌다. 남자를 비롯하여 이 나라의 모든 사람에게 해줄 공식적인 유언이었다.


네가 아니었더라도 이와쨩은 죽었겠지. 그 이유에 내가 있을 거고. 그렇지만 그게 언제가 되었든, 누구에 의해서든.”


매일을 꼬박 적()이라 부르는 주제에 다들 잊었다.


이와쨩이 죽었는데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그의 존재는 가장 강력한 적()이었음을.

 

 

  

죽음의 소리는 언뜻 굉장히 시끄러운 듯 해보이면서 또 한 없이 고요하다. 금방 모든 것이 절정을 친 다음 사라지기 때문이다. 공기를 들이마시던 존재가 언제 그랬냐는 듯 공기 속으로 스며든다. 오이카와는 한 차례 많은 이들의 절정이 지나친 순간을 걷고 있었다.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 같은 게 아니라 정말 혼자뿐이었다. 적어도 이 나라에서 만큼은 말이다. 오이카와는 여물어가던 토지가 다시금 황무지로 돌아온 것을 보며 허탈함을 느꼈다. 공들인 탑이 전부 무너진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허탈감의 중간 중간에도 통쾌함이 섞여있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못했다. 종국엔 통쾌함이 더 진했다. 우스운 것이 그래도 끝끝내 두 감정 중 하나만 존재할 수는 없었다. 마냥 허탈하지도 마냥 통쾌하지도 못했다. 그 두 감정의 저울을 왔다 갔다 하는 게 고작이었다.


오이카와는 제 방으로 돌아왔다. 제 방은 비교적 깔끔함을 가지고 있었다. 쑥대밭이 된 바깥과는 전혀 다른 풍경을 아직 유지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고민 없이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리곤 허리를 숙였다. 손을 뻗자 얌전히 자리한 통이 느껴졌다. 오이카와는 불쑥 그것을 꺼내들곤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잠깐의 포옹이었다. 그 뒤 그는 거침없이 그 안을 헤집었다. 좁다란 통 안에 큰 파장이 일었다. 오이카와는 그 안에서 제 네 번째 손가락만한 병 하나를 꺼내들었다. 통을 내려놓았다. 그 위로 짧은 입맞춤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와. 이와쨩은 탄 부분도 못생겼어.”


오이카와는 모든 것을 다 쓸어버리고도 남겨둔 그의 옆으로 향했다. 구부정하게 앉아 그의 흔적을 바라보다 이내 털썩 주저앉았다. 그을린 자리를 매만지던 오이카와는 다 타버린 후에도 남아 있는 몇 가지를 만지작거렸다. 그 중 하나가 이와이즈미 본인이 매일 지니고 다니던 단도였다. 그러고 보니 이걸로 제 손바닥을 긋던 무모한 행동을 했었지. 오이카와는 그날의 충격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대단한 날이 아닐 수 없었다. 아마 제 인생의 가장 큰 방향점이 된 날이 아닐까 싶었다. 너무 많은 것들의 출발점이 된 날이 아닐까 싶었다. 오이카와는 문득 저를 향하던 소문 하나를 떠올렸다. 저와 피가 닿으면 악재가 생긴다는 소문 때문에 제가 다쳤음을 알고도 끝내 말을 걸어오지 못했던 시녀가 떠올랐다. 사실은 소문이 진짜였던 걸까? 저와 피를 맞닿았기 때문에 이와이즈미에게 악재가 들이닥친 걸까? 생각하니 억울함보다는 슬픔이 먼저 다가왔다.


그때 오이카와는 제가 슬픔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슬픔이 넘쳐 견디기 괴로웠다. 눈물보다 좌절이 빨랐고 좌절보다 비명이 더 빨랐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오이카와는 제 살짝 찢어진 의복의 옆구리를 들췄다. 이제 희미한 흉터 자국이 보였다. 오이카와는 그것을 보는 순간 망설임 없이 단도로 그 부근을 찢었다. 피가 다시 흘렀다. 애써 세월 동안 정체를 숨겨갔던 흉터 위로 또 상처가 생겼다. 그다지 의미가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이미 아문 옆구리를 다시 찢는다고 무언가가 달라질 리 없었다. 이제 이 옆구리와 마주할 수 있는 손바닥도 없었다. 그래도 오이카와는 옆구리를 찢었다. 흐르는 피를 보았다. 칼날 끝을 타고 내려가는 핏방울들을 바라보며 그가 그것을 이와이즈미의 자국 위로 흩뿌렸다.


이와쨩이 먼저 숨을 곳을 찾으러 갔지만 괜찮아. 오이카와씨도 나름 달리기가 빠르니까.”


개개인에게 있어 영원은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일까. 이 또한 적당한 기준을 세워 대강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라고 잡았을 때 한 사람이 가진 영원의 시간은 지극히 짧다. 그러니까 사람의 삶을 영원이라고 하는 대신 평생(平生)이라고 칭하겠지. 그러나 어떻게 보면 그 평생이야 말로 절대적인 영원일 것이다. 나이가 들고 수명이 다 해 죽어버리고 또다시 태어나고를 반복한다고 해도 결국 모든 삶이 끝날 때마다 그 사람의 잔해는 여전히 지속되는 세상을 떠돈다. 오이카와가 지금 바로 리프를 택하고 죽어버린 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지금의 삶을 살았던 오이카와는 죽은 채 영원을 떠다니는 것으로 남겨진다. 지금의 오이카와는 이 시간에 갇혀 이 세상이 끝나는 순간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이와이즈미는 그 영원의 시간 동안 오이카와를 기억해주겠노라 말했다. 분명 그것이면 충분한 시절이 오이카와에게도 있었다. 그리고 이와이즈미는 정말로 오이카와의 모든 것을 기억한 채 사라졌다. 그렇게 영원히 남게 되었다.


그땐 꼭 내가 치료해줄게.”


그러나 욕심이란 감정이 어디 자라지 않을 녀석이던가. 쉬지 않고 자라난 욕심은 이제 외면할 수도 없는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비단 이번 생의 이와이즈미에게 영원히 남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오이카와는 더 많은 것을 원했다. 더 많은 시간을 원했다. 일천년을 바란 것이 아니다. 아니. 아니다. 일천년을 바랐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만약 제 수명의 길이가 1000년이 아닌 50, 100, 500년 혹은 10000년이었다고 해도 같은 욕심을 꿈꿨을 것이다. 얼마의 수명이 있든 그가 바라는 욕심의 내용은 같을 것이다. 오이카와가 누군가의 영원에 한 번이라도 남는 것을 바랐던 적이 있다면 지금은 달랐다. 지금은 이와이즈미의 반복되는 순환 그 모든 삶의 영원 속에, 그리고 제게 있을 기다란 시간의 마지막 순간까지. 제 삶의 영원까지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준비했어.”


드디어 오이카와가 눈물을 흘렸다. 드디어 눈물의 시간이었다. 온전한 슬픔의 시간이었다. 이제야 입술을 뚫고 나오는 새된 비명소리가 천장을 긁었다. 비명과 함께 덜 익은 채 흐르는 눈물들이 굵직했다. 날 것으로 벌건 감정들이 적나라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보다도 붉었다. 그는 벌건 눈동자로, 벌건 감정으로 한참을 울었다. 옆구리에선 끊임없이 피가 흘렀다. 그의 온몸이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그을린 자국 위로 몸을 겹쳐 올리는 내내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 이와이즈미가 남긴 마지막 자국 위로 제 몸을 겹치며 끊임없이 울었다. 끊임없이 통곡했다. 오열의 반복이었다. 제 심장에 스스로 칼을 꽂아 넣는 그 순간까지 말이다. 오이카와가 온통 붉은 모든 것들 사이에서 중얼거렸다. 제 욕심을 말했다. 이미 그의 피가 묻은 칼날이 다시 한 번 오이카와의 심장을 관통했다. 눈을 뜨면 언제 죽었냐는 듯 다시 삶이 이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태어날 그가 향할 곳은……. 그가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단 한 곳은…….


 

80년의 몫이 지나갔다. 그것이 그의 첫 리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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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HQ / 전생파트 / 약간의 유혈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며 또다시 계절은 순환을 반복한다. 살면서 다시없을 열아홉의 하루하루가 지나 똑같이 다시없을 스물의 하루하루들을 또 지나친다. 어느덧 그들의 나이는 스물다섯 번째 순서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의 나이가 벌써 스물다섯이 되었다.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가 몇 번의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을 반복했다. 이와이즈미는 약속대로 그 시간이 흐르는 내내 오이카와의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그리고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의 스물다섯 번째 생일을 축하해주고도 꽤 오랜 기간 몇 번의 해가 뜨고 짐을 반복할 즈음으로 시간은 흘러간다.


이와쨩!”

밖에서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쿠소.”

그러는 이와쨩은? 그리고 지금은 아무도 없잖아.”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생긴 변화들을 전부 설명하자면 복잡하니 단순하게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 각자의 영원 속 서로에 대한 것들이 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둘이 가진 영원 동안 영원히 기억할 것들이 많아졌다고. 오이카와는 매번 꼬박 꼬박 붙이던 전하라는 호칭을 구석에 집어넣고 어느 날부터 이와쨩이라는 저만의 부름을 말하기 바빴다. 이와이즈미는 여전히 왕으로서 나라를 돌보고 있었으며 오이카와의 뿔과 적()색 눈동자, 위치 또한 건재했다. 전쟁이 한 차례 더 있었으나 그들의 나라가 쉽게 승기를 거머쥐었기에 특별한 시련은 없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오이카와의 어린 시녀가 죽었다. 오랜 병을 앓고 있었다고 했다. 오이카와는 상처를 치료해줄 수는 있지만 병을 치료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작년 가을 자신의 영원한 시간을 끌어안은 채 관으로 들어갔다. 오이카와가 딱히 그녀의 죽음에 눈물을 흘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직도 그는 새로 들어온 무뚝뚝한 시녀가 적응되지 않았다. 그녀와는 영 달랐기 때문이다.


일정은 끝났어?”

아니. 조금 있다가 다시 가야해. 곧 연말(年末)이니까.”


이와이즈미의 말에 오이카와가 아쉬운 듯 제 입술을 깨물었다 놓았다. 겨우 시간을 내어 만났거늘. 최근 들어 이와이즈미는 쏟아지는 나랏일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날들이 늘었다. 피곤함은 눈 밑을 타고 턱까지 흘러내려왔으며 어디 엉덩이를 붙일세라 다시 불려가는 것을 반복했다. 원래 왕의 자리가 이토록 바쁜 것인지. 오이카와는 어제와 오늘을 통틀어 단 한 시간 정도 그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면서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계절은 반복 되어 다시 겨울을 불러왔다. 작년에 비해 추위가 누그러졌으나 그래도 바람은 여전히 시렸다. 오이카와는 코끝이 살짝 발갛게 물든 이와이즈미의 양 볼을 제 손으로 감쌌다. 평범한 이들보다 체온이 조금 떨어지는 오이카와의 손바닥은 따듯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차가움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오이카와 스스로는 그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는 듯 했다. 물론 이와이즈미 역시 크게 개의치 않고 그 손길에 얼굴을 가만 내버려두었다. 커다란 손바닥이 볼을 감싸는 느낌이 썩 좋았기 때문이다.


이와이즈미는 저를 감싼 손바닥 아래로 보이는 하얀 손목을 바라보며 잠시 눈을 감았다. 그 상태로 서 있기를 몇 십초가 흘렀을까. 몰아치는 평온함에 잠을 이기지 못한 이와이즈미가 먼저 항복을 선언했다. 쉬고 싶어. 이와이즈미의 중얼거림에 오이카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와이즈미는 어젯밤도 채 2시간을 자지 못했다. 며칠째 그런 상태였기에 피곤함이 어깨를 내리 누르는 건 두 말 할 필요가 없었다. 오이카와는 정자에 앉아 제 허벅지를 툭툭 쳐댔다. 이와이즈미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다시금 확인한 뒤에야 그 허벅지 위로 제 얼굴을 떨어트렸다. 아마 제가 이 무릎에 잠들 수 있는 시간은 최대로 잡아봐야 30분이 되지 않을 테지만 그것으로도 감사해할 수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눈을 감고 뜨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차가운 공기를 막아주고 싶다는 듯 그의 얼굴 앞에 커다란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희고 긴 손가락 끝이 연한 분홍색으로 잘 물들어 있었다.


잘 자.” 오이카와가 매번 던지는 나른한 인사였다. 최근 그를 만나 가장 많이 하는 대사 중 하나일 것이다. 이와이즈미가 그 인사를 들으며 잠결에 중얼거리듯 물었다. “오이카와……. 넌 언제부터 네가 다른 사람과 다른 걸 알았어.” 물음 끝에 물음표도 아닌 마침표가 찍힌 것으로 보아 어지간히 잠에 취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와이즈미는 그 짧은 순간에도 오이카와에 대해 궁금하다는 듯 물어왔다. 어쩌면 잠결에 한 번도 묻지 못한 질문을 던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오이카와는 잠시 고민했다. 글쎄. 그의 대답이 느렸다. “그냥 눈을 떠보니 이렇게 됐어.” 한참 부족한 설명이었지만 진실이었다. 오이카와의 대답에 이와이즈미가 중얼거렸다. 이제 정말 잠에 침식당한 듯 해보였다. 목소리의 끝이 과도하게 늘어졌다. “괜찮아…….” 꽉 막힌 목소리가 그렇게 말했다. 무엇이? 오이카와는 짓궂게 물으려던 것을 멈췄다. 고개를 숙였다. 오이카와는 그새 잠에 빠진 것 같은 이와이즈미를 바라보며 한껏 볼을 부풀렸다. 그리곤 곧 단단히 머금고 있던 바람을 전부 뱉어내는 동시에 웃어 보이는 것이다. 그래. 나는 괜찮을 것 같다. 오이카와는 이제 제 말을 듣지 못할 이와이즈미를 보며 아까 전 이와이즈미처럼 늘어지는 대답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온함의 연속이었다.


나이가 들고 나라가 안정되어 갈수록 여유는 없어졌지만 그는 지금이 가장 평온했다. 그것이 이와이즈미의 옳은 정치를 인정해주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혹 누군가 오이카와에게 있어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는 일천년의 광활한 시간 중 가장 행복한 때를 꼽으라한다면 그는 주저 없이 지금을 꼽을 것이다. 아직 주어진 시간의 반의반도 살지 않았는데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다면 하나의 본능이었으리라. 단순히 그럴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미 예상 가능한 정답이었지만 오이카와는 일천년의 반의반은커녕 몇 분의 일도 되지 않는 시간 사이에 다시없을 크기의 사랑을 느꼈다. 일천년을 더 살아가도 이와이즈미가 아니라면 느낄 수 없을 감정이었다. 계절은 끝없이 지나갔고 오이카와의 감정 역시 그에 맞추어 크기를 끊임없이 키워갔다.


그렇지만 내일은 조금 더 오래 보고 싶어.”


오이카와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는 잔뜩 풀어진 채 잠에 든 이와이즈미의 볼을 손가락으로 살살 찔러보며 등을 둥글게 말았다. 처음 그와 만났을 때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표정을 보는 재미가 꽤 쏠쏠했다. 오이카와는 입술 바로 뒤의 연한 살을 앞니로 조금씩 물어뜯었다. 별다른 의미는 없는 행동이었다. 오이카와가 그 의미 없는 행동을 얼마나 반복했을까. 그의 예상대로 이와이즈미는 30분 정도가 흐른 뒤 눈을 떴다. 일어나야한다는 강박이 있었던지 어느 순간 번쩍 눈을 뜬 후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기상에 놀란 것은 오이카와 쪽이었다.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이와이즈미는 건조한 눈을 끔뻑거리며 눈썹을 긁었다. 가기 싫다는 투가 다분했다. 그러나 가기 싫다고 해서 가지 않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기에 그는 진한 미련을 담은 채 발걸음을 뗄 채비를 했다. 오이카와는 퍽 어울리지 않는 표정을 짓는 그를 향해 어리광이 는 건 저 혼자가 아니라며 농을 쳐보였다. 이와이즈미는 발걸음을 떼기 직전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정자에 앉아 이와이즈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제 눈썹을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을 움직여 이번엔 제가 오이카와의 볼을 쥐어 잡았다. 이와이즈미보다 오이카와의 키가 더 컸기 때문에 평소라면 시선이 비스듬히 위쪽을 향했겠지만 지금은 오이카와가 앉아있으니 시선이 한참 아래로 향했다. 이와이즈미가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맞닿았다. 체온이 살짝 높은 이와이즈미와 체온이 낮은 오이카와의 입술은 부대낄 때마다 각자의 온도를 잃은 채 미지근해졌다. 오이카와의 볼에 위치해있던 이와이즈미의 손가락이 점점 내려가 그의 목덜미를 쥐었다. “이제 가야하지 않아? 바쁘다며.” 잠깐 벌려진 입술 틈새로 오이카와가 놀리듯 입을 열었다. 이와이즈미의 단단한 손가락이 제 뒷덜미를 감싸오자 오이카와는 옅은 소름을 느꼈다. 절로 허리를 곧추세우게 되는 기분이었다.


간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떼어진 입술 새로 이와이즈미가 중얼거렸다. 입김이 하얗게 다가오는 듯했다. 오이카와는 웃으며 그를 배웅했다. 달아오른 입술이 꼭 저 혼자 피부에서 떨어져 둥둥 떠다니는 착각이 들었다. 기분 좋은 착각이었다. 이와이즈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전하. 이젠…….”


그러나 다른 점이 있었다면 이와이즈미는 금세 붕 떠 있던 하늘에서 지상으로 추락한 기분을 연달아 맛보아야 했다. 직위를 벗어던진 사람처럼 엉망으로 누군가와 침대를 뒹굴고 있던 파렴치한 상상에서 냉정하고 피곤한 현실로 소환되고 말았다. 달짝지근한 상상을 방해 당한 것에 자칫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쓸 뻔했으나 그럴 순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억지로 잔잔한 표정을 유지하며 신하의 말을 귀담아 듣는 척했다. 3년 전부터 지겹게 들어오던 소리였기에 새삼스러운 충격은 없었다.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비교적 나이가 있는 신하는 혹여나 이와이즈미가 제 말을 끊을까봐 쉬지 않고 입을 놀렸다. 이와이즈미는 아까와 전혀 다른 의미로 눈썹을 긁었다. 곤란함이 묻어나있는 행동이었다. 은근한 짜증도 잔류한 손길이었다. 신하들은 그의 작은 몸짓에도 어깨를 움칠거리며 입을 열었다.


백성들 또한…….”


그즈음 이와이즈미는 정말로 궁금증이 들기 시작했다. 이와이즈미의 혼사 이야기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으나 말의 내용은 매번 같았다. 나라의 안정과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는 그들의 논리에서 빠지지 않는 내용이었다. 차라리 저 내용이 제가 왕위에 앉은 순간 나왔더라면 지금처럼 콧방귀를 뀌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이들은 어땠던가. 제가 왕위에 올랐을 당시에만 하더라도 대부분이 금방 물러날 어린 왕을 보는 사람들처럼 저를 대하지 않았던가. 그들이 정말 나라의 안정을 걱정하려면 그때 걱정을 했어야 옳았다. 이와이즈미가 왕위에 올랐던 때의 나라는 그야말로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나라의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으며 백성들과 관리들의 싸움은 끊이지 않는 일과였다. 신뢰는 잃은 지 오래인 국가였다. 이와이즈미가 마침내 왕위에 올랐을 극적인 순간에 대부분의 이들이 환호하면서도 그를 믿지 않았다. 선대왕의 죽음을 기뻐하면서도 그의 자손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였다.


그랬기에 더더욱 그가 지금까지의 시간 동안 얼마나 이 나라를 잘 끌어온 것인지를 증명해주는 과거였다. 결론부터 읊자면 지금의 나라는 매우 안정된 상태였다. 이와이즈미의 정치는 틀린 적이 없었으며 백성들의 신뢰 또한 되찾았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하들은 이제와 나라의 안정과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그것이 자신의 혼사로 모두 해결될 일이었다면 왜 애초에 그것을 말하지 않았는지가 의문이었다. 그 간단한 의식으로 자신이 완벽한 군주가 될 수 있었다면 그때의 그는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당장 7년 전의 그라면 그랬을 것이다. 면죄부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던 그때라면 그러고도 충분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신하들의 목소리가 언제나 똑같은 것처럼 이와이즈미의 목소리 또한 언제나 같았다. 고려해보도록 하겠다는 그의 목소리가 퍼졌다. 평소보다 묵직함을 가지고 있는 목소리였다.


원래 그의 존재는 왕위에 걸맞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의 기백이라든지 자질이라든지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의 위치가 어디인가였다. 이와이즈미의 위로 형제가 꼭 넷이 있었으며 아버지의 나이도 왕위에서 물러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이와이즈미는 가장 늦게 들어온 후궁의 아들이었으니 그의 서열 또한 가장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후궁들과 황후 사이의 견제가 심해 죽지 않으면 다행인 현실이었다. 실제로 이와이즈미의 바로 위에 있던 형제는 그의 나이가 열 살을 꽉 채울 무렵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때부터 그는 늘 죽음을 상기하며 살았다. 열 살짜리 꼬마아이가 가지기엔 지나친 성숙함이었다. 그러나 그가 죽음을 상기하고 살았다고 만물의 법칙을 피할 수 있는 것은 또 아니었다. 세상은 그리 순탄하지도 얌전히 기다려주지도 않았다. 죽음이 지나치게 자주 어린 그의 곁을 맴돌았다.


죽음의 두 번째 지목은 그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이와이즈미가 열세 살이 되던 해에 제 형제의 곁으로 떠났다. 그녀는 사흘간 사경을 헤매었으나 그의 아버지께선 한 번도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이미 그들의 존재는 그에게서 잊혀진지 오래였다는 증명이었다. 그에게 있어 아버지라는 사람은 그 순간부터 왕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기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적이 언제 있었겠냐마는 그날을 시작으로 그의 확신은 더욱 두드러졌다. 제 사람 하나 책임지지 못하는 그에게 나라의 군주는 너무도 과분한 위치였다. 물론 이와이즈미가 아니더라도 그리 생각하는 사람이야 차고 넘쳤다. 당장에 궁을 나가 조금만 걸어본다면 모두가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꼭 벽 하나를 두고 다른 나라를 사는 사람들처럼 궁 안에서는 그 모든 것이 암묵적으로 없는사실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마치 벽 하나를 두고 두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 같았다. 궁 밖을 나갔을 때 들리는 통곡소리와 원망소리가 신기하게도 궁에선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를 칭찬하기 바빴다. 세운 적도 없는 남자의 공을 어떻게든 만들어 붙이려는 창의력이 존경스러울 수준이었다. 이와이즈미의 형제들이라고 특별히 다른 점은 없었다. 모두 반쪽짜리 핏줄을 나눠가지고 있는 형제들은 하나같이 그 자리를 탐냈다. 저들끼리 치열한 싸움 속에서 그는 언제나 예외적인 존재였다. 어차피 되지 않을 사람이라는 꼬리표는 그를 말할 때 항상 따라붙는 것이었다. 그즈음 그의 존재를 고려라도 해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존재하긴 했을까? 그만큼 그는 모두에게 누르면 눌릴 수밖에 없는 가냘픈 사람으로 생각되었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와이즈미의 이름과 생사여부조차 희미하게 기억했을 것이다. 간혹 그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는 형제들도 이름이 아깝다며 비웃기 바빴다. 그러나 결국 왕좌에 앉은 이는 다름 아닌 그였다. 왕위는 그에게 계승되었다.

 

하지메 네가 어떻게……!

 

그것이 평화로운 계승은 아니었다. 이와이즈미는 열여덟이 되던 때 제 아버지와 형제들의 목숨을 스스로 앗아가며 그 자리를 밟았다. 어머니에 대한 복수가 아주 없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것은 계기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살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그는 제 수명의 연장을 위하여 누군가의 수명을 앗은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이와이즈미였지만 그가 죽인 인물들 역시 이와이즈미였다. 사람의 몸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무르고 가냘픈 것이어서 날카로운 날을 가져다대는 족족 간단하게 썰려왔다. 역한 냄새가 들끓는 사이에 그가 서 있었다. 잔뜩 피 냄새를 묻힌 몰골이 그 상태로 궁 밖을 나서면 백정으로 오해를 받기 딱 좋은 정도였다. 이와이즈미는 마지막으로 잘려나간 제 형제의 목덜미를 바라보며 눈동자를 깜빡거렸다. 이들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제 아버지 보다는 형제들을 이해했다. 이들에게 있어서도 저와 마찬가지로 가장 큰 도피처라고 생각되는 자리가 바로 왕의 자리였으리라. 그러나 그는 이해를 했을 뿐 온정을 베풀지는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눈도 감지 못한 채 죽은 제 두 번째 형제의 얼굴을 바라보며 짧은 묵념을 이었다. 그런다고 무언가 달라지겠냐마는 그의 마지막 예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 저를 쳐다보고 있음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주인은 다름 아닌 이 나라의 적()이었다. 어머니의 곁에서 몇 번 마주친 것이 전부인 존재였다. ()은 이와이즈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빨간 동공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필시 이와이즈미의 눈동자도 어느 정도의 붉음을 띄우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잠시 놀란 것처럼 이와이즈미를 응시하다 곧 혀를 차댔다. “결국…….” 마치 모든 것을 예상이나 한 듯 말하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 살인의 장면을 목격한 반응이 그것이 전부라는 점이 안심되면서도 답답했다. 이와이즈미는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내던졌다. 반란의 끝이었다. 완벽한 승리였다. 폭군의 왕좌는 드디어 공석이다. 그러나 빈 왕좌가 아주 기쁘지는 못했다. 과연 정말 적()들이 이와이즈미의 반란 여지를 몰랐을까? 그 생각을 하면 거북했다.


이와이즈미는 제 볼에 묻은 피를 문질러 닦으며 침을 뱉었다. 빈 왕좌가 이와이즈미를 부르는 듯 했다. 이와이즈미는 피곤한 발을 이끌고 그곳으로 향했다. 곳곳이 찢어지고 피로 물든 비단옷은 초라했지만 그 자리만큼은 빛이 났다. 이곳이 정말 제 도피처가 될 수 있을까? 백성들의 살 구멍이 될 수 있을까? 이와이즈미는 천천히 왕좌에 엉덩이를 붙였다. 왕좌는 차가웠다. 피비린내 사이에서 오한이 드는 것이 느껴졌다. 이와이즈미가 그 자리에 앉은 채 적()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복잡한 표정을 지어보였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비로소 새로운 왕의 시작이었다. 역사의 새로운 순간이다. 새로운 시대의 등극이었다. 이와이즈미의 탄생이었다. 이와이즈미의 죽음이었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벽 하나를 두고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궁 안은 벌레 하나조차 전부 죽은 듯 조용했으나 바깥은 환호로 물들었다. 이와이즈미는 여전히 불편할 만큼 빠르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피곤함이 어깨를 차올라 목을 조이는 것 같았다. 귀에서 피가 흐르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어쩌면 눈에서도 피눈물이 흐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랬다면 차라리 그의 마음이 편했을까. 그날의 그는 피눈물은커녕 눈물조차 흘리지 아니했다. 남의 피로 가득한 볼이 전부였다. 이와이즈미는 이미 딱딱하게 굳어져 아무리 문질러 닦아도 닦이지 않는 피부를 뜯어낼 기세로 계속해서 닦아냈다. 헛수고일 뿐임을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왕좌에서 보이는 아버지의 잘린 목을 바라보며 실소를 지었다. 그는 이날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이와이즈미의 죽음과 이와이즈미의 생존을 그는 평생 기억할 것이다. 그때가 611일의 새벽 2시였다. 2시간 정도 늦은 생일 선물이 그를 반겼다.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탄생 이후 곧바로 죽음의 날을 맞이한 기분이었다.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이와이즈미의 왕위 등극에 저항의 목소리가 잠깐이나마 일렁였으나 그것 역시 얼마 가지 않아 이와이즈미의 손끝에서 모두가 침묵했다. 그는 원래 이곳이 자신의 자리였다는 것처럼 곧바로 제 할 일을 진행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선택들은 예상과 엇나가는 법이 없었다. 그를 견제하는 이들이야 많았으나 그 누구도 함부로 떠들지 못했다. 나라는 재빠르게 안정되어 갔으며 그 언제 살기 힘든 황무지였냐는 듯 비옥한 땅이 먹음직스럽게 여물어갔다. 그는 제 핏줄을 죽인 면죄부를 찾고 싶다는 듯 애처로울 만큼이나 일에 매달렸고 동시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완벽한 군주의 자질이 있었다. 또한 그 처음 시작에서 만난 이가 오이카와였다. 스물이 되지 않은 나이로 왕위에 오른 후 바쁘게 외교 활동을 하며 저를 알리던 이와이즈미가 2개월여 만에 다시 돌아왔을 때 그를 만났다. 어떻게 보면 제 나라의 땅을 밟고 그의 위치를 가장 실감나게 만들어주는 인물이었다. 자신을 향해 혀를 차던 인물들 대신 서 있던 새로운 적()은 꼭 자신처럼 이제 막 지금의 위치에 앉혀진 존재였다. 그랬기에 그가 첫 만남에서 얄궂은 경계를 보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자신을 향해 혀를 찬 것도 아니었는데 가시 돋친 행동을 선보인 것은 저를 쳐다보는 붉은 눈동자가 자꾸만 그날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자신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은 그가 거슬렸으리라. 자신의 위치는 당연하지 않은 것이었으나 오이카와에게 있어 적()의 위치는 당연한 것이었으니 제 형제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생각해보면 어리긴 어린 날이었다. 가시 돋친 환영 후 얼마나 후회했던가. 그 후로 처음처럼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은 여전했다. 자신과 비슷한 듯 전혀 다른 그 성격과 행동이 끊임없이 거슬렸다. 그래서 더욱 발걸음을 하지 않고 마주침을 최소한으로 줄였으나 보일 때마다 그 불편함은 가시지 않았다. 가시다니. 갈수록 가속화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불편함이 최고조를 향해 달려갈 무렵 그의 시녀가 제게 벌벌 떨며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가 다친 것 같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 전부였으나 표정만큼은 나라가 무너진 듯 해보였다. 그렇게나 걱정이 되면서도 무서운 감정은 어쩔 수 없는 것이냐고 묻지도 못했다. 그는 그냥 고개를 끄덕거렸다. 애초에 전쟁이 일어난 까닭의 중심에 오이카와가 있거늘. 그녀의 애매한 상냥함이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적()이란 매번 피곤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자존심만 높은 쓸데없는 인물들이라 여겼다.


그런데 그날 자신은 왜 그런 선택을 했지? 그날 그는 어렴풋이 오이카와에게서 느끼던 이물감이 없어짐을 깨달았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느껴보는 동질감이었다. 분명 처음 그를 경계한 이유가 자신과 전혀 다른 모습 때문이었으나 그날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오이카와 만큼 자신과 비슷한 처지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인정해야 했다. 오이카와도, 이와이즈미 자신도. 가장 많은 권력과 위치에 서서 외로움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달릴수록 곤두박질칠 뿐이던 고독함에서 처음으로 동반자를 만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던 눈빛은 붉었다. 그 안에 비치던 제 눈동자는 검은색이었으나 담긴 감정들은 똑같았다. 그날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다른 동족(同族)을 만난 것이다. 세상에 단 둘만이 존재하는 종()이었다. 그들만이 정한 새로운 종이었다. 모순적이게도 가장 깊은 외로움 사이에서 누군가를 만났다. 그 후 약속이나 한 듯 그 손을 잡은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러니 이제와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을 잡으라는 것이 이와이즈미에게 있어 얼마나 기가 찬 제안이겠는가. 과연 이와이즈미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오이카와를 제외하고 존재하겠는가. 이와이즈미는 그 생각을 하면 할수록 갑갑했다. 왕과 적()의 이름이 뭐라고 그와 제 사이를 쉽게 공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드디어 안정된 나라의 젊은 왕이 그랬다간 애써 잠재운 나라가 다시 벌컥 뒤집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더 이상 마냥 피할 수도 없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계속해서 혼사를 미루는 것 자체가 논란의 여지를 자꾸만 심어주는 일이었다.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듯이 저를 배척하는 이들은 3년 전부터 꾸준하게 혼사 이야기를 걸고넘어지는 와중이었다. 3년을 갖가지 핑계로 버텨온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작년부터는 언급의 빈도와 압박의 정도가 심해졌다. 이와이즈미가 제 옆에서 발장난을 치고 있는 오이카와를 향해 물었다.


오이카와.”

?”

……내가 황후를 들인다면 어떨 거 같아?”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기습 질문에 그를 쳐다보았다. 솔직한 심정으로 오이카와가 아주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눈치 빠른 그가 몰랐을 리 없다. 이와이즈미의 혼사에 대한 이야기야 이 좁아터진 궁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시끄러운 주제였다. 오이카와는 올 것이 왔구나 싶은 표정을 지어보이다 곧 짧은 발재간을 마저 부리고 입을 열었다. 계속해서 생각해온 상황이었기에 생각보다 덤덤할 수 있었다.


괜찮은데? 샘은 좀 나겠지만.”


오이카와는 입을 여는 동안 멈추었던 발재간을 처음과 같은 순서로 다시 부리기 시작했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청()색 이불을 만지작거리며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연설과 같은 말들은 누군가 알려준 것처럼 술술 나왔으나 유독 오이카와와 대화를 할 때면 해야 할 말의 갈피가 잡히지 않는 순간들이 있었다. 지금이 그렇게 느껴졌다. 그럴 때면 항상 오이카와가 먼저 입을 열기 일쑤였다. 선수를 가로채인 이와이즈미는 어정쩡하게 벌렸던 입술을 다시 다물었다.


이와쨩이 혼사를 치르고 나면 혼자 남는 걸까나.”

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지만 이와쨩이 황후를 들인 다음 내버려둘 성격도 아니잖아.”


정곡이었다. 이와이즈미는 잘못을 들킨 어린 아이처럼 변명조차 내뱉지 못했다. 이미 살짝 갈라진 입술 껍질 사이로 침을 바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입술이 건조했다. 침이 지나친 자리들은 잠깐 젖어들었을 뿐이지 얼마 지나지 않아 더욱 극심한 갈증을 일으켰다.


그때가 되면 나도 동족을 만나볼까?”

너희 부모처럼?”

그래. 같은 적()과 혀를 섞으면 기분도 훨씬 좋다던데.”

자존심 상하는 소리네.”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의 발언에 웃었다. 맞아. 너보다 기분 좋을 수는 없을 걸. 이어지는 순순한 인정에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의 팔뚝을 잡았다. “나도 괜찮아.” 이어지는 목소리에 오이카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이카와는 완전히 이와이즈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팔뚝을 잡은 채로 고개를 가까이 했다. 오이카와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꺾어졌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방안을 메우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이카와의 몸이 뒤로 기울었다. 이와이즈미가 그 위로 몸을 겹쳐 올렸다. 오이카와는 숨을 고르고 싶다는 듯 이와이즈미의 어깨를 살짝 밀어냈다. 이와이즈미는 그의 턱 위로 집요하게 입술을 맞추며 틈을 주었다.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의 동그란 뒤통수를 쓸어내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사실 안 괜찮을 것 같아.” 이번엔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의 발언에 웃었다. “나도 그래.” 그것이 어린 발언인 줄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나라를 책임지는 통솔자를 떠나 지금만큼은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다. 이와이즈미가 가장 이와이즈미다워지는 시간에서조차 거짓말을 하긴 힘들었다. 오이카와가 숨을 다 쉬었다는 듯 먼저 이와이즈미의 입술을 찾아들었다. 건조했던 입술이 채워졌다.




전하.”

후계 문제라면 양자를 들이면 되는 일이다. 당분간 이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말도록 하여라.”

말도 안 되는 말씀이십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의 상황이.”

그대는 내가 혼사를 치르지 않는다고 정치를 못하게 될 것 같소?”

그런 뜻이 아니옵고,”

혼사를 한 후 그 즐거움에 빠져 나라를 돌보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보다는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만. 대신들의 의견이 다르다면 좀 더 나를 설득시킬 수 있는 이유를 가지고 오도록 하시오.”


이와이즈미는 단호한 목소리를 뱉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펄럭거리는 소매 끝이 오늘따라 유독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이와이즈미가 자리에서 이탈한 후 남은 신하들은 기다렸다는 듯 웅성거리기 바빴다. 이와이즈미의 측근에 있는 신하들이 따라 자리를 비우자 뜨겁던 솥뚜껑이 열린 것처럼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곳곳에서 폭주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황후의 자리를 비워둘 생각이신 거지?”

말도 안 되는 소리일세. 나라의 비()가 없다니.”

도는 소문이 헛소문이 아니었다는 건가?”

소문이라니.”

전하께서 적()…….”


소문은 빠르게 흘러간다. 대부분의 소문은 설마. 그럴 리가. 하는 의심에서부터 출발한다. 의심과 동시에 가장 큰 신빙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쥔 열쇠가 거대하다면 더욱이 쉽다. 한 신하의 말에 모두가 아닐 것이라 부정을 하면서도 그럴지 모른다는 마음을 품었다. 저들끼리 정한 이와이즈미의 황후 후보로 거론되던 집안에선 더더욱 그 가설을 믿었다. 신뢰는 더디나 의심은 간편하다. 불만을 가진 그들 사이에서 적대의 감정이 흘러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본디 비난이란 그랬다. 대상이 같았으니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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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오이] KARMA(카르마) 0  (0) 2017.01.18

FHQ / 전생파트



이와이즈미의 말대로 신뢰(信賴)라는 것은 무작정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그리고 운에 따라 알맞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저 세 가지 중 하나만 맞지 않아도 계약은 성사되기 어렵다. 그러니 신뢰라는 것은 정당한 지불 이후에야 겨우 가능성이라는 것이 생기는 아주 까다로운 명사였다. 그렇다고 그것이 가능성이 생기거나 혹은 운 좋게 전부 얻어진다고 해도 유지가 쉬운 것은 아니었다. 생성만큼이나 힘든 것이 바로 신뢰의 유지였다. 아무리 많은 공을 들인 탑도 벽돌 하나를 빼는 순간 와르르 무너지기 십상이다. 사람의 마음이라고 다른 것은 아니었다. 더하면 더했지 더 쉽진 않았다. 아무리 많은 신뢰와 장면을 쌓아 와도 의심이 가는 행동을 하는 순간 모든 것은 허무로 돌아간다. 이처럼 신뢰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힘든 존재임이 분명했다. 그러니 무한하고 영원한 신뢰란 얼마나 꿈같고 대단한 것인가. 살아가면서 스스로가 믿고 상대도 인정할 수 있는 무한하고 영원한 신뢰라는 것은 과연 실존하기는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도대체 그 무기한을 얻을 수 있는 대가란 얼마나 거대한 것인가. 대부분이 이러한 질문을 던졌을 때, “글쎄. 목숨이라도 걸어야 하지 않을까?” 라고 대답할 것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답이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은 맞으나 정말로 걸 필요는 없었다. 만약이라는 단어가 가진 힘은 참으로 크다. “만약 이로 인해 죽을 수 있다고 해도.”, “만약 이 행동으로 인하여 큰 재앙이 몰려온다 해도.” 딱 이 정도의 만약을 남겨둔 상태에서 행동하는 정도면 족하다. 기실 사람은 일어난 일보다 상상이 더욱 큰 법이다. 현실은 어느 정도의 끝이 있지만 상상엔 끝이 없다. 당장 죽음에 대한 상상으로 온갖 재난과 고통과 수모, 고문 끝의 타살을 생각해도 현실에서 보통 사람이 그렇게 죽기는 힘든 것처럼 말이다. 누구든 상상으로는 이어진 핏방울에서 버짐이 피어나고 진물이 흐르고 핏줄이 터지는 근육이 팽창하는 상상을 할 수 있다. 현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인데도. 대부분이 그러한 만약의 상상을 걱정하여 의심스러운 행동은 하지 않게 된다.


그러니 딱 그 정도의 만약만 부순다면 이미 어느 정도의 탄탄한 신뢰를 구축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그것이 살면서 단 한 번 신뢰의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는 오이카와 토오루에게라면 더더욱 그랬다. 오이카와에게 있어 이와이즈미란 그 순간부터 만약을 깨부순 최초의 존재가 된 것이다. 오이카와는 피가 새어나오는 붕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잘 아물어가던 상처가 다시 엉망이 되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그의 몸에 흉터가 지게 생겼다. 그러나 그것이 화가 나거나 슬프지는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물론 이와 같은 사건이 있었다고 해서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가 약속한 듯 운명적인 만남을 자주하고 갑작스러운 연정(戀情)이 몰아칠 리는 없었다. 처음이란 모두 약간의 변화로 시작된다. 둘은 마주치는 눈을 구태여 빠르게 피하지 않는 법을 배웠고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방식을 터득했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는 데에 무리는 없었다. 오히려 배움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면 느끼고 있다고 할 만큼 그들은 서로에 대한 배움을 게을리 할 때가 없었다. 그러기엔 전혀 다른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 굉장했다. 지금까지 어떻게 전부 눌러 참아왔나 싶을 정도로.


그러니까. 도롱뇽은 안 먹는다고?”

그걸 어떻게 먹어, 징그럽게.”

근데 왜 자꾸 상에 올리라는 거야.”

아니. 그냥 다들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아서.”


어쩐지 평범한 음식들만 먹으려 들면 의아해하더라고. 오이카와의 덧붙임에 이와이즈미가 우습다는 목소리를 냈다. “당장 내일부터는 올리지 말라고 하마.” 말하는 목소리가 제법 단호했다. “그래. 걔네도 요즘 찾기 힘들다고 하긴 했어.” 이어지는 오이카와의 나긋함을 뒤로 이와이즈미가 읽고 있던 책에서 시선을 떼었다. 그가 들고 있던 건 왕실의 역사 따위가 지긋하게 적힌 책이었다. 누렇게 색이 바랜 책에서 시선을 돌리자 이제 막 꽃봉오리가 진 들꽃이 여기저기서 넘실거렸다. 예전, 오이카와의 부모가 원하여 만들어진 정원은 현재 둘의 휴식 장소였다. 때로는 이와이즈미 혼자 그곳을 방문했고 때로는 오이카와 혼자 그곳을 방문했다. 오늘처럼 마음이 맞은 날이면 함께 진을 치고 잠시나마 평화로움을 만끽하는 장소였다. 오이카와는 조심스럽게 연못에 발을 집어넣으며 발장난을 쳐댔고 이와이즈미는 그 옆에 앉아 일정한 속도로 하품을 찍찍 내뱉으며 책을 읽고 있었다. 정원의 정자는 두 사람이 들어가고도 한 사람이 더 들어올 수 있을 정도의 크기가 있었기에 둘의 거리가 아주 가까운 것은 아니었다. 적당한 거리감. 그리고 적당한 고요함이 공존하는 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부터 어쩐지 다들 바쁜 것 같던데.”

. 연회 준비가 있어서.”

연회? 무슨 연회.”

있어. 쓸데없이 거추장스러운 날 같은 거.”


그 말을 끝으로 이와이즈미가 다시 하품을 뱉었다. 오이카와도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왕궁 내에는 워낙 자잘한 것부터 큼직한 것까지 여러 행사가 잦았다. 오이카와 역시 이와이즈미의 대답을 들었을 때 그 중 하나일 것이라고 유추했다. 말하기가 무섭게 어린 궁녀 한 명이 여러 가지 연회에 필요한 비단들을 품에 안은 채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까닥하면 넘어질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 뒤 오이카와가 그 연회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아니다. 대략 사흘이 지난 후였다. 사흘째가 된 아침, 자신을 돌보는 시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연회의 주제에 대해 말했다. 연회의 이유를 들은 뒤 오이카와의 반응은 잠깐의 침묵, 잠깐의 놀람, 잠깐의 서운함, 그리고 잠깐의 이해. 오이카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시녀는 의복을 준비하겠다는 말을 던진 후 멀어졌고 오이카와는 얌전히 그녀의 재등장을 기다렸다. 곧 그녀가 녹색 의복을 가져왔다.


연회는 생각보다 더욱 거대했고 생각보다 더욱 요란했다. 갖가지 소음들은 물론이요 온 거리는 술과 음악에 매료되어 평소보다 몇 십 배의 크기로 소란스러웠다. 굳이 거리로 나오지 않았어도 왕궁에서 그 모습을 훤히 다 볼 수 있을 것 같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관례(慣例)란 대부분 알아도 행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이기에 지금 오이카와는 별 투정 없이 가마 안에 앉아있었다. 살짝 흔들리는 느낌이 은근한 어지러움을 유발하는 듯 했으나 그것도 익숙해지자 잠잠해졌다. 오이카와는 자신과 똑같은 크기지만 색이 전혀 다른 제 앞의 가마를 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당연한 말이지만 투시를 할 수 없으니 가마 안의 풍경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지루한 시간이었다. 책이라도 한 권 가지고 나올 걸. 오이카와는 시시한 후회를 내던지며 턱을 괴었다. 나라는 평화로웠다. 이 나라를 처음 방문해본 이도 알 수 있을 법한 사실이었다. 제가 적()의 자리에 앉기 전 부모가 살았던 당시의 이곳을 생각해보면 천차만별이었다. 새삼 이와이즈미가 얼마나 타고난 군주인지 깨달을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없던 존경심이 갑작스레 솟아나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오히려 의문이 들었다면 의문이 들었다. 왜 자신의 가족도 아닌 사람들에게 이토록 신경을 쓰는 것이지? 귀찮은 관계가 싫은 오이카와에겐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오이카와는 언젠가의 이와이즈미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하품을 뱉었다. 벌써 나라의 반을 돌았다. 애초에 그다지 거대한 나라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둘러보면 볼수록 좁다고 느껴졌다. 다 비슷비슷한 풍경, 더 비슷비슷한 사람들, 행렬 하나로 꽉 찬 거리, 등등. 오이카와는 그것에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안심했다. 작고 얌전한 나라. 이토록 자신에게 걸 맞춰진 나라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니 이러한 이유로 다시 한 번 평화의 유지에 큰 일조를 해주고 있는 누군가를 향한 감사를 괜스레 읊조리는 것이다. 오이카와 본인은 아닌 척 했지만 기실 장황한 핑계였다.


연회의 모든 관례는 밤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조례와 행렬을 끝내고나자 하늘엔 이미 짙은 어둠이 찾아왔고 그 뒤 쏟아지는 관료들의 축하 인사 따위를 일일이 상대해주다보니 드디어 쉴 수 있구나 느낀 것은 거의 자정 직전이었다. 이와이즈미는 하루 종일 나름의 미소를 짓느라 내내 경련을 일으켰던 안면 근육을 풀어주며 한숨을 쉬었다. 아마 이와이즈미의 인생에서 가장 많이 감축 드린다는 말을 들은 하루로 기록될 것이 분명했다. 그에게 있어 오늘은 그 정도의 가치에 불과했다. 그는 과연 자신이 역사 속에 기록되기를 바라는지, 혹은 역사가 누군가를 기록하기 위해 자신을 선택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고민을 해대며 발걸음을 옮겼다. 피곤함의 깊이로 보아 당장 침실로 돌아가야 했음이 맞는데도 무의식중에 저가 찾은 곳은 침실이 아닌 궁 안의 정원이었다. 이와이즈미가 평소에 비해 유난히 발끝을 질질 끌며 그곳으로 향했다.


어라. 왔네.”

뭐 하냐.”

그냥. 탄신일 축하해. 전하.”

그런 건방진 인사는 처음 받아보는데.”


이와이즈미가 어깨를 털며 웃어보였다. 꽤 밍밍한 웃음이었다. 오이카와는 늘 그렇듯 정원 안의 연못에 발을 집어넣은 채 이와이즈미에게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이와이즈미는 곧 오이카와의 옆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딱딱한 나무 바닥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어디든 엉덩이를 붙이니 그제야 조금 살 것 같은 기분이 그를 관통했다. 하루 종일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던 무릎이 왜 이제야 자신을 내버려 두는 것이냐며 원망하듯 그 짧은 움직임에도 꽤 단호한 뼈 소리를 내보였다. 오이카와는 발가락을 움직여 짧은 물장구를 쳤다. 시원하게 찰싹거린다고 하기엔 영 힘도 크기도 없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울었다. 오이카와는 무언가 고민을 하는 사람처럼 턱에 호두를 만들어 보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와이즈미는 평소보다 더 구부린 허리로 고개만 돌려 오이카와를 쳐다보았다. 오이카와가 물었다.


연회는 어땠어?”

피곤했다. 정신도 없었고 재미도 없었고.”


떨어지는 대답이 빠르고 간결했다. 그의 말에 오이카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와이즈미는 뭘 그런 것을 묻느냐는 얼굴로 작은 콧김을 내뱉었다. 오이카와에게 한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연회는 당최 누구의 탄신을 축하하는 것인지 모를 만큼 이와이즈미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만의 축제였다. 정작 연회를 벌이게 된 이유의 중심에 있는 이와이즈미는 오히려 늘어난 일거리에 골머리를 앓았고 억지로 인자한 척 지어보이던 미소 때문에 입가엔 몇 번이고 경련이 일어나야 했다. 이와이즈미에겐 그 모든 것이 그저 피곤한 행사에 지나지 않았다. 딱히 이렇다 할 보람도, 신나는 기분도 뜻밖의 호기심과 사건이 있지도 않은 어정쩡한 하루였다. 하긴. 원래 이와이즈미는 제 생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좋아하기는커녕 만약 자신이 엄청난 권력을 쥐게 되어 달력에서 하루를 뺄 수 있다면 주저 없이 610일을 빼고 싶은 심정이었다. 작년 이와이즈미는 611일에 왕의 자리에 올랐다. 제 생일이 끝난 뒤 하루가 지난 후였다. 정확하게는 약 2시간이 흐른 뒤였다. 어떻게 보면 거창하고 거대한 생일선물과 같은 자리였으나 그에겐 전혀 그렇지 못했다. 이와이즈미에게 있어 그날의 감정들 중 기쁨은 없었다.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드디어 나라에 새 바람이 분다며 술잔을 들고 휘파람을 불었지만 꼭 자신만큼은 아니었다.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필시 그에게 생일이라는 날은 그날을 기점으로 늘 이질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만큼의 시간이 흘렀음을 제게 명명백백히 보여주면서 떨떠름한 기분만을 안겨주는 날이었다.


네 생일은 언젠데.”


이와이즈미는 조금 재빠르게 오이카와에게 질문했다. 분명 그 질문은 그러한 생각들로부터의 도피였다. 이와이즈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오이카와는 고민하는 듯 했다. 갈색 눈알을 옆으로 살짝 굴렸다가 원위치한 그는 이번엔 짧은 콧소리를 냈다. 고작 제 생일 날짜를 말하는 것치고는 뜸을 들이는 것이 길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연 쪽은 또다시 이와이즈미였다. 그는 답답한 것을 참을 수 없는 성격이었다.


언제냐고.”

알아서 뭐하게? 연회라도 열어주려고?”

하고 싶으면 하던가. 아무도 반대 안할걸.”

못하는 거겠지. 다들 웃고 있어도 정말 축하하는 것도 아닐걸?”

오늘도 마찬가지야.”

아닐 텐데.”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말싸움이었다. 이와이즈미가 습관처럼 인상을 찌푸렸고 오이카와는 그 모습을 보며 자세를 바꿨다. 손을 뒤로한 채 몸을 지탱한 오이카와는 고개를 꺾어 위를 쳐다보았다. 정자 때문에 하늘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고목의 무늬가 보였다. 오랜 세월을 걸쳐 스스로 만들어낸 불규칙한 무늬였다. 얼핏 바라보면 사람의 손금과도 비슷해보였다. 오이카와는 그 무늬의 줄을 세어보며 입을 열었다. 이상하게도 이와이즈미의 앞에 있으면 아이 같은 소리가 자꾸만 튀어나왔다. 겨우 피를 맞댄 것만으로 이만큼 입을 열고 있자니 새삼 자신이 쉽게만 느껴졌다.


우리한테 생일은 별로 필요 없어. 대부분 다 잊어버리고 기억도 안 한다고. 우리 부모님도 그랬어.”


오이카와는 이제 열아홉의 여름을 맞이했지만 그에게 허용된 시간은 그것의 곱절을 하고도 한참이 남는다. 얼마나 긴 시간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1000년이라는 시간은 그랬다. 일천년의 크기는 까마득하게 멀었다. 그 긴 허용의 시간 동안 태어난 하루가 무뎌지는 것은 당연했다. 어딘가에 표시해두지 않으면 제가 태어난 날도 잊어가는 것이 자신들이었다. 오이카와의 부모 역시 예외는 아니었으며 오이카와가 읽어왔던 책 속의 인물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남의 생일은 고사하고 자신의 생일조차 잊는다. 기억을 하고 있는 이들이 간혹 존재하기는 했으나 그마저도 리프를 하게 된 다음이면 잊기 일쑤였다. 다시 태어난 삶에서 이 전 삶의 생일은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태어난 날이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이고 반복할 수 있는 평범한 날이었다.


그냥 말하라고 물어봐줬을 때 말해라.”


그러나 그 삶을 알 수 없는 이와이즈미의 입장에선 같잖은 청승에 불과했다. 이와이즈미는 자신과 같은 나이이면서 세상이라도 초월해 존재하는 것 같은 모습을 싫어했다. 비록 이들이 영원을 산다고 하지마는. 이와이즈미는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었다. 그 사실을 오이카와가 아직 절감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와이즈미도 다를 바 없기 때문이었다. 저와 같은 나이인 오이카와가 지금 자신이 디디고 있는 땅이 허물어져 없어질 때까지 평생 살아갈 것이라고 대뜸 믿어지지가 않는 것이었다.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가 절대로 같아질 수 없는 부분에서 나타나는 입장 차이였다.


아마 적()과 평범한 이들이 완벽히 섞일 수 없는 이유도 시작은 이처럼 잔잔한 차이일 것이다. 이미 이 작은 주제에서부터 맞는 것이 없었다. 두 가지의 종()은 단순히 생일을 기억하는가 안 하는가에서 부터 시작하여 죽음은 두려운가 아닌가를 향해 나아간다.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처럼 올곧은 평행선도 없을 것이다. 오이카와는 그 차이의 시작을 실감했다. 그즈음 이와이즈미가 성대를 움직였다. 피곤함이 듬뿍 묻어나는 것과 다르게 입은 쉴 새 없이 꿈틀거렸다. 그건 제 입장에 대한 정리였다. 더 이상 토를 달면 주먹이라도 날아올 것 같은 단호한 정리였다.


()은 불로불사(不老不死)의 몸이라지만 뭐든 태어난 순간은 있을 거 아냐. 네가 평생을 살든 말든 나는 해봐야 50년 정도가 지나면 죽을 텐데 50년 동안 네 생일 하나를 더 기억 못할 만큼 나쁜 머리는 아니다.”


글쎄. 흔히들 말하는 영원(永遠)의 길이는 어느 정도로 잡아야 하는 걸까. 애초에 영원이라는 말 자체가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라고는 한다지만 모든 것이 무()가 된 이후의 시간 이래봤자 쓸모가 없을 터이니 대충 세상에 살아있는 생물이 남아 있는 날까지 정도로 기준을 잡아보자고. 간단하게, 디디고 있는 땅과 올려보고 있는 하늘이 각각 꺼지고 무너져 거짓말처럼 세상이 끝나는 순간까지를 영원이라고 칭해보자. 세상의 시작과 끝까지를 영원이라고 한다면 혹 영원은 내일까지일 수도 있다. 갑작스럽게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면 그것으로 영원한 순환의 종지부가 찍히는 것이니 말이다. 그럼 단언컨대 일천년의 시간도 부질없어질 것이다. 그 후로는 무()의 영원이 전부다. 일천년의 시간은커녕 채 50년의 세월도 쓰지 못하고 끝나버릴 수 있다. 세상의 영원이라는 것은 그렇게나 부질없고 끝을 가늠할 수 없다. 그러니 와 닿지 않는 것이리라. 꼭 제가 일천년을 살 수 있다는 사실처럼.


그렇다면 조금 더 범위를 줄여 살펴보았을 때 개개인에게 있어 영원은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일까. 이 또한 적당한 기준을 세워 대강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라고 잡는다면 한 사람이 가진 영원의 시간은 지극히 짧다. 그러니까 사람의 삶을 영원이라고 하는 대신 평생(平生)이라고 칭하겠지. 그러나 어떻게 보면 그 평생이야 말로 절대적인 영원일 것이다. 나이가 들고 수명이 다 해 죽어버리고 또다시 태어나고를 반복한다고 해도 결국 모든 삶이 끝날 때마다 그 사람의 잔해는 여전히 지속되는 세상을 떠돈다. 극단적으로 오이카와가 지금 바로 리프를 택하고 죽어버린 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지금의 삶을 살았던 오이카와는 죽은 채 영원을 떠다니는 것으로 남겨진다. 지금의 오이카와는 죽어도 이 시간에 갇혀 이 세상이 끝나는 순간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어찌 되었건 죽어버린다면 다시 오지 않을 생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언제야?”


그런데 이와이즈미는 제 평생 동안 오이카와의 생일을 기억해주겠노라 말했다. 생각해본 적 없는 제안이었다. 거창하게 따진다면 누군가의 영원 속으로 발걸음을 하는 것이었다. 후에 50년이라는 시간이 더 지난 뒤 이와이즈미가 죽고 그의 시간이 멈춘다면, 그리고 그가 그때까지 오이카와의 존재와 생일을 기억한 채 눈을 감는다면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에게 영원히 기억되는 것이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 영원히. 영원히 남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영원히 남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저조차 언젠가 잊어버릴 그날을 이와이즈미가 대신 영원히 기억해주는 것이다.


……720.”

한 달 뒤네.”


소리 내어 생일을 밝혀보는 것이 얼마만인가. 아니. 처음인 듯 했다. 오이카와에게 쓸모없던 생일이라는 날이 이와이즈미에게 날짜를 밝힘으로서 의미를 되찾았다. 50년간은 적()들 중 거의 유일무이하게 생일이 기억되는 존재로 남을 것이라 생각하자 오묘하기 그지없었다. 두 가지의 종()은 단순히 생일을 기억하는가 안 하는가에서 부터 시작하여 죽음은 두려운가 아닌가를 향해 나아간다.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처럼 올곧은 평행선도 없을 것이다. 물론 역사 속에선 간혹 둘의 간극을 이해해보려 한 인물들도 당연히 있었다. 맞지 않는 가치관을 어떻게든 이해하고 조정하고 배려했다. 대부분 끝에 가서 더 큰 파멸을 막지 못하는 불상사가 있었으나 분명히 존재는 했다. 꾸준히 존재했다. 어째서 그 위험을 감수하고? 그거야 그것이 그들의 새로운 가치였으니까. 그렇다면 이 시간에서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는…….


. 720일이야. 이와쨩.”


오이카와가 웃었다. 이와이즈미는 그 실없는 웃음과 호칭을 들으며 기가 차다는 듯 따라 웃어보였다. 정확한 의미가 없는 웃음이었다. 이와이즈미의 열아홉 생일은 그렇게 완전히 갔다. 일 년에 하루밖에 없는 날이라지만 그 어떤 날도 일 년 중 반복되는 하루는 없었으니 전혀 아쉽지 않았다. 열아홉의 처음이자 마지막 610일이 갔다. 아마 내일은 열아홉의 처음이자 마지막의 611일이 올 것이다. 생각하니 단지 배가 고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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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HQ /  전생파트



비록 앞선 소개로 오이카와가 돌연변이 속의 돌연변이라고는 하나 그것이 그의 고유한 속성을 부정하는 말이 될 수는 없다. 그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어찌 되었든 평범한 자들에겐 그의 종족 자체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사람들은 오이카와가 자신들을 건들지 않는다.’ 라는 사실보다는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 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렇다고 그러한 점들을 탓할 수도 없는 것이 오이카와처럼 선량하다 돌아선 작자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다수가 그렇다면 그와 비슷한 소수까지 의심을 받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은 의심이 억울하면서도 스스로가 그런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별다른 불평을 하지는 않았다. 변명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어쩐지 자신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오이카와는 종종 이것이 정말 사람들 틈에 녹아들어 생활하고 있는 것일까 의문을 가질 때가 있었다. 자신의 선대들은 자랑스럽게 평범한 이들의 생활 속에 녹아들었다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녹아들었다는 표현보다는 억지로 파고들어 자리를 쳤다는 게 맞는 문장인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무렴. 결론적으로 오이카와가 어떤 행동을 하든 오이카와를 바라보는 시선들의 근본적 경계는 변하지 않았다. 당장 오이카와가 위급한 환자들을 순식간에 치료해주지만 그 감사함도 잠시였다. 목숨을 위협하던 상처가 씻은 듯 사라지고 나면 그들은 하나 같이 감탄과 두려움을 한데 뒤섞은 표정을 한 채 줄행랑을 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오이카와는 인간에 가까운 존재였으나 결코 완전한 인간은 될 수 없었으니 그 사실을 조금이라도 티 낼 때마다 경악스러운 시선을 마주하게 되는 것은 막을 도리가 없었다. 오이카와가 할 이유 없는 해명을 할 인물도 아니었으니 자연스럽게 그것의 반복이었다.


어차피 어떤 행동을 하던 자신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오이카와는 아주 오래전 그 사실을 통감했고 그 후로 더 이상 그 부분에 대해 노력 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는 인물은 없었다. 대부분 자신에게 보여 오던 선택지들을 그대로 따라갔고 틀을 벗어나는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오이카와에게 있어서 혐오의 감정은 우스운 것이었다. 자신을 얼마나 혐오하든 대놓고 표출하던 사람은 없었으니까. 애당초 혐오를 떠나서 자신에게 사사로운 감정을 표출하는 사람이 없었다. 분명.


뭘 봐.’


그러니 단언컨대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가 처음 만나보는 부류의 사람이라는 소리였다. 생전 처음 보는 종족(種族)도 아니고 처음 보는 부류(部類)의 사람 말이다. 정해진 틀의 가장자리를 깨부수고 멋대로 뻗친 듯 거슬리는. 오이카와는 기가 차다는 표정을 한 채 고개를 돌렸다. 그는 첫인상이라거나 들려오는 소문과는 여러모로 다른 사람이었다. 경계가 잔뜩 서려 있던 그날은 단순히 피곤함에 의한 경고였을 뿐이었던 건지 평소 이와이즈미의 눈은 김이 빠질 정도로 평범했다. 굳이 오이카와 자신이 먼저 찾지 않는다면 저를 찾아오는 일도 적었으며 간혹 마주칠 때에도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오이카와에게 두려움을 가지지도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다. 기실 오이카와에게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와이즈미는 한 나라의 통치자로서 정치를 잘 하고 평판이 좋은 인물임이 틀림없었으나 누구에게도 일정한 양 이상의 관심을 가지는 법이 없었다. 적당한 관심과 적당한 자비, 적당한 단호함이 고루 섞여 있는 사람이었다.


그 후로 7개월이 지났다. 반년을 겨우 넘긴 시간이었지만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는 열여덟에서 열아홉이 되었다. 2번의 계절이 지나가고 3번째 계절이 다가오는 길이의 시간이었다. 또한 그 2번의 계절이 넘는 시간 동안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의 관계는 한 번도 이렇다 할 변화를 맞이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둘 다 서로 사이의 변화를 추구하지도 않았으며 아쉬워하는 일도 없었다. 때때로 대외적으로 마주치는 것을 제외하고는 만남의 횟수조차 턱없이 적었다. 둘이 가졌던 첫 만남에서 곧 둘의 사이에 싸움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다른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그들의 7개월은 몹시 편안했고 안정적이었다.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음에 틀림없다. 오히려 아마 그 7개월이 그들의 인생 중 가장 평온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서로가 제대로 엮이기 전의 시간이란 그랬다. 이와이즈미는 평생을 역사 속에서 위대한 성군(聖君)으로 남았을지 모르고 오이카와는 꾸준하게 제 몫의 1000년을 채우고 눈을 감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들이 영원히 각자의 평온을 보냈더라면 이야기는 시작조차 되지 않았을 터이다.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가 막 2번째 계절이 끝나갈 무렵 짧은 전쟁이 있었다. 당연히 오이카와와 같은 존재가 있는 나라였다. 전쟁은 약 50일간 반복되었으며 마침내 종결될 즈음 상대 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오이카와는 저와 같은 존재의 이방인에게 칼을 꽂으며 짧은 묵념을 건넸다. 심장을 관통한 칼끝은 흉할 만큼 많은 양의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종종 존재하는 서열의 확립이었다.


어떠한 특출 난 무리 속에서도 서열이라는 것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먹이사슬을 완벽하게 피해가는 종은 없다. 설사 피라미드의 가장 꼭대기에 위치하는 생물들 역시 그 안에서 또다시 피라미드를 쌓는 것이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삶의 법칙과 같았다. 그리고 오이카와는 운 좋게 매번 그 법칙에서 살아남았다. 비록 가지고 있는 힘이 공격보다는 방어에 가까웠고 그것으로 동족에게 당한 상처를 치료할 수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번번이 그 법칙에서 승리했다. 오이카와는 영리했고 또 민첩했다. 그는 부정할 수 없는 피라미드의 피라미드. 그 꼭대기에 서 있는 존재였다. 그리고 피라미드 가장 위의 계층이 이러한 서열의 재확인을 할 때마다 죽어나가는 것은 당연하게도 그 아래 계층들이었다. 50일 정도가 소모된 전쟁이었다. 규모와 길이를 떠나 꽤 많은 병사가 피를 흘리게 된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었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굴레였다. 오이카와는 한숨을 쉬었다. 또다시 문을 두드리는 시녀의 소리가 들렸다.


복부의 오른쪽 아래쪽에 약지길이만큼의 찔린 상처가 있습니다. 위치가 위치인 지라…….”


오이카와가 시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의 복부로 손을 가져갔다. 남자가 숨을 몰아쉴 때마다 울컥거리며 피를 내뿜던 상처는 그의 손이 닿는 순간 씻은 듯이 아물어갔다. 나름대로 죽음의 문턱까지 달려갔던 것치고는 시시한 귀환이 아닐 수 없었다. 오이카와가 손을 뗐다. 제 손바닥에 그새 엉겨 붙은 피를 닦아내던 그가 남자를 쳐다보았다. 한 순간 상처가 사라진 남자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연신 내뱉었다. 그리곤 무언가를 잘못한 사람처럼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이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벌써 20번째 반복되는 상황이었다. 매번 제가 대신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이던 시녀도 이날은 덤덤했다. “다음은.” 오이카와가 짧게 물었다. 시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뒤이어 아직 다섯이 남아있다고 말을 이었다. 오이카와는 피곤함을 느꼈다. 며칠째 계속되는 일정인지 숫자를 세려다 포기했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의욕이 더욱 꺾이기 때문이었다. 문이 열렸다. 다른 인물이 새로운 상처를 가지고 나타났다. 죽음에 한껏 움츠러든 표정이었다. 상처 위로 새로운 피가 보였다. 색은 비슷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능력은 참 좋네.”

이제 알았어?”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 각자의 일정들이 대충 정리가 되고 둘이 다시 만난 것은 꼬박 이틀이 지난 후였다. 오이카와는 갑작스럽게 뒤에서 들리는 이와이즈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가 허리를 돌리자 앉아있던 침구가 살짝 흔들렸다. ()색이 은은한 이불 끝이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애매한 경계를 유지했다. 온통 붉은 색으로 도배한 침구를 보고 오이카와가 바꾸어 달라 했던 색이었다. 오이카와는 괜스레 쓸데없이 침구 군데군데 붙어있는 황금빛 장신구들을 만지작거렸다. 이와이즈미는 불쑥 예의도 없이 찾아온 주제에 당당한 표정으로 오이카와를 마주했다. 먼저 입을 연 쪽은 오이카와였다. 오이카와는 이틀간 거의 150명의 상처를 치료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자란 능력이라지만 피곤함이 없을 리 없었다.


피곤한데 뭐야.”

들은 게 있어서. 나도 별로 오고 싶진 않았다.”


단호하게 말하는 목소리가 꽤 단단했다. 오이카와는 용건이 무엇이냐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으나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표정을 본 채 만 채 아무 말 없이 그에게로 다가섰다.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의 옆에 앉았다. 다시 한 번 청()색이 은은한 이불이 출렁거렸다. 오이카와는 떨떠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와이즈미가 여전히 오이카와의 시선은 상관하지 않고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오이카와가 입고 있는 검은색 의복의 옆구리 부분을 움켜쥐었다. 끈으로 묶여 있던 부근이 그의 힘으로 인해 풀리며 속살을 내비췄다. 놀란 오이카와가 무어라 소리를 내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미 속살을 전부 보인 후에야 오이카와가 몸을 뒤로 뺐다. 그마저도 전부 물러나지는 못했다. 이와이즈미가 혀를 찼다. 손가락으로 의복 사이의 한 부분을 눌렀다. 오이카와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까지 벌어진 상처 틈이 아렸다. 익숙하지 못한 고통이었다.


네 시녀가 다친 것 같다고 알려줘서 말이야.”

용케도 눈치 챘네.”

스스로 치료할 수 있지 않나?”

동족한테 당한 건 나도 어쩔 수 없어.”


앞서 살짝 언급했듯 오이카와의 능력은 출중하지만 동족의 손을 탄 부분이라면 얘기가 조금 달랐다. 치료를 아주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속도가 더뎠다. 이번처럼 생각보다 상처의 깊이가 있다면 더더욱 속도가 느렸다. 오이카와는 제 약점을 들킨 사람처럼 재빠른 손놀림으로 옷을 여미며 말했다. 다른 이에게 제 허점을 보이는 건 언제나 꺼려지는 일이었다. 때문에 생각보다 더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갔다. “겨우 이걸 확인하려고 왕이 직접 행차한 거야?” 오이카와는 비아냥이 잔뜩 묻은 목소리를 이었다. 그럼에도 이와이즈미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할이라는 게 있잖아.” 고민 없는 그의 목소리에 사적인 감정은 전혀 없었다. 오이카와의 위치를 확실시 해주는 말투였다. 새삼 이곳에서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는 이와이즈미밖에 존재하지 않음이 확실해졌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유일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아마 그의 시녀는 그가 다쳤다는 사실을 꽤 오래전에 알았음에도 두려워 말을 걸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두려움이야 늘 마주하는 것인데도 그날따라 오이카와는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이틀의 시간동안 150이 넘는 인간들을 치료했음에도 그녀에게 변화를 줄 수 없었다는 것이 벽을 알려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가 태어날 때부터 저와 같은 존재의 피에 닿는 이들은 병 혹은 악재가 생긴다는 소리가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으나 앞서 말했듯 그러한 소문들에 하나하나 해명과 변명을 해보이자면 끝이 없었다. 과연 변명을 한다고 들어주기나 할까? 오이카와는 입을 여는 순간 오히려 더 시끄러워질 미래를 알았기에 입을 다물었다. 쓸데없는 소문은 나날이 지날수록, 화두에 올릴수록 늘어날 뿐이다. 그러니 늘 엉터리 소문 속에서 제자리걸음이다. 오이카와는 어쩌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무리 많은 이들을 죽음에서 건져 올려도 두려운 돌연변이로 남을 것이다. 동족들 사이에서도 오이카와는 멀리 살고 있는 몇몇을 제외하곤 평화로운 돌연변이로 취급되고 있으니 제대로 속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존재하고 있으나 그 어디에도 분류될 수 없는 자의 외로움이란 그처럼 설명하기 힘들었다. 이와이즈미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붕대를 올려 보낼 테니 두르고 다녀. 조금만 옅은 색의 의복을 입었으면 누구나 알 수 있었을 거다. 다쳤다고 시위하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알아도 말하지 못하잖아. 괜찮아.”


아차. 쓸데없이 감성적인 생각을 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아이 같은 말투가 튀어나가고 말았다. 오이카와는 말하고 나서 곧장 후회했다. 창피함이 밀려와 자리를 피하고 싶었으나 자신의 방이었기에 제가 나가는 것도 우스웠다. 무엇보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행동을 쉽게 예상할 수 없었다. 혹 제가 나갔다 들어왔음에도 그가 방을 지키고 있다면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오이카와는 도저히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는 입을 다무는 것을 선택했다. 당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침묵이 이어졌다. 슬쩍 돌려본 눈동자에서 이와이즈미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차라리 나가주었으면 했으나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오이카와가 그 침묵에 민망한 헛기침을 할 즈음 마침내 이와이즈미가 입을 열었다. “피가 닿으면 악재가 온다고 했던가.” 오이카와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오이카와가 대꾸하기엔 애매한 크기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오이카와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문득 처음 만남에서 눈이 마주쳤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와 같은 듯 전혀 다른 느낌의 마주침이었다. 더더욱 난감한 침묵이 이어졌고 이번엔 이와이즈미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마주치고 있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손을 움직였다. 그는 오이카와가 애써 여몄던 의복을 다시금 풀어헤쳤다. 검은색 의복 위 묶여 있던 녹색 끈이 풀리고 이제 막 끝이 겨우겨우 아물어가는 상처 하나가 재등장했다. 오이카와는 그 동작에 어정쩡한 제 손의 위치를 어찌할 줄 몰라 했다. 끝만 아문 제 상처를 빤히 바라보는 이와이즈미의 생각을 종잡을 수 없었다. 단순한 구경인 것일까. 그 정도까지 생각이 도달한 오이카와가 불쾌한 목소리를 내려고 할 때 돌연 그보다 이와이즈미의 행동이 앞섰다.


잠깐. 뭐하는!”


이와이즈미가 거침없이 오이카와의 상처를 벌렸다. 막 이어 붙어지던 살점이 다시 뜯어지는 소리가 작게 울리고 곧 피가 새어나왔다. 비교적 하얀 피부를 타고 흐르는 핏방울은 얇고 기다란 길을 만들었다. 이와이즈미가 항시 들고 다니는 단도를 빼들었다. 코끼리의 상아로 칼집을 만들고 나라에서 제일가는 대장장이가 10년간 공을 들인 날카로움을 가진 칼날이었다. 그가 꼭 어제 만든 칼처럼 끝이 반짝거리는 단도를 고민 없이 휘둘렀다. 기실 휘두름보다는 스쳤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짧은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피는 흘렀다. 꾸준히 순환 해온 것을 증명하듯 건강한 피가 과즙처럼 터졌다. 이와이즈미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안 그래도 흐르던 핏방울은 그 움직임에 더더욱 많은 양의 피를 쏟았다. 그가 주먹을 쥐었다 펴는 순간 그의 손금을 따라 벌건 길이 몇 갈래로 나뉘었다. 오이카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는 듯해 보이는 얼빠진 표정이었다. 이와이즈미는 피가 묻지 않은 깔끔한 왼손으로 단도를 도로 칼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는 오이카와 쪽으로 제 몸통을 기울였다. 둘이 가진 틈의 사이가 채 두 뼘이 되지 않았을 때 그가 더 이상 몸을 움직이지 않고 오른손만을 뻗었다. 손길이 느렸다. 아마 오이카와가 피하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곧바로 피할 수 있을 만큼의 속도였다. 상처 틈으로 흐르는 핏방울은 다가오는 와중에 허공에서 몇 번이나 흩뿌려졌다. ()색이 흐르고는 있다지만 분명 흰색이 더욱 짙던 이불 위로 선명한 붉음이 새겨졌다. 오이카와가 저도 모르게 침구에 달려있던 황금색 장신구를 손으로 쥐었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 오이카와가 짧게 앓는 소리를 냈다. 앓음보다는 탄식에 가까운 소리였으나 무엇이든 정의는 중요치 않았다. 중요했던 것은 무엇과 무엇이 닿았는지 이리라. 오이카와가 잡고 있던 장신구가 그 순간 끊어졌다. 오이카와의 손에 과도한 힘이 들어간 것이 원인이었다. 그때 오이카와가 평소보다 커진 동공으로 생경한 장면을 두 눈에 담았다. 짙은 갈색의 눈동자 안으로 자극적인 풍경이 들어찼다. 담담한 표정을 지은 것은 이와이즈미 뿐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이와이즈미조차 제가 행한 행동에서 예상하지 못한 미묘한 느낌을 받고 있었으나 애써 담담한 척을 하고 있었다. 오이카와의 상처 위로 이와이즈미의 상처가 맞물렸다. 맞닿은 부위가 뜨거웠다. 이 정도 맞물림으로는 어림도 없겠지만, 오이카와는 문득 피가 섞이고 있다는 기분을 느꼈다. 삶에서 다시 오지 않을 수혈이었다.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몸속으로 낯선 종자가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누군가와 무언가를 함께 해야 한다는 건 쉬우면서도 어렵지.”

…….”

동행(同行)이라는 건 필수불가결적으로 어느 정도의 신뢰를 치러야 하니까.”

…….”

값이 된 건가?”


이와이즈미가 그 말을 중얼거리며 다시금 맞닿은 손바닥 부근을 아래로 더욱 눌렀다. 체중이 실리며 상처의 고통도 커졌다. 그러나 둘 중 누구 한 사람도 얼굴을 찌푸리거나 하는 표정을 보이지는 않았다. 오이카와는 제가 끊어버린 황금색 장신구를 바라보았다. 그것과 함께 청()색 이불을 쥐어 잡았다. 손톱 밑이 살짝 들리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힘을 준 손길이었다.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의 눈이 마주쳤다. 검은색과 짙은 갈색의 만남은 맞닿은 손바닥과 옆구리만큼이나 투박했다. 섬세함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눈이 마주친 채 몇 초의 시간이 흘렀을 무렵 이와이즈미가 손바닥을 떼었다. 오이카와의 옆구리에 짧은 해방감과 시원함이 들었다. 이와이즈미가 피로 범벅이 된 손바닥을 쥐었다. 이제 완벽하게 그의 피만이 그의 손바닥 안에 있다고 하기엔 애매했다.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의 구성 요소가 전부 그의 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단정 짓기 불가능했다. 오이카와는 제 등 뒤로 소름이 돋았음을 깨달았다. 척추를 타고 시작해 머리카락이 덮고 있는 바로 밑 목 부근 까지 전부. 오소소하게 돋아난 살결이 있었다. 이와이즈미 또한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똑같은 색의 피를 보며 말이 없었다. 그건 오이카와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쉽사리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의 성질이 아까처럼 단순한 어색함으로 발단된 것은 결단코 아니었다.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의 방을 나선 것은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는 진득했던 피가 응고 되어 덩어리 질 때까지 그곳에 있었으며 비단 그것을 한 번에 치료해줄 수 있는 오이카와가 바로 눈앞에 있었음에도 상처를 단 채 그대로 방을 나섰다. 그것은 어찌 본다면 그들에게 있어 나름의 증표와 같았다. 오이카와는 아직도 얼얼함을 간직한 옆구리를 쳐다보았다. 덜 아문 상처 위로 기포가 올랐다. 오이카와는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다 문득 이상함에 손을 뻗었다. 그 뒤 그의 손바닥 위에 떨어진 것은……. 그건 오이카와의 새로운 비밀이 되어 굳건히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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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HQ / 전생 파트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딘가 비틀어진 존재라는 것은 생각보다 꽤 거슬리는 일이다. 눈을 뜨는 찰나에 순탄하지 못한 삶을 살 것이라며 재판 당하는 기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공기라는 성분을 들이마시며 오이카와가 그랬다. 그는 균열에서 어그러진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처럼 갖춰서는 안 되는 구색이란 구색을 전부 갖추고 있는 돌연변이가 꼭 오이카와 홀로인 것은 아니었다.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그와 비슷한 힘을 가진 무리들은 널따란 세계의 곳곳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선대(先代)는 이미 실존했다. 덕분에 오이카와는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미 그가 태어났을 땐 그들의 번식과 규율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 오늘도 마을에 위급한 환자가.”


이미 생성된 정보만을 나열해보자면 끝이 없었다. 우선 그들은 보통 사람과 매우 흡사한 외모를 가지고 있으나 결코 완벽한 사람의 형태는 아니었다. 각자 크기에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두피 위에 솟아있는 뿔, 들쥐처럼 새빨간 눈동자, 이유도 모른 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어떠한 힘까지. 그래. 그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작게는 당장 바닥에 있는 가벼운 물건을 들어 올릴 수 있는 힘부터 커다란 숲 하나를 통째로 불태울 수 있는 힘을 소유하고 있었다. 능력의 종류와 범위는 개개인마다 전부 달랐다. 그러나 어떠한 능력이든 분명 인간이 가능한 범위는 아니었다. 세간에 떠도는 소문이 말하기를 그들은 죽음조차 서로만이 가능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평범한 이들은 그들에게 상처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현재로 와 그들은 대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힘들을 이용해 우위의 삶을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돌연변이 통치자들을 적()이라고 명명했다. 꼭 태양의 꼬리 끄트머리를 삼킨 것 같은 적()색의 눈동자를 처음 똑똑히 마주한 이가 붙인 데에서 널리 퍼져 굳어진 호칭이다. 적어도 동쪽에서는 그 호칭을 공통적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들이 부르는 적()이라는 이름의 뜻이 그 이유만일 터는 아니었다. 왕보다 높은 고귀한 존재. 대부분 모든 나라의 왕 위에 적()이 있으며 전쟁은 그들의 시작 아래에 이루어진다. 이들은 평화를 강요한 폭력을 휘두른다. 그들은 결단코 평범한 이들과 뒤섞일 수 없다. 왕의 위에 앉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으나 아직도 사람으로 취급받지 아니하여 그 자리에 있다. 그것은 서로를 향한 차별이었다. 그러니 적()이라는 그들의 이름이 반드시 눈동자 색만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오랜 기간 평범한 이들의 위에 군림했으나 그랬기에 가장 확실하고 거대한 적()이었다.


오이카와 역시 다를 것은 없었다. 그나마 오이카와가 다른 이들과 조금 차이점이 있다면 그가 비교적 평화적인 힘을 가지고 있으며 평화적인 힘을 평화적인 부분에 알맞게 사용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어느 시점에서부터 자기들만의 타협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삶 속에 녹아드는 것을 선택했지만 그것이 꼭 아름다울 수만은 없었다. 안타깝지만 이미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는 사회 속으로 갑작스럽게 돌연변이가 끼어들 때 마냥 아름다운 섞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 중 누군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막강한 힘을 이용해 폭군처럼 나라를 지배했으며 누군가는 자신의 보잘 것 없는 능력을 들킬까봐 전전긍긍을 하며 부러 겉을 화려하게 꾸미기도 했다. 물론 정말 간혹 외딴 곳에서 홀로 살아가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수로 따져보자면 전자가 압도적이었다. 굳이 자기들끼리의 신경을 건드릴 만큼 거슬리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면 평범한 이들을 상대로 얌전한 생활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게 그들이 내세운 의견이었다. 그들은 부정할 수 없는 그 시대의 괴물들이었다. 다른 생물체들이 전부 그들을 무서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따지고 보면 오이카와는 그 돌연변이 사이에서도 또 돌연변이였던 것이다. 무력으로 모든 것을 제압하려는 그들 사이에서 오이카와는 홀로 동조하지 못했다. 오이카와는 그 돌연변이들 중 능력의 크기와 범위 또는 신체적 능력 따위가 누군가에게 뒤지는 편이 절대 아니었으니 함께 균열에서 어긋난 이들 사이에서도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을 받는 건 당연했다. 오이카와에게 힘을 합치자 손을 내밀었다가 거절당한 이들은 외려 오이카와에게 이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힘이 있고 없고를 떠나 그는 애초에 싸움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자신의 밑에서 엎드려 울며 이유 없는 사과를 던지는 이들을 보는 것이 뭐가 즐거운 건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그는 자신이 제 부모로부터 이어받은 관할 구역에서 최대한 얌전히 삶을 살고 있었다. 그의 부모는 떠나는 순간까지 제 아들의 관대함을 걱정했다. 기실 그 관대하다는 단어조차 오이카와에겐 오만의 극치로 들려왔으나 굳이 그것을 알리진 않았다. 피곤한 일과 잔소리가 느는 것은 사양이었다. 저를 귀찮게 구는 존재는 적()도 인간도 싫었다.


오이카와는 제 앞에서 피를 흘리며 괴로워하는 사람의 허벅지를 매만졌다. 손길이 닿기 무섭게 안을 내비치며 벌려져 있던 살결이 입을 다물었다. 따뜻한 힘은 바늘이 되어 살갗을 다시 꿰매어 주는 듯 해보였다. 동시에 오이카와의 입술이 열리고 그 틈 사이로 한숨이 비집고 흘렀다. 만약 자신이 없었다면 저 남자는 저렇게 허벅지가 갈린 채 죽음을 맞이했을지 모를 일이다. 오이카와는 바닥에 떨어진 남자의 핏방울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마주하면 할수록 유독 크게 다가오는 그들의 나약함에 이상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생긴 것도 똑같으니 더더욱 그랬다. 이들은 너무 약했다. 고작 뿔의 유무와 눈동자 색만으로 이토록 생존력의 차이가 두드러진다니 믿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들은 많은 피를 흘려도 죽고 병을 깊이 앓아도 죽음을 면치 못하며 끽해봐야 80년도 안 되는 삶을 살고 눈을 감는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자신과 비슷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80년이라. 오이카와에게 80년은 또 다른 의미가 있는 숫자였다.


오이카와가 태어났을 때 그가 균열에서 벗어난 존재라고 칭한 것은 비단 남들은 할 수 없는 능력이 있어서 혹은 외관에 특이점이 있어서만이 아니다. 자신들 외의 존재가 알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申申當付) 되어 오던 그들만의 비밀이 두어 개 더 있었다. 하나를 지금 말해보자면 그들이 영원한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의 시선과 다르게 그들끼리의 비밀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대략적인 수명의 길이는 공통적으로 1000. 만약 한 번도 죽지 않고 살아간다면 1000년을 제가 가진 능력과 함께 살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이상한 문장이 하나 생긴다. ‘한 번도 죽지 않고 살아갈 경우 능력과 함께 살 수 있다.’ 라니. 말이 되지 않는 문장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들의 가장 비틀어진 권능을 설명하는 말이 되었다. 오이카와의 부모는 2개월 전 능력을 버리고 새 삶을 선택했다. 그랬기에 이 자리를 오이카와에게 넘긴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수명이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자신이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의 길이였다. 주어진 1000년의 세월 동안 그들은 몇 번이고 인생을 다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들은 이것을 서쪽에선 리프(leap), 동쪽에선 귀()라 칭했다. 리프를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심장이 꿰뚫리면 그대로 리프가 진행되었다. 차이가 있다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을 경우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태어날 수 있었고 남에게 죽임을 당하는 경우엔 아니었다. 한 번 리프를 할 때엔 80년의 수명이 소진되며 남은 수명이 80년도 채 되지 않았을 경우 리프를 할 수 없다. 또한 자의든 타의든 리프가 되는 순간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고유의 능력은 사라지고 외관이 평범한 인간과 같아진다. 수명이 남아있는 한 리프는 몇 번이고 가능하나 그들만의 힘은 없어진다는 소리였다. 해봤자 고작 남들에 비해 감이 좋거나 희박한 확률로 누군가의 꿈속에 들어가는 것이 전부였다.


또한 리프를 했을 땐 전생의 기억도 소멸되었으나 일정한 충격을 받으면 돌아오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리프를 한 다음 기억이 돌아온 이들은 최대한 옛날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살기 급급했으며 또다시 다음 리프를 준비했다. 오이카와의 부모는 2개월 전 돌연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며 540살에 리프를 선택했다. 그들이 정한 다시 태어날 장소는 오이카와도 알지 못한다. 다만 오이카와는 그들의 선택이 꽤 이기적인 것임을 절감했을 뿐이었다. 그는 리프의 타당성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이카와에게 있어 리프의 순간은 아직도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그는 균열에 어그러진 삶에 눈을 뜬 지 겨우 20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의 나이 올해로 열여덟이었다. 1000년에 비해 아직 한 줌 같이 느껴지는 길이의 나이였다. 지금 당장 그에게 있어 리프에 대한 고뇌보다는 눈앞에서 피를 토하고 있던 남자를 향해 손길을 뻗어주는 것이 더 자극적인 현실이었다.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80년을 쉽게 바치는 오이카와의 앞에 끽해봐야 80년을 사는 이들은 너무도 짧았다. 그 사이에 있다 보면 오이카와 본인도 80년 정도만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착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까마득히 역사의 위에 있는 선대들은 힘과 욕심에 알맞게 나라를 나누었다. 오이카와의 부모를 비롯하여 많은 이들은 자신들끼리 나눠가진 관할 구역이 있다. 전쟁이 일어나 그것을 흡수하지 않는다면 비교적 평화롭게 계승이 되는 그들만의 가문 고유의 땅이었다. 그리곤 대대손손(代代孫孫) 왕보다 높은 적()의 위치에서 권력을 즐긴다. 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정치에 개입하는 인물들도 있으며 그냥 방탕한 삶을 위해 그 자리에서 놀고먹는 인물도 당연히 존재한다. 그의 부모는 정치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높았고 오이카와는 그 중간이었다. 딱히 제 부모들처럼 정치에 대한 개입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나 매번 놀고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생각 외로 그는 그런 것들에 커다란 관심이 없었다. 단지 제가 가진 능력이 누군가의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이다 보니 부탁해오는 이들의 아픔을 없애주는 일을 감흥 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늘 그 이상한 기분을 만끽하며 말이다.


그때 시녀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항상 자신의 방에 올 무렵 발소리를 최대한으로 줄이지만 그래도 끝이 끌리는 소리가 항상 잔여 했다. 아니나 다를까 곧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 곧 전하께서도착하실.”


왔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신이 이곳에 제 부모를 대신하여 지내기를 2개월. 오늘은 그 2개월 전 즉위(卽位)를 한 뒤 외교를 위해 자리를 비웠던 이 나라의 젊은 왕이 돌아오는 날이었다. 덕분에 제대로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젊은 왕은 오이카와와 나이가 같았다. 다시 말하지만 그때 그들의 나이가 열여덟이었다.


오이카와는 의복을 갈아입기 위해 몸을 돌렸다. 평소엔 전체적으로 검은색에 군데군데 녹색이 섞인 의복 혹은 진한 적()색이 주를 이루는 의복을 입고 활동을 했지만 공식적으로 왕을 만날 때에는 입어야 하는 의복이 따로 있었다. 오이카와가 이 의복을 입는 것은 당연히 처음이었다. 검은색에 녹색이 섞인 대외적인 의복과 다르게 반대로 녹색에 검은색이 섞인 의복이었다. 오이카와는 소매 끝의 통이 넓은 옷 사이로 제 팔을 집어넣었다. 진한 녹색의 너른 소매 끝은 호박색 자수가 촘촘히 새겨져있었다. 허리 부근은 평소 입고 다니는 검은 의복과 마찬가지로 옆구리에 의복을 여밀 수 있는 긴 끈이 있었고 오이카와는 그것을 번갈아 엮어 제 속살을 가렸다. 제 발목 바로 위까지 내려가는 기다란 의복은 살짝 거추장스러웠으나 가벼웠다. 오이카와가 바로 지난 주 뚫었던 귓불의 구멍 사이로 소매 끝 자수와 꼭 닮은 색의 귀걸이를 끼웠다. 손가락 한 마디만큼 기다란 귀걸이의 끝이 제가 걸을 때마다 함께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녀는 왕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오이카와는 시종일관 자신의 눈치를 보는 시녀를 향해 짧게 안내하라는 말을 던진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딛는 걸음걸이의 보폭이 꽤 넓었으며 망설임이 없었다. 그다지 긴장이 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솔직한 심정으로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감정은 약간의 호기심이 전부였다. 앞서 걷고 있는 시녀는 세 발자국을 걸을 때마다 뒤를 돌아서 자신의 눈치를 보기 여념이 없었다. 저를 보필(輔弼)하기 시작한 2개월간 그래도 자신에게 긴장을 많이 풀었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전 들려온 옆 나라 적()의 몰살 소식으로 인해 전부 처음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오이카와가 시녀에게 들리지 않게 혀를 찼다. 그녀의 두려움이 서운하지는 않았다.


전하를 뵙습니다.”


마침내 마주한 왕은 오이카와보다 조금 더 작은 키를 가지고 있는 사내였다. 오이카와는 왕을 쳐다보았다. 오이카와와 왕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자신보다 짙은 눈썹, 흑갈색에 가까운 짧은 머리칼, 다부진 풍채, 피곤함이 언뜻 묻어있는 눈동자. 왕은 오이카와와 마찬가지로 짙고 어두운 녹색 의복을 입고 있었으나 배와 등 부근에 호박색 자수가 더욱 크고 화려했다. 제 옷엔 없는 부분 위로 자수가 있었으며 제게 자수가 있는 부분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의복의 길이 역시 오이카와 보다는 조금 더 짧았다. 왕의 귀는 깔끔했다. 아무런 구멍도 장신구도 없었다. 의복부터 시작하여 한 나라의 왕치고는 수수한 차림새였다. 무엇보다 왕이라는 직위(職位)가 어울리지 않을 만큼 앳된 얼굴이었다. 그건 오이카와도 마찬가지였지마는.


오이카와가 그의 외관과 의복을 아래에서부터 느긋하게 훑어보았다. 그러다 마지막에 도달한 얼굴에선 눈이 마주쳤다. 두 눈동자가 마주치자 빠른 반사 신경으로 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오이카와가 무어라 입을 열려 했으나 왕의 말이 더욱 빨랐다.


그새 바뀐 건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갑작스레 던져진 물음에 이번엔 오이카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순수한 의미를 담고 있는 물음이라기엔 끝이 묘하게 뒤틀려있었다. 왕의 옆에 있던 신하들이 다급히 고개를 들고 그를 저지했으나 크게 개의치 않는 것이 눈에 훤했다.


내가 왕위에 오를 당시에만 해도 참견이 많던 자들인데 2개월 사이 사라지다니. 근성도 없는 놈들이었군.”

전하!”

고개 들라 한 적 없소.”


놀라 벌떡 허리까지 세웠던 신하가 왕의 낮은 목소리에 다시 허리를 숙였다. 오이카와는 시비가 다분한 남자의 말투에 헛웃음을 흘렸다. 제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왕의 눈두덩이 안에 경계가 그득했다. 오이카와는 머리가 땅에 닿을세라 허리를 숙이고 있는 신하들을 바라보았다. 남자를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경계가 아닌 두려움만을 보였다. 뒤통수만 보아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애초에 오이카와는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단순한 경계로 인해 나타난 적대감을 이렇게 대놓고 받아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오이카와가 다시 왕을 쳐다보았다. 오이카와는 처음 맞이하는 상황에 입술을 몇 번 움찔거리다 대꾸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평소보다 한 단계 높은 목소리가 나왔다.


전하께서 잘하신다면야 소인은 나라에 큰 관심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날이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가 가진 태초의 만남이었다. 그날 서로는 서로의 존재를 완전히 알아버리고 말았다. 그날이 이와이즈미의 생일로부터 정확하게 2개월 하고도 나흘이 지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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