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어떤 이에게

 

본편기반 컬러버스 AU, 타임리프 소재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에 대한 오이카와의 시선

 



 

비가 내린다.


안녕. 우리 사이에 이렇게 어색하게 입을 여는 순간이 찾아올 줄이야. 정말 예상도 못 했어. 그렇지? . 그러니까. 무슨 말로 시작하는 게 최대한 덜 창피하고 최대한 덜 어색할까. 그래. 어떻게 해도 쪽팔리니까 옛날 일이라도 얘기해보자. 마구잡이로 이야기하다 보면 익숙해지겠지.


옛날 일이라. 사실 눈을 감고 있으면 꼭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는 소리는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난 꽤 많은 부분을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해. 예를 들어 내가 너를 따라 나무에 오르겠다고 고집을 피우다 내려오지를 못해 엉엉 울었던 기억이라던가, 엄마가 아끼던 물건을 깨부순 다음 손을 잡고 도망가던 기억이라던가, 내가 네 튀김 두부를 뺏어 먹어서 네가 엄청 화내버린 일이라든가 하는 그런 일들. 말하고 보니 전부 딱히 중요하진 않은 기억들이다. ……정말 곱씹을수록 대단치 못한 일들이네. 그런데 머릿속에 한가득 생각나는 일들이 전부 이런 것뿐이야. 뭔가 우리한테도 거창하고 특별한 일들이 분명 있었던 것 같은데 당장은 잘 기억나지 않아. 아마 이런 날들이 훨씬 많기 때문이겠지. 진짜 돌이켜 볼수록 우리 참 별 볼 일 없는 평범한 시간들을 함께 지냈구나. 앞으로도 마찬가지이려나. 생각하니까 또 조금 시시하기도 하다. . 시시해. 시시하기도 하고 조금 덤덤하기도 하고.


이와쨩. 내가 이렇게 뻔하고 재미없는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나는 그 시간들이 정말 가장 우리다워서 좋아. 있잖아. 나는 어렸을 때 친구들이 말하는 세상에 대해서 알지 못했어. , 그건 너도 마찬가지이려나? 고작 한 달 정도 차이니까. 아무튼. 40일 정도밖에 안 되는 시간이지만 너는 나보다 먼저 태어나서 나를 기다려주었고 내가 태어나자마자 만나버렸잖아. 난 이와쨩 말고 다른 사람을 만나볼 시간도 없었어. 그래. 뭐 다시 생각하니까 이와쨩도 억울하기는 하겠다. 고작 한 달이었잖아? 다른 사람을 만날 수도 있었던 시간이. 만약에 우리가 그때 만나지 못했더라면 친구들과 비슷한 세상을 살았을까? 누가 색을 보여줄지 궁금해 하고 설레서 기다리고 상상하고. 우리는 그런 적이 없었다는 게 아주 가끔 아쉽기도 하고. 네 머리칼은 어떤 색일까, 하는 상상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이? 아니다. 어차피 한 번도 색을 본 적이 없었다면 세상에 무슨 색이 존재하는지도 몰랐겠구나. 결국 상상도 못 했겠네. 게다가 역시 나는 그런 거 궁금해서 못 견디고 불안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성격이니까. 이게 좋은 거 같아. 그러고 보니 우리 엄마가 입버릇처럼 넌 정말 하지메군이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니! 했던 것도 그때부터일까나.


어차피 너랑 나는 그때부터 영영 함께 해야 하는 사이가 되었으니까. 이 말 좋다. 어차피 너랑 나는 그때부터 어쩔 수 없는 사이였다는 거잖아. 있지. 그래서 사실은 색 없는 세상을 보고 있는 친구들의 말을 이해 못했어. 뭐랄까. 색을 보게 해주는 상대는 운명이라고 엄청 반짝반짝 해져서 기다리는데 나는 이미 색을 보고 있잖아. 걔네 말대로라면 우리가 운명이라는 소리일까? 근데 그렇게 말해도 그다지 와 닿지 않는데. 아니. 그렇잖아. 반짝 반짝거린다는 것도 잘 모르겠고. 눈을 뜰 때부터 옆에 있던 사람이 알고 보니 그런 존재라더라 하는 건. 이와쨩도 그렇게 생각하지? 뭔가 조금 답답한 소리 같기도 하다. 결국 나는 중간에 누구를 좋아하든 누구와 사귀든 결국 너랑 같이 살게 될 거라는 소리잖아. 색 하나로. 맞아. 확실히 지금까지 같이 지낸 주제에 갑자기 운명이라느니. 별로 타당하지 않아. 생각해보니까 더 별로다. 이 단어. 이게 진짜 운명이냐고 덥석 믿기 힘들어. 그치? 우리는 그냥 태어날 때부터 함께였는데 그 단어 하나로 너와 내 사이를 엄청 꾸미려 드는 게 정말 이해가 가지 않고. 그 단어 하나로 이러는 거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 유치해. 그렇지?


이와쨩. 생각해봤는데. 너는 네가 생각하는 거보다 더 무게 있는 사람일지도 몰라. 우리가 같이 밤에 자주 가던 편의점 있잖아. 거긴 생각보다 더 먼 곳이었을지 몰라. 사실 우리가 가졌던 그 한숨이 나오게 시시했던 순간들은 생각보다 힘든 순간들이었을지도 몰라. 너는 나한테 난 네가 점프 서브를 하는 모습에서 반했어.’ 라고 했지만. , 그래. 네가 완전히 저렇게 말하지는 않았지. 아무튼 간에. 생각해 보면 나도 그런 네 강렬한 부분에 반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반했다고 말하기도 우습다. . 그러니까 새삼 깨달은 날이 말이야. 그런 순간이 아닐까 하고. 오이카와씨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이와쨩 뿐이니까 조금 영광스럽게 생각해도 좋아. 오이카와씨가 이와쨩보다 먼저 좋아한 건 알지? 진짜 이와쨩은 복 받은 줄 알아야 한다고.


그래서 정말 실없는 생각이긴 한데 나는 우리가 썩 괜찮게 살지 않을까 생각해.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알아. 우리는 하루걸러 하루를 싸우고, 화내고, 소리치고, 답답해할 거고, 의미 없이 시간을 전부 보내버리기도 하겠지. 귀중한 휴일날 낮잠으로 하루를 전부 보내버릴 수도 있겠다. 난 요리를 못하니까 네가 대신 밥을 해주고, 너는 빨래를 잘못 개니까 그건 내가 하는 게 낫겠다. 우리는 또 그렇게 엄청 우리다운 시간들을 보낼 거야. 집엔 우리 앨범도 많을 거고, 이와쨩 은근히 고질라 인형이라거나 이런 거 모으니까 그런 것도 잔뜩 있겠지. 찬장엔 내가 좋아하는 우유빵도 항상 있을 거고. 주말이면 아주머니랑 우리 엄마가 번갈아 가면서 반찬이라도 나눠주려나? 좋다. 평화롭네. 엄청.


내가 장담하는데 우리는 누가 야, 당장 내일 세상이 멸망한대! 라고 말해도 배구나 하면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것 같아. 막 오늘이 세상의 마지막이니까 제일 멋진 토스를 올려볼게! 하면서 투지를 불태울 수도? 아니면 어, 건강한 성생활이라도 즐기면서 마지막 하루를 마무리할지도 모르겠다. 근데 이와쨩 침대에선 조금 집요하잖아. 오이카와씨 세상의 마지막 날까지 허리 붙잡고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그거 엄청 모양 빠지잖아. 하긴. 세상이 끝나는데 무슨 상관이겠어. 그래. 그럼 그것도 좋다고 하자. 사실 다 괜찮은 것 같아.


이와쨩. 나는 가끔 너를 생각하면 무릎이 아파. 비가 오면 허리가 뻐근해지는 사람들처럼 나도 무릎이 아픈 날엔 이와쨩을 만나야만 할 것 같아. 실없는 소리지만 네가 하늘에서 내려올 것만 같단 말이지. 이와쨩은 내가 무릎 다치는 거 정말 싫어했잖아. 나 아직도 이와쨩이 선물해준 서포터 가지고 있어. 날짜까지 기억해. 잊을 수가 없지. 세상에 한 번뿐인 졸업식이었잖아. 이와쨩은 기억해? 그때 같이 살자고 했었는데. 오늘 차라리 내일 즈음 세상이 멸망해버린다고 신문에 나왔으면 좋겠다. 그럼 우와, 어차피 멸망해버린대! 하고 잔뜩 멋대로 굴 수 있을 텐데. 그런데 오늘 세상은 너무 멀쩡하고 내 평화로운 날도 이제 없구나. 너무한 날이야. 최악이라니까. 진짜로.”


빗방울 소리가 심해졌다. 공중전화 박스 위로 빗방울이 제 몸을 낙하시켰다. 자살 행위였다. 행위로 인해 만들어진 파편은 멋대로 튀어 바닥으로 한 번 더 추락했다. 잔인한 잔해였다. 처참한 끝이었다.


나는 네가 없어지면 세상이 멸망해버릴 줄 알았어. 정말이야. 있잖아, 이와쨩. 자꾸 불러서 미안한데. 너는 내가 태어났을 때 내 생일 선물로 색을 줬잖아? 그런데 지금의 난 전혀 색을 볼 수 없고. 줬다 뺏는 거 너무 치사하지만, 그래서 우리 앨범에 끼워진 사진들의 색도 볼 수가 없지만. 나 그래도 전부 기억하고 있다? 그래. 이거 자랑하고 싶었어. 이와쨩. 고작 50년 정도야. 내가 너를 따라가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겨우 그게 다야. 그때까지 뭔가를 더 잊을 수도 있어. 중간중간 얼레, 이건 무슨 색이었더라? 헷갈릴 수 있어. 가물가물해질 수도 있고. 그래도 잊지 않아. 이와쨩. 난 잊지 않아. 설령 잊고 싶지 않아도 잊히는 기억들이 있고, 색들이 있다고 해도. 어차피 그 시간이 지나 너를 보면 내 세상은 또 색으로 물들 거잖아. 그럼 그때 아 맞아, 저 색이 이 색이었지! 너랑 외치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거야.


이와쨩. 고작 50년 정도야.


방금 말하면서 생각해봤는데, 확실히 지금까지 같이 지낸 주제에 갑자기 운명이라느니, 타당하지 않을 수 있어. 우리가 진짜 운명이냐고 덥석 믿기 힘들 수도 있어. 맞아. 이 단어 하나로 이렇게 호들갑 떠는 거 진짜 유치해. 그렇지? 결국 나는 중간에 누구를 좋아하든, 누구와 사귀든 결국 너랑 같이 살게 될 거라는 소리잖아. 근데 사실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오이카와씨 한 번만 말할 거니까 잘 들어 이와쨩. 난 아마 색을 보여주는 사이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고 해도 이와쨩이랑 같이 살았을 거야. 만약에 색을 보는 게 당연한 세상이었다고 해도 이와쨩이랑 살았을 거야. 어디서 이와쨩을 만나든 이와쨩이랑 살았을 거야. 결국 나는 어디든 이와쨩에게 잡혀 사는 완전 불공평한 삶을 살 거라는 이야기지.


난 사람을 잘 믿지 못하고 내 가장 중요한 결정의 순간엔 이와쨩이 있었어. 아니. 애초에 나는 눈을 떴을 때부터 너를 봤다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덜컥 혼자 살아버리라고 하면 나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잖아. 나는 너랑 함께 살았던 그 평화로움밖에 모르고 살아왔고 또 그런 날만 생각했단 말이야. 유치할 만큼 많이 계획을 세우고, 상상해보고. 그랬단 말이야. 이와쨩. 나 멀쩡한 척하지만 아마 아주 오랜 시간 정말 외롭고 힘들 거야. 난 원래 욕심이 많은 사람이어서 지금과 타협하는 방법이라는 걸 모를 수도 있어. 이와쨩은 알잖아.


이와쨩. 나 오늘 바라던 팀에서 제의가 들어왔어. 근데 내가 제일 먼저 든 생각이 뭔 줄 알아? 와 정말 너무 기쁜데 이와쨩이 없다는 사실이야. 그리고 깨달았어. 아마 계속 이런 순간들이 반복될 거고 그게 나를 온전히 기쁘게 할 수 없겠지. 그래서 말인데, 나 지금 네가 내 운명이 아니라면 억울해서라도 죽고 싶을 거야. 정말 유치한 단어지만 내가 거기에 기대서 지낼 수 있게 해줘. 이와쨩. 말해줘.


우리답던 그 순간들. 우리는 운명이지? 중간에 이렇게 되어 버리는 거, 운명이 아니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냥 우리끼리 그렇게 정하자. 아니라면 나 정말 너무 억울할 것 같아. ? 어차피 우리는 50년이 지나 다시 만나서도 우리다운 시간들을 보낼 건데. 자연스럽게. 50년이 지나도 자연스럽게 만나고 같이 사는 인연이 뭐 그렇게 많은 줄 알아? 그러니까 이와쨩. 대답해줘. 내가 고작 50년을 버틸 수 있도록.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네가 아니었을 거야. 그렇지만 우린 이미 만나버렸잖아. 태어나는 순간부터 너를 봤어. 나한텐 선택권이 없었다구. 이와쨩도 나도. 그때부터 이미 안 되는 거야. 이미 만나버렸으니까, 어쩔 수 없어. 정말 어쩔 수가 없어. 이와쨩이 아니면 안 돼. 그냥 어느 순간 그렇게 돼버렸어. 이와쨩. 대답해줘. 네가 아니면 안 되는 건, 그런 생각이 드는 건, 변하지 않는 건.”


검은 비는 시야를 어둡게 만들고 회색 전화기는 녹이 슬어 볼품없었다. 나는 잔뜩 꼬여있는 전화선을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다. 전화기 너머 없는 번호라 입이 아프게 말하던 여자는 내려가지 않는 수화기에 지쳤는지 어느 순간부터 단조로운 음만 기계에 맡기곤 사라졌다.


우리는, 운명이지?”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희뿌연 공중전화의 유리창 너머 작은 신사 하나가 보였다. 나는 홀린 듯 입을 열었다.


……이와쨩. 정말 딱 한 달만이라도……,”




친애하는 어떤 이에게,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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