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HQ / 세이죠


BGM : https://youtu.be/6rS7OUGXUik



덩치 값 좀 해라.”


하나마키는 커다란 덩치를 웅크리고 있는 오이카와를 향해 타박했다. 마츠카와 역시 짧게 혀를 차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굴하지 않았다. 그는 몇 번이고 언급되고 있는 커다란 덩치를 둥글게 만 채 이와이즈미의 어깨에 잔뜩 기대어 있었다. 이와이즈미가 제 어깨에 닿은 정수리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치만 역시 싫단 말이야. 왠지 싫다, 그런 거 있잖아!”

퍽이나.”


이와이즈미를 제외한 이들의 짓궂은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의 얼굴은 더더욱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와이즈미는 어깨의 무게를 느끼며 별 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혼자 저를 타박하지 않는 이와이즈미에게 보란 듯이 엉겨 붙으며 투정을 부려댔다. 물론 이와이즈미는 그 역시 그다지 귀를 기울여 듣지는 않았다. 흔한 광경이었다. 어지간한 귀신이나 공포 영화엔 늘 겉으로만 무섭다며 소리를 질러대던 오이카와는 유독 불길이 거세게 나오는 장면만은 진심으로 피했다. 평소 감정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던 얼굴에 노골적인 더부룩함을 보이고는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마츠카와의 집에서 틀어둔 영화에 불길이 붙자 이와이즈미의 어깨를 파고든 것이다. 이와이즈미에게 있어선 어렸을 때부터 익숙한 오이카와의 불길 혐오였다. 이와쨔앙. 이와이즈미가 아무 말이 없자 오이카와는 그의 팔뚝을 잡아왔다.


머리를 파묻은 상태에서 팔뚝까지 감아온 모양새가 평소보다 배로 어리광을 표현했으나 그래도 이와이즈미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하나마키와 마츠카와는 그러한 이와이즈미의 얌전함에 고개를 저었지만 기실 그들도 오이카와도 알고 있었다. 장난스럽게 들러붙는 것을 제외하고 (이것조차 완벽히 밀어내진 않는다.)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를 밀어내는 일은 없었다. 입으로는 거친 말들을 뱉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오늘의 이와이즈미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이와쨩? 오이카와가 한 번 더 이와이즈미를 불렀다. 시끄러. 이와이즈미는 그제야 오이카와의 얼굴을 손으로 누르며 대꾸를 했다. 분위기는 곧 평소와 똑같이 흘러갔다. 오이카와는 영화에서 불길이 나오는 내내 이와이즈미의 어깨와 팔뚝에 자리를 폈으며 이와이즈미를 팔짱을 낀 채 덤덤하게 영화를 바라보았다.


아까 전 이와이즈미가 잠시 조용했던 이유는 그저 새삼스럽게 과거를 회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언제부터 오이카와가 불을 꺼려했더라? 돌이킬수록 역사가 꽤 길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오이카와와 함께한 과거를 되짚어보면 함께한 시간 내내 불을 싫어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던 날들의 연속이었다. 이유가 뭐였지? 신기하게도 계기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와이즈미는 자신의 생각에도, 남들의 시선에서도 오이카와에 대해 가장 많은 것을 알고 또 기억하는 인물이었다. 그것이 때때로 이와이즈미에겐 묘한 자부심까지 들게 했으니 덜컥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눈살이 찌푸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오이카와가 언제 불에 덴 적이라도 있던가? 그러나 이와이즈미의 과거를 걸고 말하건대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이카와에겐 화상의 흉터도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알 수 없는 계기를 차근차근 생각해내다 결국엔 항복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오이카와의 말대로 단순히 그에게 있어 어쩐지 싫은 것이겠거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자꾸만 등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찝찝함을 억지로 밀어내며 제게 꼭 붙어있는 오이카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쓰다듬었다기보다는 툭툭 건드렸다고 하는 것이 옳겠으나 오이카와에겐 충분히 다정한 손놀림이었다.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를 향해 딱 그에게만 보일 만큼 고개를 들고 웃어보였다.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 조용한 웃음이었다. 익숙한 웃음이었다.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였다. 부모님들끼리 친했던 것을 시작으로 이름마저 꼭 세트처럼 지어진 채 항상 붙어있기 마련이었다. 둘 사이에 기억나는 에피소드를 꼽으라면 셀 수 없었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꼭 그래야만 했던 사람들처럼 이와이즈미의 인생엔 오이카와가 있었고 오이카와의 인생엔 이와이즈미가 있었다. 그냥 놓고 본다면 각자의 인생을 바꾸어 착각할 만큼이나 닮아 있는 모습이었다. 어떻게 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맞는 것이 없었으나 그렇기에 하나부터 열까지 들어맞는 사이였다. 때로 그들을 지켜본 이들은 너희는 지난 생에서도 이렇게 살았을 것 같다며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그때마다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는 간단한 반응 외에는 기타 특별한 리액션을 선보이진 않았지만 말이다. 이와 비슷한 소리야 어릴 때부터 지겹도록 들어왔으니 그럴 법도 했다.


전생이라. 현재의 삶 말고는 딱히 큰 관심이 없는 둘에게 있어서 전생이라는 단어는 다른 이들이 언급을 해야 아주 짧게 생각해보는 것에 불과했다. 그만큼 둘은 현생 외의 삶에 무감각했다. 물론 대부분의 이들이 그렇겠지마는 둘, 특히 이와이즈미는 더더욱 그랬다. 존재하는지도 명확하지 않은 과거 혹은 미래의 생이 그다지 흥미롭지도 호기심이 들지도 않았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지금의 삶이었다. 바로 제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지금의 삶 말이다. 이와이즈미는 영화가 끝난 뒤부터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 오이카와의 옆모습을 곁눈질했다. 감정이 미약하게 피어나기 시작한 날부터를 기준으로 삼아보자면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를 친구가 아닌 다른 감정으로 바라본지 어언 삶의 절반이었다. 이와이즈미의 착각이 아니라면 오이카와 역시 저와 같은 감정일 것이다


이와이즈미는 부지런히 바늘을 움직이는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서로의 감정만 알아챈 상태로 안정된 시기를 보낸 지 벌써 몇 년이다. 이와이즈미는 고교를 졸업하고 난 다음 대학에 입학하고 서로가 안정될 시기만을 기다렸다. 코트 위의 그를 사랑하여 온전한 집중을 배려한 시간도 이제 정말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와이즈미. 네 차례다.” 이와이즈미는 저를 부르는 이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이카와도 즐거운 듯 저를 보고 있었다. 평화로운 주말오후였다. 그날이 졸업 전 마지막 겨울 방학이었다.


 

오이카와는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콧노래를 불렀다. 새벽 2시에 부르기엔 꽤나 흥겨운 리듬이었다. 흥얼거리는 곡조가 한 구간을 반복했다. 오이카와는 파란 불빛이 섞여 흘러나오는 핸드폰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아까 전부터 고정되어 있는 핸드폰 액정 화면은 라인 창을 띄우고 있었다. 상대방에게서 새로운 메시지가 오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오이카와는 마냥 즐거웠다. 이와쨩, 그리고 그 옆에 하트까지 붙어있는 이름 밑으로 어쩌면 평생 타이밍만 찾았던 말이 도착해 있었다.


진짜 귀엽단 말이지.”


혹여나 이 말을 하나마키나 마츠카와가 들었더라면 질색을 했을 터이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진심이었다. 내일 시간 비워두라는 딱딱한 말투를 보면서 느낄 의견은 아니었으나 굳이 다른 날도 아니고 새해가 되기 전 1231일을 맞이해 고백 해오려는 뉘앙스를 알아챈 뒤로는 귀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제가 가족여행을 갔다 오는 동안 계속 고민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웃음이 흘렀다. “오이카와씨는 장미꽃 같은 건 별론데.” 다 알고 있다는 제 답장 이후로 더 이상의 답문은 없었다. 오이카와의 예상으로 또 제 짧은 머리칼을 벅벅 긁고 있을 이와이즈미가 눈에 선했다. 오이카와는 메시지의 핑퐁이 멈춘 핸드폰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마지막엔 그것을 품에 안고 잠들려 했다. 오지 않는 잠을 청하려 눈을 감았다 흥분되는 마음에 다시 뜨는 것을 반복했다. 아무리 눈꺼풀을 내리 누르고 잠에 들려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을 벌떡 일으키는 바보 같은 짓을 계속했다. 이와이즈미도 저와 같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면 도저히 몸을 가만히 둘 수가 없는 것이다.


기실 둘의 마음이 맞닿아 있음을 느낀 순간이야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없을 만큼 횟수가 많았다. 그러나 분명 맞닿고 있음을 막연히 느끼는 것과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비록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가 서로의 성숙을 바라며 일정한 순간까지 초신뢰관계만으로 만족했으나 내일부터는 그 옆에 새로운 관계의 정의가 추가되는 것이었다. 떨리지 않는다면 그것이 거짓이었다.


오이카와의 반 친구는 그에게 좋아하는 여자 아이에게 고백을 하려다 밤을 샜다는 말을 건넨 적이 있었다. 오이카와는 그날에서야 제 친구의 지난날을 이해했다. 그때엔 그래? 어차피 분위기보면 당연히 오케이 할 텐데 왜?” 같은 의구심을 가졌지만 그날에 가서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분위기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간의 새로운 관계 성립은 이미 지나온 길을 지나 또 하나의 출발지를 표시하는 일이었으니 두려우면서도 떨릴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의 관계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이카와는 주체할 수 없는 설렘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빨에 콕 박힌 입술은 살짝 아릿했으나 찢어지진 않았다. 오이카와는 눈가에 주름이 잡힐 만큼 세게 눈을 감았다. 얼른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고 여겼다. 늘 시간이 흐르는 것을 안타까워했으나 그날만큼은 예외였다. 그의 바람대로 밤은 지체 없이 깊어갔다.


오이카와는 잠이 오지 않는 시간을 지나 어느 순간 까무룩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본인도 도통 언제 잠에 들었는지 기억하지 못할 찰나였다. 그날 오이카와는 꿈속에서 그리운 향을 맡았다. 아니. 그것이 정말 그리운 꿈으로 끝났던가? 오이카와는 은은하게 청()색이 빛나는 이불 위에서 눈을 떴다. 오이카와는 보드라운 이불을 만지작거렸다. 둘러본 방안은 온통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대충 눈에 담기는 인테리어들은 박물관이나 사극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느낌들이 가득했다. 오이카와가 누구의 방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이상한 익숙함을 느꼈다. 마치 어제도 이곳에서 잠을 잤다는 듯 잘 길들여져 제 몸에 감겨오는 이불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꿈에 발을 들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것이 현실이 아님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적어도 제가 살고 있는 현실에선 공간 워프가 불가능하니 말이다무슨 소리냐 하며는 오이카와가 기묘하게 익숙한 이불을 한 번 더 잡아볼 때 그가 서 있는 장소가 뒤바뀌었다. 그 모든 게 눈을 감고 뜨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현실에선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이것은 필시 꿈이리라. 오이카와는 그것을 깨닫고 나자 마음이 편해졌다. , 꿈을 꾸는 구나. 간혹 느끼는 자각몽(自覺夢)이라 생각하여 고개를 끄덕거렸다. 평소보다 훨씬 생생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차피 눈을 뜨면 아침밥을 먹는 사이 잊힐 꿈이 분명했다.


뒤바뀐 풍경은 연못가였다.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든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모두가 사용하는 마을의 연못이라기보다는 특정 인물을 위해 만들어진 장소 같았다. 비교적 작은 크기의 정자와 바로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성벽 따위가 그 증거였다. 아마 오이카와에게도 꿈속이라 허용된 출입일 것이다. 그는 올챙이들이 헤엄치는 연못을 바라보며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남의 집 정원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물이 엄청 맑네.”


오이카와는 어쩐지 이 공간의 침묵이 걸려 아무 생각을 내뱉었다. 그의 말대로 물은 정말로 맑았다. 가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제 얼굴이 비춰질 정도였다. 관리가 잘 된 연못이었다. 그나저나 이런 연못의 주인은 어떤 사람이지? 오이카와는 아주 궁금하진 않은 질문들을 연못에 던지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생생함에 비해선 꽤 지루한 꿈이었다. 오이카와는 잠을 자고 있는 꿈속에서 벌어지는 일임에도 하품이 비집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여러모로 이상한 꿈이었다. 오이카와가 지루함에 괜히 연못으로 손을 뻗어볼 즈음 한 외침이 들려왔다.

 

이와쨩!

 

이와쨩? 오이카와는 제가 저도 모르게 이와이즈미의 이름을 발음 했던가 곰곰이 되짚었다. 그러나 필시 그것은 제 입에서 나온 이름이 아니었다. 자신 말고 이와이즈미를 이와쨩이라고 부르는 인물이 있었던가? 절대 없었다. 가끔씩 저를 따라 그렇게 부르는 이가 살면서 한 번도 없었던 적은 없었지만 전부 얼마가지 않아 멈춘 호칭이었다. 꼭 오이카와만의 호칭이었다. 마치 특허를 낸 것처럼 저 혼자 사용해오던 그런 호칭이었다. 이와쨩! 그때 그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렸다. 아까보다 조금 더 가까이서 들려오는 듯 했다. 오이카와가 목소리의 출처를 찾으며 고개를 돌렸다.


뭐야?”


이와이즈미를 부른 것은 자신이었다. 그러니까. 정작 진짜 자신은 가만히 있었으나 꿈속의 또 다른 자신이 이와이즈미를 부른 것이었다. 굉장히 반가운 표정으로 팔까지 일자로 곧게 뻗어 흔들고 있었다. 차림새도 요란했다. 짙은 녹색에 검정색 끈이 촘촘한 기다란 옷을 입고 있었다. 소매의 통이 넓어 제가 손을 흔들 때마다 맨살을 쉽게 노출시켰다. 귀에는 금색 귀걸이가 덜렁거렸다. 두 번째와 네 번째 손가락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배구를 하면서 악세사리는 쳐다도 보지 않는 오이카와와 영 다른 모앙새였다. 그러나 얼굴만큼은 저와 꼭 닮아있었다. 목소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저의 얼굴이었고 목소리였다. 그렇다면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는 문득 든 생각에 꿈속의 제가 달려가는 도착 지점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꿈을 꾸고 있는 자신과 꿈속의 자신이 가진 눈동자가 한 곳을 향해 집중되었다. 꼭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이와쨩?”


시선 끝에 서 있는 남자는 이와이즈미였다. 현실의 이와이즈미와 똑같은 생김새였다. 꿈속의 자신과 바탕색이 비슷하면서도 자수가 전혀 다른 옷을 입은 채 서 있는 남자는 분명 이와이즈미였다. 오이카와는 꿈속의 이와이즈미를 바라보았다. 역시 현실에선 절대로 하지 보지 못할 차림새였다. 오이카와는 바로 제 앞에 있지만 몇 킬로미터는 거뜬히 떨어져 있는 것 같은 꿈속의 둘을 바라보았다. 꿈속의 오이카와는 몇 번이고 이와이즈미의 이름을 부르다 종국엔 그를 끌어안았다. 꿈속의 이와이즈미도 그런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무언가를 살피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대뜸 오이카와의 볼을 붙잡고 키스를 날리는 것이 전부였다. 저 진한 애정행각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오이카와는 꿈속의 둘을 바라보며 인상을 썼다. 마치 꿈이 제게 이것은 네가 몰래 가져온 욕망임을 까발려 보여주는 듯해 불편함을 감출 수 없었다. 게다가 와중에 치졸한 질투심까지 들었으니 비참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저들을 볼 수 있는 자신과 다르게 자신은 저들에게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것을 깨닫자 질투심에 이어 알 수 없는 소외감까지 목뒤를 지그시 눌렀다. 정말 갈 데까지 갔구나. 오이카와는 고개를 빠르게 가로젓다 그들에게 다가갔다. 아니. 다가가려고 했다.


그들에게 다가서려는 순간 오이카와가 서 있는 곳이 또다시 바뀌었다. 새로운 장소는 아니었다. 연못가에 있기 전 앉아있었던 청()색 이불이 있는 방. 오이카와는 왜 자신이 또다시 이곳으로 날아왔는지 영문을 알지 못했다. 기실 꿈을 꾸는 내내 이 꿈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이카와는 제 손에 부드럽게 쥐이는 이불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문소리가 들렸다. 어느덧 오이카와가 앉은 침대 옆에 예의 아까와 같은 요란한 차림을 한 꿈속의 오이카와가 있었다. 문이 열리고 처음 보는 얼굴의 낯선 이가 등장했다. 새로운 등장인물이었다. 새로운 등장인물은 뱀과 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는 분명 처음 보는 인물임에도 묘하게 기분 나쁜 느낌을 받았다.

 

……전쟁…….

 

오이카와는 번쩍 크게 눈을 떴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한 번 남자를 살펴보았다. 처음 보는 이가 맞았다. 현실에서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어딘가……. 오이카와는 익숙함을 느꼈다. 동시에 이유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알 수 없는 본능이 계속해서 그를 거부했다. 미식거리는 속이 뜨거웠다. 오이카와는 덮고 있던 이불을 거둬내고 땅에 발을 디뎠다. 이번에야 말로 둘에게 다가갔다. 장면은 바뀌지 않았다.

 

차라리

그때 장면이 바뀌어야 했다!

 

그는 제가 서 있는 방 바깥으로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보고야 말았다. 오이카와는 내디디던 발을 그대로 옮겨 달렸다. 무언가 생각이 날 것만 같았다. 처음 보는 낯선 이와 낯선 풍경, 낯선 자신, 낯선 이와이즈미. 아니다. 이 모든 것은 낯설지 않다. 오이카와가 그것을 깨달을 즈음 꿈속의 그가 방문을 활짝 열었다. 화염의 증식이 한참인 바깥이 보였다.


이와쨩……!

이와쨩!”


꿈속의 오이카와와 꿈을 꾸고 있는 오이카와가 거의 동시에 그 이름을 외쳤다. 꿈을 꾸고 있는 오이카와가 꿈속의 오이카와를 따라 달음박질을 쳤다. 아까 전 연못에서 시선을 같이 움직인 것처럼 향하는 곳이 같았다. 매캐한 연기가 시야를 흐리게 했으나 발걸음은 어디를 가야하는지 알고 있다는 사람처럼 멋대로 움직였다. 평소 스스로도 의문을 가질 정도로 이유 없이 싫어하고 무서워하던 불길이 지금만큼은 무섭지 않았다. 단지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일까?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불길의 끝에 그가 있다. 불길 속에 그가 있다! 꿈을 꾸고 있는 오이카와가 계속해서 달렸다. 꿈속의 오이카와보다 늦게 달음박질을 시작했음에도 끝엔 그가 앞서고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와이즈미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다. 기억했다. 걸음을 뗄 때마다 불타오르는 나무와 함께 피어오르는 지난날들이 선명했다. 이 기억의 되찾음조차 익숙한 상황이었다. 오이카와는 달렸다. 이와이즈미를 향해 달렸다. 불이 퍼진 방문을 맨손으로 떨쳐내며 불렀다.


이와쨩!”


마침내 이와이즈미가 보였다. 연기 사이에서 기침을 내뱉는 그가 보였다. 피 묻은 검을 들고 있는 우직한 모습이 보였다. 오이카와가 그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달렸으면서 막상 이와이즈미를 발견하자 온 다리에 힘이 빠졌다. 그래도 오이카와는 걸음을 옮겼다. 완연히 들어차오는 기억들에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거의 1000년만의 재회였다. 1000년만의 1000년 전 이와이즈미였다. 1000. 1000. 일천년의 시간을 거슬러 지금에야 다시 처음의 이와이즈미를 보게 된 것이다! 다시보지 못할 것이라 여긴 그 사람을! 그 처음을! 제 사랑의 시초였던 이 남자를!


이와쨩.”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를 안고 싶었다. 그에게 안기고 싶었다. ……그러나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지나쳐갔다. 몸을 겹친 찰나가 있었으나 닿지 못하고 그대로 통과해버렸다. 오이카와가 그 허전함에 고개를 돌렸다. 이와이즈미는 그런 오이카와를 모른 채 여전히 달려갔다. 그리고 껴안았다. 오이카와를. 꿈을 꾸는 오이카와가 아닌 꿈속의 오이카와를. 오이카와는 그 모습을 허무하게 바라보았다. 꼭 제가 바랐던 것처럼 서로를 부둥켜안은 두 사람의 모습이 퍽 애달팠다. 오이카와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1000년 전에도 보지 못한 자신의 얼굴도 함께 바라보았다. 어느새 꿈을 꾸는 오이카와는 울 것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의 자신이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구나. 오이카와는 거의 1000년만에야 알 수 있었다.

 

너는 숨을 곳을 잘 찾고 나는 달리기를 잘 하니까. 그렇게 하자. 혹시 가는 길에 내가 다치면 네가 치료해주고 그러다보면 어떻게든 어디든 갈 수는 있겠지.

 

아니야. 그 말을 하지 말아줘. 오이카와가 중얼거렸다. 닿을 수 없는 살갗과 마찬가지로 닿을 수 없는 외침이었다. 오이카와는 이 장면의 마지막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알고 있음에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자신은 꿈을 꾸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꿈속의, 과거의, 저 과거를 현재로 살아가고 있는 저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미 제가 개입할 수 없는 일천년 전의 결말이었기 때문이다.

 

이와쨩…….

 

참 저때부터 많이도 그를 불러왔구나. 오이카와는 무언가가 저를 관통하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그 순간 눈을 감았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꿈임에도 그 감촉이 생생했다. 오이카와가 다시 눈을 떴다. 관통 당한 기분은 착각이 아니었던지 꿈을 꾸는 오이카와를 꿰뚫은 화살이 꿈속의 이와이즈미에게 꽂혔다. 그 순간에 그 등을 바라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과거의 저는 지금 제가 보는 것처럼 그를 끌어안기만 했다. 그때의 머릿속엔 할 줄 아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다. 한 평생 감흥 없이 손길 하나로 남을 치료해온 주제에 정작 이와이즈미가 다쳤을 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누구에게나 감탄과 경악을 자아냈던 능력이 그날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고 부질없는 것이 되어있었다. 가운데에 화살이 박힌 이와이즈미의 날개 뼈가 꿈틀거렸다. 흐르는 피가 멈춤을 몰랐다. 그래도 우직하고 단단한 등은 고통을 견디고 과거의 자신을 끌어안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그 모습을 보며 오한을 느꼈다.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시림을 참을 수 없었다.


1000년의 재회는 너무도 짧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조금 더 바라볼 걸. 조금 더 눈에 담을 걸. 1000년의 짤막한 재회 이후 곧바로 그의 죽음을 또다시 목도해야한다니 잔인했다. 괴로웠다. 그러면서도 눈을 뗄 수 없는 스스로가 가장 고통스러웠다. 오이카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꿈을 꾸고 있는 자신과 꿈속의 자신이 한 얼굴은 꼭 같은 감정을 담아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모두의 두려움을 받던 존재에서 가장 초라한 존재로 남아버린 스스로를 바라보았다. 스스로의 초라함을 견디지 못하고 모두를 죽여 버린 이기심을 바라보았다. 끝내 이와이즈미의 자국이 남은 곳에서 웅크리고 누운 추잡함을 바라보았다. 단도 끝에 서린 진득한 미련을 보았다.


깨고 싶어…….”


이제 그만 그 꿈에서 일어나고 싶었다. 만약 발버둥을 친다면 눈을 뜰 수 있을까?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럴 기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지르고 잡히지 않는 바닥을 할퀴는 것으로 눈을 뜰 수 있다고 해도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이제 제가 보고 있는 꿈속의 장면이 어디로 워프를 할지 알고 있었다. 그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니 이 토 나오는 과거를 더 이상 바라보고 싶지 않아도 바라봐야만 했다. 아직 여덟 명의 이와이즈미를 보지 못했다. 꿈은 곧 제게 여덟의 이와이즈미를 보여줄 것이다. 저의 소원에 갇혀 매 삶의 영원을 다른 사람은 담지도 못하게 된 불쌍한 이와이즈미들을 보게 될 것이다. 31, 26, 24, 27, 33, 한 번 더 27살과 33살 그리고 34살까지. 그 시작 혹은 중간 혹은 마지막을 보게 될 것이다. 오이카와가 과거의 자신에게로 다가갔다. 이미 리프를 선택한 채 눈을 감은 꿈속의 제 위로 몸을 겹쳤다. 역시 닿지는 못했다. 그저 같은 땅위로 겹쳐질 뿐이었다. 그럼에도 충분했다. 이와이즈미의 자국 위에 몸을 뉘인 것만으로 괜찮았다. 눈을 감았다. 과거의 자신과 함께 다음의 생으로 달려갔다.


오이카와의 예상대로 과거 여행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전쟁에 참전한 병사와 병사로 만났을 때, 평범한 백성과 백성이었을 때,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讎)의 가문 사이로 만났을 때, 목수와 귀족으로 만났을 때, 길거리 악사와 여행객로 만났을 때에도, 무명 소설가와 화가로 만났을 때에도, 소방관과 의사로 만났을 때에도, 그 모든 생의 눈감음을 전부 지켜보았다.

 

어떤 방법으로든 닿게 할 거야.

 

마지막 리프가 끝났을 때에야 더 이상 그의 눈에 담기는 풍경이 없었다. 전부 검게 칠해진 벽지만이 보였다. 더 이상 과거의 자신이 보이지 않았다. 과거의 이와이즈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몇 번째 깜빡거림인지 셀 새도 없이 곧장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야말로 눈을 뜰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이번엔 꿈이 아닌 지금 제가 살아가고 있는 마지막 리프의 삶에서 말이다. 마지막으로 주워 진 현재에서 말이다. 지금의 제가 가장 사랑하는 이와이즈미가 있는 그곳에서 말이다……. 오이카와가 눈을 떴다.


설레는 마음으로 눈을 감았던 것이 바로 몇 시간 전인데 눈을 뜰 때의 오이카와는 누구보다 고요했다. 오이카와는 일어나자마자 날짜를 확인했다. 1231. 오이카와는 직감했다. 왜 자신이 그 꿈을 꾼 것인지. 왜 갑작스럽게 평생 이와이즈미가 죽기 전엔 깨닫지 못했던 과거와 제 사명을 깨달은 것인지. 그는 끓어오르는 미련으로 억척스럽게 모든 것을 기억해낸 스스로를 진심으로 한 번 칭찬해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뒤로는 놀랍도록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행동했다. 이불을 개키고 아침밥을 먹고 샤워를 하고. 틈 사이사이 몇 번이고 이와이즈미가 보낸 메시지를 다시 읽어 내리기도 했다.


시간은 9시였다. 9. 9시라. 괜찮은 시간이었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만나고 오겠다며 현관을 나섰다. 그는 발걸음을 부지런히 했다. 신칸센은 날이 날인만큼 생각보다 붐볐다. 오이카와는 운 좋게 얻어낸 마지막 자리를 바라보았다. 12시가 되기 전 도착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기껏 이와이즈미가 죽기 전 기억을 찾아낸 보람이 없어졌다. 오이카와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처음이었다. 멀게만 느껴졌던 죽음이 이토록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처음이었다. 오이카와는 차창에 얼굴을 기댔다. 오늘이 꼭 남은 20년의 마지막 날이다.


오이카와가 도쿄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11시 반이었다. 그 장소가 도쿄인 것을 알아챌 수 있었던 건 본능이었다. 과연 이곳에 있겠구나, 싶었다. 몇 번이고 삶을 반복하면서 매번 똑같은 곳에 묻어두었으니 당연했다. 제가 오늘 12시에 죽을 것임을 알아챈 것과 마찬가지였다. 1000년 전의 시간과 지금의 날짜 계산이 같을 리가 없었다. 그냥 본능적으로 오늘 아침 눈을 뜨는 순간 과거의 자신들이 귓가에 속삭여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쿄의 이곳, 12시까지. 이런 식으로 말이다. 오이카와는 성큼성큼 걸음을 움직였다. 잠시라도 길을 헤매거나 시간을 지체했다간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 긴장 어린 땀이 등을 축축하게 적셔왔다.


오이카와가 이십 여분을 더 걸었을 때일까? 눈앞에 허름한 폐가가 보였다. 주택가가 밀접한 골목 사이에 굉장히 부조화적인 장소였다. 아마 오이카와가 아닌 다른 인물들은 저것이 존재하는지도 모를 것이다. 오이카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신 외엔 아무도 없었다. 오이카와가 그곳으로 발을 들였다. 마침내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도 자신도 살아있는 시간에 그것을 되찾았다. 꼭 매번 기억하지 못하고 후회했던 그것이다. 오이카와는 시간을 바라보았다. 1158. 초침은 빠르게 흘러갔다. 오이카와는 다급히 핸드폰을 꺼내어 라인창으로 향했다.


미안 조금 늦을 것 같아! 사랑해 완전 사랑해 이와쨩

 

장난기가 가득했으나 진심뿐이었다. 오이카와는 눈을 감았다.

12시가 되었다. 그의 1000년이 전부 끝났다.

 


처음을 합쳐 그들이 만난 것은 총 열 번. 그곳에서 오이카와 토오루가 이와이즈미 하지메를 만나기 위해 바친 수명의 시간은 도합 일천년. 무려 1000년의 시간이 사용되었을 때 오이카와는 제가 숨겨둔 세상의 절반을 발견한다. 한때 시대를 군림한 적()은 어디로 갔으며 또한 오이카와가 그토록 모든 삶에서 찾아 헤맨 그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오이카와 또한 첫 번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쉽사리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에 들이마신 세상의 절반이라면 알고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이번엔 일천년의 기록을 지켜온 이들에게 묻겠다.

과연 오이카와는 죽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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