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HQ / 전생파트 / 유혈, 폭력 요소



오이카와는 제 방을 정리했다. 이 방에서 생활한지도 벌써 7년이 가까이 흘렀다. 오이카와는 제 침구 밑바닥을 살폈다. 그 안에 위치한 자그마한 통은 마찬가지로 7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와이즈미에게도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잠들어 있는 곳이었다. 통은 어머니가 남기신 마지막 선물로 짐승의 뼈를 깎고 엮어 만든 것이라 들었다. ()의 물건을 함부로 건드릴 경우 악재가 따른다는 소문은 오이카와가 편리해하는 몇 안 되는 거짓 소문 중 하나였다. 덕분에 7년째 오이카와의 손길 외에는 누구의 손길도 묻지 않은 물건이었다. 기실 안에 들어있는 것들은 별 대단한 조각들이 아니었다. 그가 이와이즈미에게 선물 받았던 몇 가지 자그마한 물건들과 아끼는 장신구 그리고 아무 낙서나 적어댄 종이 몇 장이 전부였다. 그러나 존재만으로 감격스러워지는 것이 누구에게나 존재하지 않은가. 오이카와에겐 이것이 그와 같은 위치의 물건이었다. 오이카와는 슬쩍 꺼내본 통을 다시 안으로 집어넣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3년 전 전쟁이 한 차례 지나간 후로 오이카와가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일은 많이 줄었다. 그것이 못내 심심하기도 했으나 여유로움을 즐기는 것이 싫지는 않았다. 그때 문소리가 들렸다. 기척 하나 없는 방문이었다.


뭐야?”


지난번 시녀와 다르게 정말 발소리 하나 없는 시녀이겠거니 싶었지만 그의 눈앞에 나타난 존재는 의외의 인물이었다. 오이카와는 나타난 인물을 향해 흔치않게 노골적인 인상을 써보였다. 누가 보아도 명백한 거부의 표정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그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능글맞게 웃어보였다. 2년만의 만남인가? 낯선 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언뜻 반가움까지 서려있는 목소리였다. 오이카와는 끝내 석연치 않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낯선 이의 말대로 2년만의 만남이다. 낯선 이가 오이카와의 정면을 마주했다. 붉은 눈동자 두 개가 얽혔다. ()이었다.


갑작스럽게 오이카와를 찾아온 이는 멀리 떨어지지 않은 구역의 적()이었다. ()과 적()이 만나는 순간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두 가지 정도가 전부였다. 첫 번째로 서열의 정리를 위해 대립 구도로 마주치거나 두 번째로 새로운 적()이 임명될 때마다 그것을 알리기 위해 마주치는 것이 끝이었다. 그마저도 둘만의 만남은 극심한 찰나에 불과했다. 처음 마주했을 때 혹은 모종의 사건으로 별도의 친목을 쌓지 않는 한 적()과 적()이 다시 만나는 일은 드물었다. 그것이 동족을 꺼리는 오이카와라면 더욱 그랬다.


오이카와와 남자는 2년 전 남자가 적()의 자리를 계승받으며 한 번 만났던 적이 있다. 남자는 제 누이에게 리프의 순간을 선물하고 그 자리를 꿰찼다. 말이 좋아 리프를 선물한 것이지 빼앗은 것과 다름없었다. 마지막 자비라며 제 누이가 직접 리프를 할 수 있도록 지켜본 것이 협박과 빼앗음이 아니면 무엇일까. 그 당시의 첫 만남만으로 오이카와는 남자의 인상을 좋지 않게 평가했다. 제게 웃으면서 술잔을 건네는 모습이 영 능구렁이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오이카와는 이유 없는 남자의 등장에 의문을 감추지 못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방문이었다. 그 어떤 공지도 예고도 듣지 못했다.


왜 찾아온 거야.”


오이카와의 경계 어린 목소리에 남자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오이카와의 경계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얼굴이었다. 남자는 준비해온 대답처럼 매끄럽게 말했다.


곧 전쟁이 있을 것 같아서 도움을 청하고자 왔지.”

전하께는 미리 언질을 한 건가?”

이쪽에서 먼저 말을 꺼내주셔서 말이야. 고맙게.”

전하께서 먼저 말씀하셨다고?”

갑자기 왜 어울리지 않는 극존칭이야?”

원래 적()도 전하껜 존칭을 쓰는 법이잖아. 뭐가 문제야?”


오이카와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목소리에 콕콕 박힌 의심의 가시들은 쉽게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입을 열면 열수록 더욱 깊게 침투할 뿐이었다. 남자는 경계를 늦추지 않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남자는 마치 이제 막 글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에게 한 글자 한 글자를 설명해주는 것처럼 입모양을 지나치게 똑똑히 했다.


그거야 공식적인 자리에서만 아니었던가?”

상관하지 마.”

이해가 안 되는데.”


남자는 부자연스러운 손동작을 이어갔다. 그는 제 턱을 괸 채 인위적인 콧소리를 내보였다. 관절이 어긋난 나무 인형처럼 삐걱거리는 모양새가 거슬렸다. 오이카와는 제 귀에 달린 귀걸이 끝을 만지작거리며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이와이즈미에게 언질을 주고 온 것이라고 하기엔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이와이즈미가 정말 다른 나라 적()의 방문을 이리도 쉽게 허용했다고? 게다가 자신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이 자가 자신의 방에 찾아오는 동안? ……그럴 리가 없었다. 오이카와가 손가락으로 귀걸이를 타고 올라 제 귓불을 만지작거릴 즈음 갑작스럽게 비명소리가 들렸다. 날카롭게 찢어지는 목소리가 굵직했다. 오이카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자가 말했다.


너 정도 힘이라면 더 큰 세상을 가질 수 있을 텐데 왜 조용히 지내는 거지?”

그런 거 관심도 없어. 쓸데없는 질문 하지 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왜 온 거야.”

전쟁을 도와달라니까.”

난 전하의 허가가 없으면 안 움직여.”

그 전하가 죽고 나면?”

……?”


오이카와는 남자의 마지막 물음에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자칫 사고회로까지 멈출 뻔했으나 아득해지기도 전 남자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비명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오이카와는 그제야 기억을 더듬거렸다. 남자의 능력이 뭐였지? 제 기억으로 남자의 능력은 분명…….


전쟁이라고 했잖아?”


불이다. 오이카와가 그것을 깨닫는 순간 아까보다 더더욱 가까이서 한 차례 비명이 들렸다. 짐승이 화살에 꽂혔을 때 내는 것과 비슷한 죽음 앞의 단말마! 오이카와가 깨닫는 동시에 무릎을 움직여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갔다. 한지를 덧바른 문지방 너머가 평소보다 훨씬 붉었다. 왜 눈치를 채지 못한 것인지 스스로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애당초 남자가 이곳을 들어오는 걸 왜 몰랐지? 오이카와가 이와 같은 생각을 할 즈음 문지방이 불타올랐다. 그 흔한 효과음 하나 없이 불타 재가 되었다.


그러나 그 침묵도 찰나였다. 곧 여러 명의 비명 소리가 한데 뒤엉켜 곳곳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기괴한 소리가 당최 어느 쪽에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여기저기서 튀어 올랐다. 꼭 누군가 북을 치고 있는 것 같았다. 북이 찢어질 정도로 내려치고 있는 착각이 들었다. 둥둥거리는 뭉툭하면서도 공격적인 소리가 오이카와의 귓전을 맴돌았다. 그것이 제 심장 소리임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실 그 소리가 무엇이든 큰 상관은 없었다. 오이카와의 붉은 눈동자에 붉은 정면들이 틀어박혔다. 이상한 일이었다. 고개를 조금만 측면으로 틀어도 방금처럼 평화로운 색들이 한참이건만 제 정면만큼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꽉 깨물어 삼킨 후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목적지는 정해져있었다. 당장 제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난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야.”

기회는 얼어 죽을.”


오이카와는 제 발길을 잡아끄는 남자를 향해 침을 뱉었다. 시간만 있었다면 다가가 얼굴에 뱉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남자는 웃었고 오이카와는 걸음을 떼었다. 한 번 떼진 발걸음에 점점 속도가 붙었다. 고개만 돌리면 평화로운 장면이 나오던 제 방과 달리 방문을 나서자마자 허물어져가는 궁이 보였다. 기풍이 넘치던 고목은 초라한 소리와 함께 타들어가고 있었다. 곳곳에 어딘가가 관통 당한 신하들이 드러누워 있었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발바닥에 끈적거리는 피가 들러붙었다. 그 미끄러움에 몇 번 넘어질 고비를 넘긴 오이카와가 아무리 시야를 뻗어도 똑같은 상황 속에서 중얼거렸다.


이와쨩……!”


불안한 감정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목소리엔 믿음이 있었다. 그를 찾았더니 죽어있더라. 같은 이야기가 현실성이 없기 때문일까? 오이카와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일어날 수 없는 문장이었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가 있을 법한 곳으로 계속해서 달음박질을 쳤다. 발목이 꺾이고 무릎이 휘고 발바닥이 축축해져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이와쨩, 이와쨩. 오이카와는 갓 태어나 부모를 찾는 병아리 새끼처럼 그 이름을 울어댔다. 그 사이 몇 명이 더 바닥을 향해 엎어졌다. 오이카와는 그동안 두 차례의 전쟁을 겪어왔으며 여러 책이나 이야기 혹은 제 눈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봐왔으나 이렇게 얌전히 바스러지는 죽음을 목도한 것은 처음이었다.


전쟁터에선 당장 바닥에 떨어진 머리통 위로 말굽이 꽂혔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바닥에 떨어진 머리통 위로 말굽 대신 불씨가 흩날렸다. 북소리는 이제 사람들의 머리가 떨어지는 곳에서 들리고 있었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일정한 규칙 없이 제 멋대로 울려댔다. 뇌수가 터지는 소리였다. 짐짓 그 사이로 칼과 칼이 맞닿는 소리가 들렸다. 오이카와가 바닥에 쓰러진 한 신하의 검을 빼들고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비록 불타오르고 있으나 전체가 불길에 휘감긴 것은 아니었고 나무가 타들어가고 있으나 분명 타지 않는 재질의 물건 또한 존재했다. 다만 달구어질 뿐이었다. 그가 잡아챈 검도 달리는 바닥도 잔뜩 달구어져 뜨거웠다.


이와쨩!”

오이카와,”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를 부르는 동시에 제 앞에 있는 남자의 복부를 깊이 찔렀다. 피가 튀었다. 이와이즈미는 제 볼에 뛰어든 피를 닦아낼 새도 없이 다가오는 오이카와를 끌어안았다. 오이카와를 끌어안은 몸이 한참 위로 들썩거리다 차분해지기를 반복했다. 평소보다 숨을 크게 쉬어야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왔다 나가는 듯 했다. 오이카와가 빼곡하게 들어찬 탄 냄새 가운데에서 이와이즈미의 체취를 들이마셨다. 땀 냄새가 진했다. 이와이즈미는 한 손으로는 오이카와의 어깨를 감싸고 한 손으로는 여전히 검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오이카와의 눈꺼풀에 짧게 입을 맞춘 후 주위를 살폈다. “왕이 적()에게 나라를 팔아 넘겼다.” 제 앞에서 쓰러지던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추잡하고 더러운 왕 같으니!” 어디에서부터 나온 소문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번엔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를 끌어안은 채로 검을 던졌다. 이미 복부가 뚫린 남자는 다시 한 번 비명을 질렀다이와이즈미는 창자 끝이 튀어나온 죽은 자의 모습을 바라보다 오이카와와 함께 숨을 들이마셨다. 들이마신 숨을 내뱉는 시간은 조금 달랐다. 이와이즈미는 꽤 오래 숨을 머물고 간직하다 그것을 내뱉었다.


신뢰를 얻기란 어렵다. 얻는다 해도 유지는 보장되지 않는다. 신뢰는 어렵고 의심은 쉽다. 신뢰를 얻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값을 치러야만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 신뢰이다. 이와이즈미는 가슴이 잔뜩 올라갈 정도로 가득한 숨을 오랜 시간에 걸쳐 뱉었다. 자신은 이들이 요구한 값을 치르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피해갈 수 없는 심판이었다. 이와이즈미는 빠르게 상황을 정리해가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상황이 극에 치달으면 치달을수록 차분해지는 착각이 들었다. 일전에 제가 반란을 일으키고 제 손으로 직접 아버지와 형제들을 죽였을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그때의 아버지 또한 자신과 같았을까. 이와이즈미는 제게 달라붙어있는 오이카와의 팔을 잡아채며 입을 열었다. 아니다. 그럴 리 없다. 아버지는 저와 같은 감정을 가졌을 리 없다. 이와이즈미의 머릿속으로 살려달라고 말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나갔다. 그러나 자신은 그럴 수 없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비단 혼자가 아닌 것은 사람을 강하고 또 나약하게 만들었다.


잘 들어.”

안 들을래.”


이와이즈미가 입을 열자마자 오이카와의 대답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이와이즈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오이카와가 곧장 제 말을 들어줄 것이라 생각하진 않은 덕분이었다. 이와이즈미의 귓가에 발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없다. 그의 판단으로는 그랬다. 기름 냄새가 자꾸만 후각을 자극했다. 간간이 그 안에 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필시 그것은 저를 찾아온 향이리라. 이와이즈미는 안고 있던 오이카와를 떼어냈다. 이와이즈미가 열린 입술을 부러 더 크게 벌려가며 단호히 말했다.


옆 나라로 가. 살 수 있어. 넌 능력도 좋으니까 어디든 일단 받아줄 거다. 당장 왕궁을 빠져나가서 세 번째로 보이는 마을에 가면 그곳에,”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오이카와.”

설마 내가 그러라 한다고 정말 그럴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나며 입을 열었다. 이와이즈미 만큼이나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 사이 발소리는 더더욱 가까워졌다. 용케 몸을 피해 지금까지 숨어 있던 인물들의 비명소리도 함께했다. 이와이즈미는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를 올려다보는 눈길이 곧았다.


……표적이 누구라고 생각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해.”


그는 객관적인 사실을 읊었다. 그러려고 했다. 막다른 길에 몰렸을 때 그의 방법은 많지 않았다. 한 번 터진 말은 지나치게 빨리 이어졌다. 속사포처럼 뱉어진 말들은 감정이 제대로 묻어있는 것이 없었다. 과연 오이카와가 제 거짓말을 눈치 채지 못할까? 서툰 원망에 자신을 떠나줄까? 이와이즈미는 제 형편없는 연기력을 탓했다.


다 너 때문이야. 사람도 아닌 존재한테 내가,”


이와이즈미는 눈을 깜빡거리고 싶을 때마다 어금니로 입안을 깨물었다. 피가 터지는 맛이 생생했다. 내벽을 타고 흘러 식도를 내려가는 비릿함이 얼얼함에 가려져 점차 무뎌졌다. 그는 그때마다 다시 같은 곳을 깨물었다. 입안에 침 대신 피가 가득 고일 때까지 이와 같은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깨물고 깨물고 깨물고 깨물고……, 깨물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나중에는 아무 감각이 들지 않았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괜히 너를,”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의 말에도 그의 옷깃을 놓지 않았다. 다시 한 번 폭언을 외치기 위해 입안을 깨문 다음 목소리를 준비했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날카로운 말을 뱉어야 했다. 이와이즈미는 피가 흐르는 턱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젠장!”


그러나 튀어나온 것은 얼마나 유약한 외침이던가. 이와이즈미는 들고 있던 검을 내던지고 머리칼을 헝클었다. 차마 끝까지 손에서 내던지지 못한 갈등이 그의 머리칼 곳곳에 파고들었다. 이와이즈미가 다시 오이카와를 끌어안았다. 원망을 외치려던 찰나의 과거와는 엇나간 행동이었다. 제 머리칼을 헝클이던 손가락이 이번엔 오이카와의 머리칼 사이로 깊게 뻗어나갔다. 꼭 제가 있어야 하는 곳을 찾았다는 듯 강하게 움켜쥐었다. 오이카와의 얼굴이 그의 손힘을 견디지 못하고 어깨 위로 파묻혔다. 곧 오이카와도 그의 겨드랑이 사이를 비집고 팔을 집어넣어 그의 등짝을 끌어안았다. 오이카와의 손바닥에 이와이즈미의 날개 뼈가 느껴졌다. 둘은 다시 서로를 마주 안았다. 그들의 머리, , 가슴, , 어느 한 곳 빈틈이 없었다. 그 틈으로 작은 먼지조차 허용하지 않을 만큼 강한 포옹이었다. 그때만큼은 세상이 고요했다. 그때만큼은 적어도 감은 눈이 평화로웠다. 물론 그 평화가 긴 시간 지속될 수는 없었다. 둘만이 존재하는 세상을 만끽하기엔 시간이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기름과 피 냄새 속에서 어떻게든 그의 체취를 들이마셨다. 오이카와도 다를 건 없었다. 덕분에 둘의 숨소리는 자꾸만 커졌다. 나무로 된 기둥 하나가 쓰러졌다. 나무가 타들어가는 소리의 간격이 점점 짧아졌다.


……오이카와.”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와이즈미였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끌어안은 채 말을 이었다. 그랬기에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가 어떤 표정으로 제게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느껴지는 느낌만으로 자신과 비슷한 얼굴을 하였으리라 생각했다. 비록 지금 거울이 없으니 제 얼굴을 볼 수도 없었지만 말이다. 오이카와가 조금 더 세게 이와이즈미를 끌어안았다. 숨소리는 여전히 컸다. 이와이즈미의 목소리에도 평소보다 숨소리가 더 많이 섞여 나왔다.


네가 먼저 도망가고 내가 따라가는 걸로 하자.”

…….”

너는 숨을 곳을 잘 찾고 나는 달리기를 잘 하니까. 그렇게 하자. 혹시 가는 길에 내가 다치면 네가 치료해주고 그러다보면 어떻게든 어디든 갈 수는 있겠지.”


낮게 읊조리는 말투엔 쇳소리가 심했다. 오이카와가 끌어안고 있는 날개 뼈 부근이 그가 입을 열 때마다 짧게 움직였다. 오이카와는 그 움직임을 느끼며 침을 삼켰다. 기실 그의 말은 온통 희망 덩어리였다. 최악의 상황과는 거리가 먼 아주 희망차고 밝은 미래였다. 적어도 화약 냄새와 피 냄새가 득실거리는 이곳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당장 죽음과 이별의 기운이 어느 때보다 다가오는 이 순간에서 신용이 가는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와이즈미는 희망을 나열했다. 가장 극적인 전개만을 열거했다. 그것이 오이카와를 안심시키기 위한 것인지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한 것인지 애매모호했으나 그는 끊임없이 이상적인 내일을 말했다. 평소 지극히 현실적인 사실만을 말하던 그가 내뱉으니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아무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반박을 하면 정말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와이즈미가 입술을 깨물었다. 습관처럼 깨물어댄 입술은 이제 지겹다는 듯 피를 굳혀 검붉은 딱지를 만들어냈다. 목소리에도 향이 있다면 필시 그의 목소리는 비릿한 향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어디든 가자. 오이카와. 그러니까 오늘은 제발 먼저 가줘.”


마지막 목소리엔 공기가 잔뜩 섞였다. 오이카와가 천천히 이와이즈미에게서 떨어졌다. 긴 포옹 이후 처음 얼굴을 마주했다.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에게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 했다. 언뜻 그의 입술에 오이카와.” 그 이름 하나가 머물렀다. 지내온 계절의 순간마다 몇 번을 발음한 이름이었다. 후에 눈을 감는 때 무엇이 가장 생각나느냐고 묻는다면 고민 없이 외칠 이름이었다. 혹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지나 만약 세상이 두 쪽 나고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어 기억 속의 얼굴과 목소리가 어쩔 수 없이 조금 흐릿해진다고 하더라도 끝내 선명할 단어였다. 절대로 평생 뇌리에 남을 이름이었다. 그럼에도 이와이즈미는 몇 번이고 되새기기 위해 그 이름을 불러야만 했다. 살아있는 이유 중 어딘가에 그 이름을 불러야 한다는 사실이 포함된 사람처럼 굳이 할 말이 없어도 그 이름을 중얼거려야 할 것 같았다. 이와이즈미는 입을 열었다. 입술을 둥글게 말았다.


이와쨩……!”


그러나 상대의 이름을 먼저 외친 것은 오이카와였다. 이와이즈미의 등 뒤에 꽂힌 화살 하나와 함께 덩그러니 그 외침 하나가 튀어나갔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등에 꽂힌 화살을 보며 어찌할 줄을 몰랐다. 짧게 비틀거리며 제게 기댄 이와이즈미를 바라보며 손을 떨었다. 이와이즈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화살이 너무도 비현실적이었다. 오이카와가 제어되지 않을 만큼 흔들리는 손길로 꾸역꾸역 그의 등을 더듬었다. 치료할 수 있다. 치료할 수 있다. 치료할 수 있다. 그는 그 사실을 되뇌며 심호흡을 했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손만 가져다대면 다 나을 것이다. 지금까지 제가 얼마나 많은 이들을 살려왔던가.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등에 박힌 화살을 힘주어 빼내었다. 이와이즈미가 짧게 신음했다. 오이카와를 붙잡은 손목에 힘이 들어갔다. 오이카와가 피가 흐르는 부분에 손을 가져갔다.


!”


피가 멈춰야 했다. 오이카와의 능력대로라면 당연히 피가 멎어야 했다. 그러나 오이카와의 손길이 닿았음에도 이와이즈미의 피는 멈추지 않았다. 오이카와가 다급하게 제가 바닥에 던졌던 화살을 바라보았다. 오이카와의 손바닥에 이와이즈미의 피가 흥건했다. 오이카와가 제 손바닥을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때 그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린 다는 것이 어떤 감정인지 알았다. 오히려 덤덤했던 것은 이와이즈미였다. 이와이즈미는 여전히 손을 떨며 이해하지 못하는 오이카와의 팔뚝을 다시금 붙잡았다.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그 물음만이 정신을 지배한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사람처럼 목소리를 쥐어짜내 한 번 더 물었다. 누구에게 묻는 질문인지 알 수 없었다. “……?” 억울한 의문이었다. 이와이즈미가 더 이상 참기 괴롭다는 듯 턱으로 피를 흘려보냈다. 입안이 끈적거렸다. 오이카와가 놀라 손을 뻗었다.


소용없어. 그 화살 내가 만들었거든.”


그때 낯선 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이와이즈미가 반사적으로 오이카와를 밀었다. 마지막 남은 힘을 다 쥐어짜낸 동작이었다. 그건 일시적인 본능이었으며 덧붙여 이와이즈미의 마지막 이성이었다. 오이카와가 생각지 못한 힘에 그대로 나뒹굴어졌다. 딱딱하면서도 뜨거운 바닥이 등 뒤로 느껴졌다. 건방진 온도였다. 오이카와는 바닥에 넘어지자마자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방금까지 제가 있던 곳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불길이 차올랐다.


이제와 우습지만 비극적인 결말을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다는 소리는 하지 않겠다. 제 존재의 근원이 마냥 아름답지 못하니 상상하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그러나 이토록 비극적일 줄이야. 이렇게나 비극적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현실은 상상보다 시시하다고 하지만 이 역시 제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일까? 지금의 현실은 상상보다 훨씬 더 비극적이고 괴로웠다. 오이카와가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숨을 억지로 끌어 모았다. 그조차 입을 벌렸을 뿐 제대로 숨이 들어차지는 못했다.


기회를 주는 거라고 했잖아.”


()의 목소리가 울렸으나 오이카와의 시선은 이와이즈미에게 향한 그대로였다. 그때 누구의 목소리가 울렸든 오이카와에게 별 영향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설사 세상을 창조한 조물주가 내려와 입을 열었다고 해도 지금의 오이카와에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에 있어선 어떤 존재든 제 3자에 불과했다. 오이카와는 천천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짧게 자른 손톱 덕에 아무리 세게 주먹을 쥐어도 자국 하나 남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제대로 들이마신 적도 없는 숨을 끝까지 내뱉었다. 기도와 폐가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코끝엔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타는 냄새. 그것이 이와이즈미라고 특이할 것은 없었다. 이와이즈미 또한 바닥에 쓰러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어가고 있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같은 향을 냈다. 오이카와가 즐겨 맡던 체취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단지 살이 타는 냄새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건 살이 타는 냄새였다. 살이 타는 냄새가 났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와이즈미의 살이 타는 냄새가! 이와이즈미의 뼈가 타는 냄새가! 이와이즈미의 머리카락이 타는 냄새가! 이와이즈미의 옷이 타는 냄새가! 이와이즈미가 타고 있는 냄새가! 오이카와는 그것을 받아드리는 데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머리와 코는 전부 이해하고 있는 내용이었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이 모든 상황을 인정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오이카와는 그 난리 속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 방금까지 축축하던 눈가가 급속도로 메말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코끝엔 여전히 이와이즈미의 살이 타들어가는 냄새가 잔류했다. 오이카와는 제가 바닥에 나뒹구느라 제대로 보지 못한 이와이즈미의 마지막을 회상했다. 화살이 꽂혔던 등. 저를 밀치고 뜨거운 불에 집어삼켜진 저보다 조금 작은 덩치. 마지막으로 저를 쳐다보는 것 같던 눈길. 발음하려다 그대로 바닥에 꽂히고만 제 이름. 오이카와는 마침내 모든 것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눈을 떴다. 다시 눈을 뜬 오이카와의 눈에 담긴 것은 마지막과 마찬가지로 타들어가는 이와이즈미였다.


오이카와는 그 광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재가 되어가는 이와이즈미의 분해 그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쓸데없이 효과음이 많았다. 그 사이에서 오이카와만이 침묵을 품에 안고 있었다.


오히려 그것을 바라보는 적()이 당황한 참이었다. 남자는 스쳐가듯 있었던 표정 변화 뒤로 내내 덤덤한 오이카와를 가만 바라보았다. 기실 남자는 눈치를 보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짓고 있는 저것은 어떤 표정인가, 어떤 감정인가에 대하여 말이다. 분노를 넘어선 허무? 단순한 아쉬움? 현실에 대한 부정? 그것도 아니라면 제 생각과 다르게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유흥거리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것일까? 남자가 그 모든 경우의 수를 재빠르게 돌아봤다. 애써 드러내지 않는 표정과 다르게 남자의 머리는 해답을 찾기 위해 바쁘게 회전하고 있었다. 생각에도 소리라는 것이 있다면 지금쯤 남자의 머리 위는 커다란 맷돌이 갈리는 소리가 반복되었을 것이다. 남자가 끊임없이 맷돌을 돌렸다. 오이카와는 그제야 남자의 존재를 깨달았다는 듯 그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고개를 돌리는 것도 아니었다. 한 번 눈길을 옆으로 돌렸다가 만 것이 전부였다. 오이카와가 입을 열었다. 낮은 목소리였다. 아마 그의 목울대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낮은 목소리임이 틀림없었다.


……. 내가 이와쨩이 죽으면 사리분별도 하지 못하고 날뛸 것 같았어?”

아니라는 말은 못하겠네.”

착각이 너무 많아.”


끝으로 갈수록 누군가에게 말한다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운 크기였다. 남자가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 끝에 인상을 썼다. 주변이 너무 소란스러웠기에 더욱 들리지 않았다. 그 사이 오이카와는 스스로가 뱉은 말에서 홀로 해답을 찾은 것인지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다들 너무 많은 착각을 했다. 심지어 자신까지도. 오이카와는 이제 완벽히 재가 되어가는 이와이즈미의 형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이와이즈미의 잔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내가 이와쨩을 가지고 협박한다고 네 말을 들었을 거라고 생각해? 이와쨩이 죽었다고 고분고분하게 당할 거라고 생각했니?”


이곳의 모두가 지난 시간동안 너무 많은 착각을 했다. 그토록 오이카와를 경계하고 두려워하고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믿지 않았던 주제에 오이카와가 가진 믿음만큼은 믿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이카와의 믿음은 그들을 향한 것이 아닌 이와이즈미를 향한 것이었다. 그들이 오이카와를 믿지 않았던 것처럼 오이카와 또한 그들을 믿은 적이 없다. 더 높은 권력을 가지고 싶다 생각한 적이 없는 것처럼 이 나라를 지키고 싶다 생각 한 적도 없다. 기실 그는 이 나라가 어디든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애정 없이 제 할 일을 하고 시간을 보내고.


오이카와가 그것보다 조금 더 나라에 개입을 했던 이유는 순수하게 이와이즈미 때문이었다. 귀찮음을 이기고 끊임없이 다친 자들을 치료했던 것은 순전히 이와이즈미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이카와는 단 한 번도 이들에게 애정을 가진 적이 없다. 오이카와는 단 한 번도 이들을 믿은 적이 없다. 당연히 지키고 싶었던 적도 없다. 그래도 이와이즈미의 믿음이 버려질 줄이야. 이와이즈미는 이들을 애정 했고 믿었고 지키고 싶어 했다. 이들도 이와이즈미를 애정하고 믿고 있는 줄 알았다. 그랬는데 이와이즈미를 버릴 줄이야. 감히 이와이즈미를 배신할 줄이야! 오이카와는 그것이 싫었다. 이와이즈미는 이들을 믿었고 이들을 지키고 싶어 했다. 그가 이 작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오이카와는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오이카와는 그다지 애정 없는 이곳을 게을리 살피지 않았다. 제가 이들을 믿지는 않았으나 이와이즈미를 믿는 이들의 믿음을 믿었고 이들을 지키고 싶지는 않았으나 이와이즈미가 지키고 싶어 하는 이들을 지키고 싶어 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결론인가. 이들은 이와이즈미의 믿음을 배신했다. 이와이즈미가 죽었다. 자신의 생각보다 더욱 비참하고 더욱 비극적으로 목숨을 달리했다. 이와이즈미가 죽었다. 이와이즈미가 죽었다……. 그 사실을 곱씹을수록 뚜렷해지는 듯 했다. 이제 오이카와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들을 향한 어쭙잖던 믿음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도. 무엇 하나 남은 게 없다. 이와이즈미의 죽음과 동시에 모든 것이 죽어버렸다. 재 한 줌 남기지 않고 전부 사라졌다. 전부 죽어버렸다. 전부 살해당했다. 전부 목숨을 잃었다. 다름 아닌 이들의 선택에 의해서! 이와이즈미가 애정하고 믿고 지키고 싶어 했던 이들의 손끝에서! 오이카와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숨소리가 작게 섞인 목소리는 건조했다.


그래. 이와쨩이 죽었네.”

내가 아니었어도 저 왕은 이렇게 됐을 거다. 애초에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네 말이 맞아.”


오이카와는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굳어가는 핏줄 아래로 굵직한 손금 몇 개가 보였다. 완연한 인간도 아닌 주제에 우스운 흔적이었다. 오이카와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이왕이라면 전쟁을 치른 놈들 중 미래를 볼 수 있는 녀석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오이카와는 의미 없는 손짓을 반복하다 어느 책에서 보았던 구절을 떠올렸다.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을지 알지 못할 선대의 책이었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는 우리가 때때로 서열 싸움을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단순히 힘만으로 누구의 서열이 더 높은지를 따지기 위해서? 그저 영토를 늘리기 위해?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이들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았다. 간단하게 생각해보자. 이들이 혹할 만큼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일천년을 살 수 있는 이들에게 고작 조금 더 넓은 땅덩어리와 별로 부딪히는 일도 없는 동족과의 서열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몇 없는 동족의 심장에 칼끝을 꽂아 넣는 이유가 무엇일까.


바람이었던가.”


오이카와는 지난번 제가 죽였던 적()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일천년을 살 수 있는 이들에게 고작 조금 더 넓은 땅덩어리와 별로 부딪히는 일도 없는 동족과의 서열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몇 없는 동족의 심장에 칼끝을 꽂아 넣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건 평범한 이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이유였다. 오이카와는 이제야 적()과 평범한 이들의 공통점을 찾은 기분이 들었다. 욕심의 색만큼은 종을 막론하고 같았다. 몇 년 만에 찾은 공통점이 이런 것이라니 허무했다. 이들이 싸움을 이어온 원인은 간단했다. 평범한 이들이 더 큰 부, 더 큰 영토, 더 큰 명예를 갖기 위해 싸우는 것처럼 이들 역시 그렇게 해야만 원하는 것이 손에 들어왔으니까. 이들은 각자를 죽일 경우 그들이 가진 고유의 힘을 어느 정도 습득할 수 있다. 만약 누군가가 오이카와를 죽이고 리프의 순간을 선사한다면 오이카와의 능력을 가질 수 있을 거란 얘기였다.


그러나 능력이란 그 능력이 가진 속성이 같아도 그것을 누가 쓰느냐에 따라 또 달라진다. 아무리 거대한 힘이라도 쓰는 자가 어리석다면 빛을 볼 수 없다. 아무리 미약한 힘이더라도 영리한 자가 쓰면 빛을 볼 수 있다. 운이 좋았던지 지금까지 오이카와가 만난 이들은 대부분이 어리석었다. 거대한 능력을 쥐고도 할 줄 아는 것이 휘두르는 것 밖에 없었지. 그러나 혀가 차질 만큼 안쓰럽던 그들의 어리석음이 새삼 감사해지는 순간이었다. 오이카와는 영리하다. 영리하고 또 힘을 가졌다. 이토록 완벽한 그릇이 있을까. 오이카와는 남자를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여기저기 갈라진 입술이 벌어졌다. 남자를 비롯하여 이 나라의 모든 사람에게 해줄 공식적인 유언이었다.


네가 아니었더라도 이와쨩은 죽었겠지. 그 이유에 내가 있을 거고. 그렇지만 그게 언제가 되었든, 누구에 의해서든.”


매일을 꼬박 적()이라 부르는 주제에 다들 잊었다.


이와쨩이 죽었는데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그의 존재는 가장 강력한 적()이었음을.

 

 

  

죽음의 소리는 언뜻 굉장히 시끄러운 듯 해보이면서 또 한 없이 고요하다. 금방 모든 것이 절정을 친 다음 사라지기 때문이다. 공기를 들이마시던 존재가 언제 그랬냐는 듯 공기 속으로 스며든다. 오이카와는 한 차례 많은 이들의 절정이 지나친 순간을 걷고 있었다.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 같은 게 아니라 정말 혼자뿐이었다. 적어도 이 나라에서 만큼은 말이다. 오이카와는 여물어가던 토지가 다시금 황무지로 돌아온 것을 보며 허탈함을 느꼈다. 공들인 탑이 전부 무너진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허탈감의 중간 중간에도 통쾌함이 섞여있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못했다. 종국엔 통쾌함이 더 진했다. 우스운 것이 그래도 끝끝내 두 감정 중 하나만 존재할 수는 없었다. 마냥 허탈하지도 마냥 통쾌하지도 못했다. 그 두 감정의 저울을 왔다 갔다 하는 게 고작이었다.


오이카와는 제 방으로 돌아왔다. 제 방은 비교적 깔끔함을 가지고 있었다. 쑥대밭이 된 바깥과는 전혀 다른 풍경을 아직 유지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고민 없이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리곤 허리를 숙였다. 손을 뻗자 얌전히 자리한 통이 느껴졌다. 오이카와는 불쑥 그것을 꺼내들곤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잠깐의 포옹이었다. 그 뒤 그는 거침없이 그 안을 헤집었다. 좁다란 통 안에 큰 파장이 일었다. 오이카와는 그 안에서 제 네 번째 손가락만한 병 하나를 꺼내들었다. 통을 내려놓았다. 그 위로 짧은 입맞춤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와. 이와쨩은 탄 부분도 못생겼어.”


오이카와는 모든 것을 다 쓸어버리고도 남겨둔 그의 옆으로 향했다. 구부정하게 앉아 그의 흔적을 바라보다 이내 털썩 주저앉았다. 그을린 자리를 매만지던 오이카와는 다 타버린 후에도 남아 있는 몇 가지를 만지작거렸다. 그 중 하나가 이와이즈미 본인이 매일 지니고 다니던 단도였다. 그러고 보니 이걸로 제 손바닥을 긋던 무모한 행동을 했었지. 오이카와는 그날의 충격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대단한 날이 아닐 수 없었다. 아마 제 인생의 가장 큰 방향점이 된 날이 아닐까 싶었다. 너무 많은 것들의 출발점이 된 날이 아닐까 싶었다. 오이카와는 문득 저를 향하던 소문 하나를 떠올렸다. 저와 피가 닿으면 악재가 생긴다는 소문 때문에 제가 다쳤음을 알고도 끝내 말을 걸어오지 못했던 시녀가 떠올랐다. 사실은 소문이 진짜였던 걸까? 저와 피를 맞닿았기 때문에 이와이즈미에게 악재가 들이닥친 걸까? 생각하니 억울함보다는 슬픔이 먼저 다가왔다.


그때 오이카와는 제가 슬픔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슬픔이 넘쳐 견디기 괴로웠다. 눈물보다 좌절이 빨랐고 좌절보다 비명이 더 빨랐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오이카와는 제 살짝 찢어진 의복의 옆구리를 들췄다. 이제 희미한 흉터 자국이 보였다. 오이카와는 그것을 보는 순간 망설임 없이 단도로 그 부근을 찢었다. 피가 다시 흘렀다. 애써 세월 동안 정체를 숨겨갔던 흉터 위로 또 상처가 생겼다. 그다지 의미가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이미 아문 옆구리를 다시 찢는다고 무언가가 달라질 리 없었다. 이제 이 옆구리와 마주할 수 있는 손바닥도 없었다. 그래도 오이카와는 옆구리를 찢었다. 흐르는 피를 보았다. 칼날 끝을 타고 내려가는 핏방울들을 바라보며 그가 그것을 이와이즈미의 자국 위로 흩뿌렸다.


이와쨩이 먼저 숨을 곳을 찾으러 갔지만 괜찮아. 오이카와씨도 나름 달리기가 빠르니까.”


개개인에게 있어 영원은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일까. 이 또한 적당한 기준을 세워 대강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라고 잡았을 때 한 사람이 가진 영원의 시간은 지극히 짧다. 그러니까 사람의 삶을 영원이라고 하는 대신 평생(平生)이라고 칭하겠지. 그러나 어떻게 보면 그 평생이야 말로 절대적인 영원일 것이다. 나이가 들고 수명이 다 해 죽어버리고 또다시 태어나고를 반복한다고 해도 결국 모든 삶이 끝날 때마다 그 사람의 잔해는 여전히 지속되는 세상을 떠돈다. 오이카와가 지금 바로 리프를 택하고 죽어버린 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지금의 삶을 살았던 오이카와는 죽은 채 영원을 떠다니는 것으로 남겨진다. 지금의 오이카와는 이 시간에 갇혀 이 세상이 끝나는 순간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이와이즈미는 그 영원의 시간 동안 오이카와를 기억해주겠노라 말했다. 분명 그것이면 충분한 시절이 오이카와에게도 있었다. 그리고 이와이즈미는 정말로 오이카와의 모든 것을 기억한 채 사라졌다. 그렇게 영원히 남게 되었다.


그땐 꼭 내가 치료해줄게.”


그러나 욕심이란 감정이 어디 자라지 않을 녀석이던가. 쉬지 않고 자라난 욕심은 이제 외면할 수도 없는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비단 이번 생의 이와이즈미에게 영원히 남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오이카와는 더 많은 것을 원했다. 더 많은 시간을 원했다. 일천년을 바란 것이 아니다. 아니. 아니다. 일천년을 바랐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만약 제 수명의 길이가 1000년이 아닌 50, 100, 500년 혹은 10000년이었다고 해도 같은 욕심을 꿈꿨을 것이다. 얼마의 수명이 있든 그가 바라는 욕심의 내용은 같을 것이다. 오이카와가 누군가의 영원에 한 번이라도 남는 것을 바랐던 적이 있다면 지금은 달랐다. 지금은 이와이즈미의 반복되는 순환 그 모든 삶의 영원 속에, 그리고 제게 있을 기다란 시간의 마지막 순간까지. 제 삶의 영원까지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준비했어.”


드디어 오이카와가 눈물을 흘렸다. 드디어 눈물의 시간이었다. 온전한 슬픔의 시간이었다. 이제야 입술을 뚫고 나오는 새된 비명소리가 천장을 긁었다. 비명과 함께 덜 익은 채 흐르는 눈물들이 굵직했다. 날 것으로 벌건 감정들이 적나라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보다도 붉었다. 그는 벌건 눈동자로, 벌건 감정으로 한참을 울었다. 옆구리에선 끊임없이 피가 흘렀다. 그의 온몸이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그을린 자국 위로 몸을 겹쳐 올리는 내내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 이와이즈미가 남긴 마지막 자국 위로 제 몸을 겹치며 끊임없이 울었다. 끊임없이 통곡했다. 오열의 반복이었다. 제 심장에 스스로 칼을 꽂아 넣는 그 순간까지 말이다. 오이카와가 온통 붉은 모든 것들 사이에서 중얼거렸다. 제 욕심을 말했다. 이미 그의 피가 묻은 칼날이 다시 한 번 오이카와의 심장을 관통했다. 눈을 뜨면 언제 죽었냐는 듯 다시 삶이 이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태어날 그가 향할 곳은……. 그가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단 한 곳은…….


 

80년의 몫이 지나갔다. 그것이 그의 첫 리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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