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HQ / 전생파트 / 약간의 유혈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며 또다시 계절은 순환을 반복한다. 살면서 다시없을 열아홉의 하루하루가 지나 똑같이 다시없을 스물의 하루하루들을 또 지나친다. 어느덧 그들의 나이는 스물다섯 번째 순서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의 나이가 벌써 스물다섯이 되었다.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가 몇 번의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을 반복했다. 이와이즈미는 약속대로 그 시간이 흐르는 내내 오이카와의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그리고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의 스물다섯 번째 생일을 축하해주고도 꽤 오랜 기간 몇 번의 해가 뜨고 짐을 반복할 즈음으로 시간은 흘러간다.


이와쨩!”

밖에서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쿠소.”

그러는 이와쨩은? 그리고 지금은 아무도 없잖아.”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생긴 변화들을 전부 설명하자면 복잡하니 단순하게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 각자의 영원 속 서로에 대한 것들이 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둘이 가진 영원 동안 영원히 기억할 것들이 많아졌다고. 오이카와는 매번 꼬박 꼬박 붙이던 전하라는 호칭을 구석에 집어넣고 어느 날부터 이와쨩이라는 저만의 부름을 말하기 바빴다. 이와이즈미는 여전히 왕으로서 나라를 돌보고 있었으며 오이카와의 뿔과 적()색 눈동자, 위치 또한 건재했다. 전쟁이 한 차례 더 있었으나 그들의 나라가 쉽게 승기를 거머쥐었기에 특별한 시련은 없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오이카와의 어린 시녀가 죽었다. 오랜 병을 앓고 있었다고 했다. 오이카와는 상처를 치료해줄 수는 있지만 병을 치료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작년 가을 자신의 영원한 시간을 끌어안은 채 관으로 들어갔다. 오이카와가 딱히 그녀의 죽음에 눈물을 흘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직도 그는 새로 들어온 무뚝뚝한 시녀가 적응되지 않았다. 그녀와는 영 달랐기 때문이다.


일정은 끝났어?”

아니. 조금 있다가 다시 가야해. 곧 연말(年末)이니까.”


이와이즈미의 말에 오이카와가 아쉬운 듯 제 입술을 깨물었다 놓았다. 겨우 시간을 내어 만났거늘. 최근 들어 이와이즈미는 쏟아지는 나랏일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날들이 늘었다. 피곤함은 눈 밑을 타고 턱까지 흘러내려왔으며 어디 엉덩이를 붙일세라 다시 불려가는 것을 반복했다. 원래 왕의 자리가 이토록 바쁜 것인지. 오이카와는 어제와 오늘을 통틀어 단 한 시간 정도 그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면서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계절은 반복 되어 다시 겨울을 불러왔다. 작년에 비해 추위가 누그러졌으나 그래도 바람은 여전히 시렸다. 오이카와는 코끝이 살짝 발갛게 물든 이와이즈미의 양 볼을 제 손으로 감쌌다. 평범한 이들보다 체온이 조금 떨어지는 오이카와의 손바닥은 따듯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차가움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오이카와 스스로는 그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는 듯 했다. 물론 이와이즈미 역시 크게 개의치 않고 그 손길에 얼굴을 가만 내버려두었다. 커다란 손바닥이 볼을 감싸는 느낌이 썩 좋았기 때문이다.


이와이즈미는 저를 감싼 손바닥 아래로 보이는 하얀 손목을 바라보며 잠시 눈을 감았다. 그 상태로 서 있기를 몇 십초가 흘렀을까. 몰아치는 평온함에 잠을 이기지 못한 이와이즈미가 먼저 항복을 선언했다. 쉬고 싶어. 이와이즈미의 중얼거림에 오이카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와이즈미는 어젯밤도 채 2시간을 자지 못했다. 며칠째 그런 상태였기에 피곤함이 어깨를 내리 누르는 건 두 말 할 필요가 없었다. 오이카와는 정자에 앉아 제 허벅지를 툭툭 쳐댔다. 이와이즈미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다시금 확인한 뒤에야 그 허벅지 위로 제 얼굴을 떨어트렸다. 아마 제가 이 무릎에 잠들 수 있는 시간은 최대로 잡아봐야 30분이 되지 않을 테지만 그것으로도 감사해할 수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눈을 감고 뜨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차가운 공기를 막아주고 싶다는 듯 그의 얼굴 앞에 커다란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희고 긴 손가락 끝이 연한 분홍색으로 잘 물들어 있었다.


잘 자.” 오이카와가 매번 던지는 나른한 인사였다. 최근 그를 만나 가장 많이 하는 대사 중 하나일 것이다. 이와이즈미가 그 인사를 들으며 잠결에 중얼거리듯 물었다. “오이카와……. 넌 언제부터 네가 다른 사람과 다른 걸 알았어.” 물음 끝에 물음표도 아닌 마침표가 찍힌 것으로 보아 어지간히 잠에 취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와이즈미는 그 짧은 순간에도 오이카와에 대해 궁금하다는 듯 물어왔다. 어쩌면 잠결에 한 번도 묻지 못한 질문을 던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오이카와는 잠시 고민했다. 글쎄. 그의 대답이 느렸다. “그냥 눈을 떠보니 이렇게 됐어.” 한참 부족한 설명이었지만 진실이었다. 오이카와의 대답에 이와이즈미가 중얼거렸다. 이제 정말 잠에 침식당한 듯 해보였다. 목소리의 끝이 과도하게 늘어졌다. “괜찮아…….” 꽉 막힌 목소리가 그렇게 말했다. 무엇이? 오이카와는 짓궂게 물으려던 것을 멈췄다. 고개를 숙였다. 오이카와는 그새 잠에 빠진 것 같은 이와이즈미를 바라보며 한껏 볼을 부풀렸다. 그리곤 곧 단단히 머금고 있던 바람을 전부 뱉어내는 동시에 웃어 보이는 것이다. 그래. 나는 괜찮을 것 같다. 오이카와는 이제 제 말을 듣지 못할 이와이즈미를 보며 아까 전 이와이즈미처럼 늘어지는 대답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온함의 연속이었다.


나이가 들고 나라가 안정되어 갈수록 여유는 없어졌지만 그는 지금이 가장 평온했다. 그것이 이와이즈미의 옳은 정치를 인정해주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혹 누군가 오이카와에게 있어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는 일천년의 광활한 시간 중 가장 행복한 때를 꼽으라한다면 그는 주저 없이 지금을 꼽을 것이다. 아직 주어진 시간의 반의반도 살지 않았는데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다면 하나의 본능이었으리라. 단순히 그럴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미 예상 가능한 정답이었지만 오이카와는 일천년의 반의반은커녕 몇 분의 일도 되지 않는 시간 사이에 다시없을 크기의 사랑을 느꼈다. 일천년을 더 살아가도 이와이즈미가 아니라면 느낄 수 없을 감정이었다. 계절은 끝없이 지나갔고 오이카와의 감정 역시 그에 맞추어 크기를 끊임없이 키워갔다.


그렇지만 내일은 조금 더 오래 보고 싶어.”


오이카와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는 잔뜩 풀어진 채 잠에 든 이와이즈미의 볼을 손가락으로 살살 찔러보며 등을 둥글게 말았다. 처음 그와 만났을 때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표정을 보는 재미가 꽤 쏠쏠했다. 오이카와는 입술 바로 뒤의 연한 살을 앞니로 조금씩 물어뜯었다. 별다른 의미는 없는 행동이었다. 오이카와가 그 의미 없는 행동을 얼마나 반복했을까. 그의 예상대로 이와이즈미는 30분 정도가 흐른 뒤 눈을 떴다. 일어나야한다는 강박이 있었던지 어느 순간 번쩍 눈을 뜬 후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기상에 놀란 것은 오이카와 쪽이었다.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이와이즈미는 건조한 눈을 끔뻑거리며 눈썹을 긁었다. 가기 싫다는 투가 다분했다. 그러나 가기 싫다고 해서 가지 않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기에 그는 진한 미련을 담은 채 발걸음을 뗄 채비를 했다. 오이카와는 퍽 어울리지 않는 표정을 짓는 그를 향해 어리광이 는 건 저 혼자가 아니라며 농을 쳐보였다. 이와이즈미는 발걸음을 떼기 직전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정자에 앉아 이와이즈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제 눈썹을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을 움직여 이번엔 제가 오이카와의 볼을 쥐어 잡았다. 이와이즈미보다 오이카와의 키가 더 컸기 때문에 평소라면 시선이 비스듬히 위쪽을 향했겠지만 지금은 오이카와가 앉아있으니 시선이 한참 아래로 향했다. 이와이즈미가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맞닿았다. 체온이 살짝 높은 이와이즈미와 체온이 낮은 오이카와의 입술은 부대낄 때마다 각자의 온도를 잃은 채 미지근해졌다. 오이카와의 볼에 위치해있던 이와이즈미의 손가락이 점점 내려가 그의 목덜미를 쥐었다. “이제 가야하지 않아? 바쁘다며.” 잠깐 벌려진 입술 틈새로 오이카와가 놀리듯 입을 열었다. 이와이즈미의 단단한 손가락이 제 뒷덜미를 감싸오자 오이카와는 옅은 소름을 느꼈다. 절로 허리를 곧추세우게 되는 기분이었다.


간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떼어진 입술 새로 이와이즈미가 중얼거렸다. 입김이 하얗게 다가오는 듯했다. 오이카와는 웃으며 그를 배웅했다. 달아오른 입술이 꼭 저 혼자 피부에서 떨어져 둥둥 떠다니는 착각이 들었다. 기분 좋은 착각이었다. 이와이즈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전하. 이젠…….”


그러나 다른 점이 있었다면 이와이즈미는 금세 붕 떠 있던 하늘에서 지상으로 추락한 기분을 연달아 맛보아야 했다. 직위를 벗어던진 사람처럼 엉망으로 누군가와 침대를 뒹굴고 있던 파렴치한 상상에서 냉정하고 피곤한 현실로 소환되고 말았다. 달짝지근한 상상을 방해 당한 것에 자칫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쓸 뻔했으나 그럴 순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억지로 잔잔한 표정을 유지하며 신하의 말을 귀담아 듣는 척했다. 3년 전부터 지겹게 들어오던 소리였기에 새삼스러운 충격은 없었다.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비교적 나이가 있는 신하는 혹여나 이와이즈미가 제 말을 끊을까봐 쉬지 않고 입을 놀렸다. 이와이즈미는 아까와 전혀 다른 의미로 눈썹을 긁었다. 곤란함이 묻어나있는 행동이었다. 은근한 짜증도 잔류한 손길이었다. 신하들은 그의 작은 몸짓에도 어깨를 움칠거리며 입을 열었다.


백성들 또한…….”


그즈음 이와이즈미는 정말로 궁금증이 들기 시작했다. 이와이즈미의 혼사 이야기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으나 말의 내용은 매번 같았다. 나라의 안정과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는 그들의 논리에서 빠지지 않는 내용이었다. 차라리 저 내용이 제가 왕위에 앉은 순간 나왔더라면 지금처럼 콧방귀를 뀌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이들은 어땠던가. 제가 왕위에 올랐을 당시에만 하더라도 대부분이 금방 물러날 어린 왕을 보는 사람들처럼 저를 대하지 않았던가. 그들이 정말 나라의 안정을 걱정하려면 그때 걱정을 했어야 옳았다. 이와이즈미가 왕위에 올랐던 때의 나라는 그야말로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나라의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으며 백성들과 관리들의 싸움은 끊이지 않는 일과였다. 신뢰는 잃은 지 오래인 국가였다. 이와이즈미가 마침내 왕위에 올랐을 극적인 순간에 대부분의 이들이 환호하면서도 그를 믿지 않았다. 선대왕의 죽음을 기뻐하면서도 그의 자손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였다.


그랬기에 더더욱 그가 지금까지의 시간 동안 얼마나 이 나라를 잘 끌어온 것인지를 증명해주는 과거였다. 결론부터 읊자면 지금의 나라는 매우 안정된 상태였다. 이와이즈미의 정치는 틀린 적이 없었으며 백성들의 신뢰 또한 되찾았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하들은 이제와 나라의 안정과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그것이 자신의 혼사로 모두 해결될 일이었다면 왜 애초에 그것을 말하지 않았는지가 의문이었다. 그 간단한 의식으로 자신이 완벽한 군주가 될 수 있었다면 그때의 그는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당장 7년 전의 그라면 그랬을 것이다. 면죄부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던 그때라면 그러고도 충분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신하들의 목소리가 언제나 똑같은 것처럼 이와이즈미의 목소리 또한 언제나 같았다. 고려해보도록 하겠다는 그의 목소리가 퍼졌다. 평소보다 묵직함을 가지고 있는 목소리였다.


원래 그의 존재는 왕위에 걸맞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의 기백이라든지 자질이라든지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의 위치가 어디인가였다. 이와이즈미의 위로 형제가 꼭 넷이 있었으며 아버지의 나이도 왕위에서 물러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이와이즈미는 가장 늦게 들어온 후궁의 아들이었으니 그의 서열 또한 가장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후궁들과 황후 사이의 견제가 심해 죽지 않으면 다행인 현실이었다. 실제로 이와이즈미의 바로 위에 있던 형제는 그의 나이가 열 살을 꽉 채울 무렵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때부터 그는 늘 죽음을 상기하며 살았다. 열 살짜리 꼬마아이가 가지기엔 지나친 성숙함이었다. 그러나 그가 죽음을 상기하고 살았다고 만물의 법칙을 피할 수 있는 것은 또 아니었다. 세상은 그리 순탄하지도 얌전히 기다려주지도 않았다. 죽음이 지나치게 자주 어린 그의 곁을 맴돌았다.


죽음의 두 번째 지목은 그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이와이즈미가 열세 살이 되던 해에 제 형제의 곁으로 떠났다. 그녀는 사흘간 사경을 헤매었으나 그의 아버지께선 한 번도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이미 그들의 존재는 그에게서 잊혀진지 오래였다는 증명이었다. 그에게 있어 아버지라는 사람은 그 순간부터 왕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기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적이 언제 있었겠냐마는 그날을 시작으로 그의 확신은 더욱 두드러졌다. 제 사람 하나 책임지지 못하는 그에게 나라의 군주는 너무도 과분한 위치였다. 물론 이와이즈미가 아니더라도 그리 생각하는 사람이야 차고 넘쳤다. 당장에 궁을 나가 조금만 걸어본다면 모두가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꼭 벽 하나를 두고 다른 나라를 사는 사람들처럼 궁 안에서는 그 모든 것이 암묵적으로 없는사실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마치 벽 하나를 두고 두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 같았다. 궁 밖을 나갔을 때 들리는 통곡소리와 원망소리가 신기하게도 궁에선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를 칭찬하기 바빴다. 세운 적도 없는 남자의 공을 어떻게든 만들어 붙이려는 창의력이 존경스러울 수준이었다. 이와이즈미의 형제들이라고 특별히 다른 점은 없었다. 모두 반쪽짜리 핏줄을 나눠가지고 있는 형제들은 하나같이 그 자리를 탐냈다. 저들끼리 치열한 싸움 속에서 그는 언제나 예외적인 존재였다. 어차피 되지 않을 사람이라는 꼬리표는 그를 말할 때 항상 따라붙는 것이었다. 그즈음 그의 존재를 고려라도 해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존재하긴 했을까? 그만큼 그는 모두에게 누르면 눌릴 수밖에 없는 가냘픈 사람으로 생각되었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와이즈미의 이름과 생사여부조차 희미하게 기억했을 것이다. 간혹 그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는 형제들도 이름이 아깝다며 비웃기 바빴다. 그러나 결국 왕좌에 앉은 이는 다름 아닌 그였다. 왕위는 그에게 계승되었다.

 

하지메 네가 어떻게……!

 

그것이 평화로운 계승은 아니었다. 이와이즈미는 열여덟이 되던 때 제 아버지와 형제들의 목숨을 스스로 앗아가며 그 자리를 밟았다. 어머니에 대한 복수가 아주 없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것은 계기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살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그는 제 수명의 연장을 위하여 누군가의 수명을 앗은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이와이즈미였지만 그가 죽인 인물들 역시 이와이즈미였다. 사람의 몸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무르고 가냘픈 것이어서 날카로운 날을 가져다대는 족족 간단하게 썰려왔다. 역한 냄새가 들끓는 사이에 그가 서 있었다. 잔뜩 피 냄새를 묻힌 몰골이 그 상태로 궁 밖을 나서면 백정으로 오해를 받기 딱 좋은 정도였다. 이와이즈미는 마지막으로 잘려나간 제 형제의 목덜미를 바라보며 눈동자를 깜빡거렸다. 이들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제 아버지 보다는 형제들을 이해했다. 이들에게 있어서도 저와 마찬가지로 가장 큰 도피처라고 생각되는 자리가 바로 왕의 자리였으리라. 그러나 그는 이해를 했을 뿐 온정을 베풀지는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눈도 감지 못한 채 죽은 제 두 번째 형제의 얼굴을 바라보며 짧은 묵념을 이었다. 그런다고 무언가 달라지겠냐마는 그의 마지막 예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 저를 쳐다보고 있음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주인은 다름 아닌 이 나라의 적()이었다. 어머니의 곁에서 몇 번 마주친 것이 전부인 존재였다. ()은 이와이즈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빨간 동공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필시 이와이즈미의 눈동자도 어느 정도의 붉음을 띄우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잠시 놀란 것처럼 이와이즈미를 응시하다 곧 혀를 차댔다. “결국…….” 마치 모든 것을 예상이나 한 듯 말하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 살인의 장면을 목격한 반응이 그것이 전부라는 점이 안심되면서도 답답했다. 이와이즈미는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내던졌다. 반란의 끝이었다. 완벽한 승리였다. 폭군의 왕좌는 드디어 공석이다. 그러나 빈 왕좌가 아주 기쁘지는 못했다. 과연 정말 적()들이 이와이즈미의 반란 여지를 몰랐을까? 그 생각을 하면 거북했다.


이와이즈미는 제 볼에 묻은 피를 문질러 닦으며 침을 뱉었다. 빈 왕좌가 이와이즈미를 부르는 듯 했다. 이와이즈미는 피곤한 발을 이끌고 그곳으로 향했다. 곳곳이 찢어지고 피로 물든 비단옷은 초라했지만 그 자리만큼은 빛이 났다. 이곳이 정말 제 도피처가 될 수 있을까? 백성들의 살 구멍이 될 수 있을까? 이와이즈미는 천천히 왕좌에 엉덩이를 붙였다. 왕좌는 차가웠다. 피비린내 사이에서 오한이 드는 것이 느껴졌다. 이와이즈미가 그 자리에 앉은 채 적()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복잡한 표정을 지어보였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비로소 새로운 왕의 시작이었다. 역사의 새로운 순간이다. 새로운 시대의 등극이었다. 이와이즈미의 탄생이었다. 이와이즈미의 죽음이었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벽 하나를 두고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궁 안은 벌레 하나조차 전부 죽은 듯 조용했으나 바깥은 환호로 물들었다. 이와이즈미는 여전히 불편할 만큼 빠르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피곤함이 어깨를 차올라 목을 조이는 것 같았다. 귀에서 피가 흐르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어쩌면 눈에서도 피눈물이 흐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랬다면 차라리 그의 마음이 편했을까. 그날의 그는 피눈물은커녕 눈물조차 흘리지 아니했다. 남의 피로 가득한 볼이 전부였다. 이와이즈미는 이미 딱딱하게 굳어져 아무리 문질러 닦아도 닦이지 않는 피부를 뜯어낼 기세로 계속해서 닦아냈다. 헛수고일 뿐임을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왕좌에서 보이는 아버지의 잘린 목을 바라보며 실소를 지었다. 그는 이날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이와이즈미의 죽음과 이와이즈미의 생존을 그는 평생 기억할 것이다. 그때가 611일의 새벽 2시였다. 2시간 정도 늦은 생일 선물이 그를 반겼다.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탄생 이후 곧바로 죽음의 날을 맞이한 기분이었다.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이와이즈미의 왕위 등극에 저항의 목소리가 잠깐이나마 일렁였으나 그것 역시 얼마 가지 않아 이와이즈미의 손끝에서 모두가 침묵했다. 그는 원래 이곳이 자신의 자리였다는 것처럼 곧바로 제 할 일을 진행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선택들은 예상과 엇나가는 법이 없었다. 그를 견제하는 이들이야 많았으나 그 누구도 함부로 떠들지 못했다. 나라는 재빠르게 안정되어 갔으며 그 언제 살기 힘든 황무지였냐는 듯 비옥한 땅이 먹음직스럽게 여물어갔다. 그는 제 핏줄을 죽인 면죄부를 찾고 싶다는 듯 애처로울 만큼이나 일에 매달렸고 동시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완벽한 군주의 자질이 있었다. 또한 그 처음 시작에서 만난 이가 오이카와였다. 스물이 되지 않은 나이로 왕위에 오른 후 바쁘게 외교 활동을 하며 저를 알리던 이와이즈미가 2개월여 만에 다시 돌아왔을 때 그를 만났다. 어떻게 보면 제 나라의 땅을 밟고 그의 위치를 가장 실감나게 만들어주는 인물이었다. 자신을 향해 혀를 차던 인물들 대신 서 있던 새로운 적()은 꼭 자신처럼 이제 막 지금의 위치에 앉혀진 존재였다. 그랬기에 그가 첫 만남에서 얄궂은 경계를 보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자신을 향해 혀를 찬 것도 아니었는데 가시 돋친 행동을 선보인 것은 저를 쳐다보는 붉은 눈동자가 자꾸만 그날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자신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은 그가 거슬렸으리라. 자신의 위치는 당연하지 않은 것이었으나 오이카와에게 있어 적()의 위치는 당연한 것이었으니 제 형제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생각해보면 어리긴 어린 날이었다. 가시 돋친 환영 후 얼마나 후회했던가. 그 후로 처음처럼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은 여전했다. 자신과 비슷한 듯 전혀 다른 그 성격과 행동이 끊임없이 거슬렸다. 그래서 더욱 발걸음을 하지 않고 마주침을 최소한으로 줄였으나 보일 때마다 그 불편함은 가시지 않았다. 가시다니. 갈수록 가속화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불편함이 최고조를 향해 달려갈 무렵 그의 시녀가 제게 벌벌 떨며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가 다친 것 같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 전부였으나 표정만큼은 나라가 무너진 듯 해보였다. 그렇게나 걱정이 되면서도 무서운 감정은 어쩔 수 없는 것이냐고 묻지도 못했다. 그는 그냥 고개를 끄덕거렸다. 애초에 전쟁이 일어난 까닭의 중심에 오이카와가 있거늘. 그녀의 애매한 상냥함이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적()이란 매번 피곤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자존심만 높은 쓸데없는 인물들이라 여겼다.


그런데 그날 자신은 왜 그런 선택을 했지? 그날 그는 어렴풋이 오이카와에게서 느끼던 이물감이 없어짐을 깨달았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느껴보는 동질감이었다. 분명 처음 그를 경계한 이유가 자신과 전혀 다른 모습 때문이었으나 그날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오이카와 만큼 자신과 비슷한 처지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인정해야 했다. 오이카와도, 이와이즈미 자신도. 가장 많은 권력과 위치에 서서 외로움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달릴수록 곤두박질칠 뿐이던 고독함에서 처음으로 동반자를 만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던 눈빛은 붉었다. 그 안에 비치던 제 눈동자는 검은색이었으나 담긴 감정들은 똑같았다. 그날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다른 동족(同族)을 만난 것이다. 세상에 단 둘만이 존재하는 종()이었다. 그들만이 정한 새로운 종이었다. 모순적이게도 가장 깊은 외로움 사이에서 누군가를 만났다. 그 후 약속이나 한 듯 그 손을 잡은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러니 이제와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을 잡으라는 것이 이와이즈미에게 있어 얼마나 기가 찬 제안이겠는가. 과연 이와이즈미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오이카와를 제외하고 존재하겠는가. 이와이즈미는 그 생각을 하면 할수록 갑갑했다. 왕과 적()의 이름이 뭐라고 그와 제 사이를 쉽게 공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드디어 안정된 나라의 젊은 왕이 그랬다간 애써 잠재운 나라가 다시 벌컥 뒤집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더 이상 마냥 피할 수도 없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계속해서 혼사를 미루는 것 자체가 논란의 여지를 자꾸만 심어주는 일이었다.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듯이 저를 배척하는 이들은 3년 전부터 꾸준하게 혼사 이야기를 걸고넘어지는 와중이었다. 3년을 갖가지 핑계로 버텨온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작년부터는 언급의 빈도와 압박의 정도가 심해졌다. 이와이즈미가 제 옆에서 발장난을 치고 있는 오이카와를 향해 물었다.


오이카와.”

?”

……내가 황후를 들인다면 어떨 거 같아?”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기습 질문에 그를 쳐다보았다. 솔직한 심정으로 오이카와가 아주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눈치 빠른 그가 몰랐을 리 없다. 이와이즈미의 혼사에 대한 이야기야 이 좁아터진 궁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시끄러운 주제였다. 오이카와는 올 것이 왔구나 싶은 표정을 지어보이다 곧 짧은 발재간을 마저 부리고 입을 열었다. 계속해서 생각해온 상황이었기에 생각보다 덤덤할 수 있었다.


괜찮은데? 샘은 좀 나겠지만.”


오이카와는 입을 여는 동안 멈추었던 발재간을 처음과 같은 순서로 다시 부리기 시작했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청()색 이불을 만지작거리며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연설과 같은 말들은 누군가 알려준 것처럼 술술 나왔으나 유독 오이카와와 대화를 할 때면 해야 할 말의 갈피가 잡히지 않는 순간들이 있었다. 지금이 그렇게 느껴졌다. 그럴 때면 항상 오이카와가 먼저 입을 열기 일쑤였다. 선수를 가로채인 이와이즈미는 어정쩡하게 벌렸던 입술을 다시 다물었다.


이와쨩이 혼사를 치르고 나면 혼자 남는 걸까나.”

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지만 이와쨩이 황후를 들인 다음 내버려둘 성격도 아니잖아.”


정곡이었다. 이와이즈미는 잘못을 들킨 어린 아이처럼 변명조차 내뱉지 못했다. 이미 살짝 갈라진 입술 껍질 사이로 침을 바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입술이 건조했다. 침이 지나친 자리들은 잠깐 젖어들었을 뿐이지 얼마 지나지 않아 더욱 극심한 갈증을 일으켰다.


그때가 되면 나도 동족을 만나볼까?”

너희 부모처럼?”

그래. 같은 적()과 혀를 섞으면 기분도 훨씬 좋다던데.”

자존심 상하는 소리네.”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의 발언에 웃었다. 맞아. 너보다 기분 좋을 수는 없을 걸. 이어지는 순순한 인정에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의 팔뚝을 잡았다. “나도 괜찮아.” 이어지는 목소리에 오이카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이카와는 완전히 이와이즈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팔뚝을 잡은 채로 고개를 가까이 했다. 오이카와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꺾어졌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방안을 메우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이카와의 몸이 뒤로 기울었다. 이와이즈미가 그 위로 몸을 겹쳐 올렸다. 오이카와는 숨을 고르고 싶다는 듯 이와이즈미의 어깨를 살짝 밀어냈다. 이와이즈미는 그의 턱 위로 집요하게 입술을 맞추며 틈을 주었다.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의 동그란 뒤통수를 쓸어내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사실 안 괜찮을 것 같아.” 이번엔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의 발언에 웃었다. “나도 그래.” 그것이 어린 발언인 줄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나라를 책임지는 통솔자를 떠나 지금만큼은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다. 이와이즈미가 가장 이와이즈미다워지는 시간에서조차 거짓말을 하긴 힘들었다. 오이카와가 숨을 다 쉬었다는 듯 먼저 이와이즈미의 입술을 찾아들었다. 건조했던 입술이 채워졌다.




전하.”

후계 문제라면 양자를 들이면 되는 일이다. 당분간 이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말도록 하여라.”

말도 안 되는 말씀이십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의 상황이.”

그대는 내가 혼사를 치르지 않는다고 정치를 못하게 될 것 같소?”

그런 뜻이 아니옵고,”

혼사를 한 후 그 즐거움에 빠져 나라를 돌보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보다는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만. 대신들의 의견이 다르다면 좀 더 나를 설득시킬 수 있는 이유를 가지고 오도록 하시오.”


이와이즈미는 단호한 목소리를 뱉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펄럭거리는 소매 끝이 오늘따라 유독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이와이즈미가 자리에서 이탈한 후 남은 신하들은 기다렸다는 듯 웅성거리기 바빴다. 이와이즈미의 측근에 있는 신하들이 따라 자리를 비우자 뜨겁던 솥뚜껑이 열린 것처럼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곳곳에서 폭주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황후의 자리를 비워둘 생각이신 거지?”

말도 안 되는 소리일세. 나라의 비()가 없다니.”

도는 소문이 헛소문이 아니었다는 건가?”

소문이라니.”

전하께서 적()…….”


소문은 빠르게 흘러간다. 대부분의 소문은 설마. 그럴 리가. 하는 의심에서부터 출발한다. 의심과 동시에 가장 큰 신빙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쥔 열쇠가 거대하다면 더욱이 쉽다. 한 신하의 말에 모두가 아닐 것이라 부정을 하면서도 그럴지 모른다는 마음을 품었다. 저들끼리 정한 이와이즈미의 황후 후보로 거론되던 집안에선 더더욱 그 가설을 믿었다. 신뢰는 더디나 의심은 간편하다. 불만을 가진 그들 사이에서 적대의 감정이 흘러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본디 비난이란 그랬다. 대상이 같았으니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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