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HQ / 전생파트 / 유혈 주의



때는 적()의 통치 이후 역사에 두 번째로 오래 남는 전쟁 당시이다. ()과 적()이 대등한 힘을 가지고 서로의 영토와 힘을 탐낸 지 햇수로 5. 16세 이상의 성인 남성들 및 참전 의지를 보인 여성들은 전부 전장(戰場)으로 보내진지가 5년이었다.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적군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제 1군과 제 2군 진지(陣地) 중 제 1군에 발령받아 있었다.


어이. 오이카와. 벌써 자냐.”


오이카와가 번쩍 눈을 떴다. 겨우 잠에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어깨를 흔드는 손길이 제법 매서운 탓이었다. 오이카와는 꽤 촘촘히 내린 어둠 속에서 자신을 집어올린 손길의 범인을 살폈다. 범인은 역시나 이와이즈미였다. 오이카와는 군용 담요를 얼굴까지 끌어올리며 잠투정을 했다. 이제 잠들었는데! 오이카와의 볼멘소리에 이와이즈미가 살짝 민망하다는 어깻짓을 해보였다. 그러나 머쓱한 얼굴과 다르게 그를 깨우는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어이, 오이카와. 부르는 목소리가 일정하게 반복되었다. 이와이즈미 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차라리 오이카와가 했더라면 어울렸을 행동이었다. 오이카와는 그의 평소 같지 않은 행동에 계속해서 짜증을 내면서도 결국엔 고개를 들었다.


대체 뭔데 그래.” 평범한 날들과 전혀 반대되는 상황이었다. 이와이즈미는 스스로도 떼를 쓰는 것 같은 말투가 어색한지 헛기침을 해보였다. 그는 오이카와가 덮고 있던 요를 치우고 손짓을 했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잠이 붙은 얼굴을 한 그대로 그를 따라 일어났다. 더 캐묻거나 잠을 자겠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은 것은 그의 눈치였다. 이와이즈미가 잠든 자신을 이유 없이 깨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막연한 눈치 말이다. 오이카와는 눈곱이 낀 오른쪽 눈을 비비며 살짝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이와이즈미를 쫓았다. 이제 막 31살에 접어든 나이치고는 여전히 아이 같은 행동과 얼굴이었다. 이와이즈미가 꼬박 31년을 빈틈없이 바라봐왔지만 한결같은 얼굴이었다.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가 함께 보낸 시간이 벌써 31년이었다. 친밀한 가문에서 한 달 간격으로 태어나 지금까지 쭉 함께해온 죽마고우(竹馬故友)였다. 적어도 남들이 보았을 때는 그 말만큼 둘을 표현해주는 것이 없었다. 다만 서로가 생각하기에 죽마고우라는 호칭은 조금 애매했다. 성격이 전혀 달랐던 탓에 몇 번의 부딪힘이야 당연히 존재했지만 끝으로 가면 매번 흐지부지하게 얼버무려지기 일쑤였다. 완벽한 해답이 나온 것도 아니고 어느 순간 적당히 침묵하는 기분을 느낄 때가 있었다. 어딘가 딱 맞는 듯 삐거덕거리는 순간들이 있었다. 무언가 해결이 된 것도 완전히 갈라진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 애매한 삐끗거림을 안고 살아온 시간이 바로 그 지긋지긋한 31년이었다. 며칠 전부터 오이카와의 혼사 이야기가 자꾸만 수면 위로 떠오르던 참이었다. 둘은 아직도 혼사를 지내지 않았다. 기실 오이카와는 한 번 혼사를 맺기로 한 가문과 날짜까지 잡았으나 식이 고작 15일이 남았을 무렵 여자의 가문이 역적으로 오인당하여 전체가 몰락하고 말았다. 그 후로는 둘 다 이렇다 할 혼사 자리 없이 세월을 보내는 중이었다. 마침 오이카와의 파혼과 이어 곧바로 전쟁이 터진 덕에 누구도 혼사를 재촉하지는 않았으나 전쟁이 끝나갈 때가 되자 어김없이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가 긴 전쟁에 참전한 후 벌써 5년이 흘렀다. 5년의 전쟁이었다. 나라는 지쳐갔으며 식량과 인력을 고려해서라도 빠른 시일 내에 결판을 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아군도 적군도 모두가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기본적 눈치로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당장 내일만 해도 급습을 앞두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잠자코 이와이즈미를 따라가던 오이카와가 물었다. 오이카와의 성격치고는 인내심이 길었다. 이와이즈미도 그것을 알았기에 무작정 걸어가던 발길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밤이 밤이었던지라 서로의 얼굴이 평소처럼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얼굴이 낯설거나 하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당연했다. 31년을 보고 산 얼굴인데 고작 밤의 깊이 따위로 그리지 못할 것이 아니었다. 이와이즈미도 마찬가지였다. 이와이즈미는 그 캄캄하게 내린 밤사이에서도 오이카와의 눈 코 입을 전부 그리며 입을 열었다. 밤공기는 가을의 건조함에 잔뜩 메마른 상태였다.


전쟁이 시작되고 5년이야. 아마 내일 승패가 갈리겠지.”

……그런 내용은 오이카와씨도 다 아는데.”

말 주변이 없어서 그런 거니까 그냥 들어.”


이와이즈미는 스스로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다시 입을 여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이와이즈미도 알고 있었다. 어차피 정리를 한들 깔끔하게 뱉을 수 있을 리 없는 것을 본인도 매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예상과 다르게 한 번 입술을 깨문 뒤 곧장 입을 열었다. 하나도 정리되지 않은 목소리가 군데군데 텁텁함을 안고 떨어졌다.


승전(勝戰)하고 나면 함께 살자.”

……?”


정돈되지 못한 목소리의 내용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때까지 아직 눈가에 잠을 그렁그렁 달고 있던 오이카와가 화들짝 놀라 대꾸했다. 제가 지금 잠결에 잘못 들은 것인지 아니면 애당초 지금 이 순간 자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판단이 필요했다. 이와이즈미는 그 침묵을 기다렸다. 오이카와는 눈살을 찌푸리고 되물었다. 마지막 확인이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그래. 허투루 말하지 않았다.”


끝에 이어진 마침표가 꽤 단호했다. 이번의 오이카와는 당황하지 않았다. 밤하늘의 어둠으로 잘 보이지 익숙한 얼굴은 시야의 적응으로 점차 윤곽을 드러냈다. 오이카와는 가만 드러나는 이와이즈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기억도 나지 않는 갓난아기 때부터 함께였으니 물론이었다. 오랜 전쟁으로 인하여 얼굴 살이 빠지면서 날카로움이 더해진 얼굴이었다. 짙은 눈썹 아래로 오목조목하게 들어찬 눈 코 입. 아까 전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의 얼굴을 그리며 생각했던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오이카와의 시선이 내려갔다. 곡선으로 떨어져 근육이 잘 잡힌 어깨 위가 시선의 종착지였다. 그 근육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 오이카와는 그 순간 깨달았다.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가 함께 보낸 시간이 벌써 31년이었다. 친밀한 가문에서 한 달 간격으로 태어나 지금까지 쭉 함께해온 죽마고우(竹馬故友)였다. 적어도 남들이 보았을 때는 그 말만큼 둘을 표현해주는 것이 없었다.


다만 서로가 생각하기에 죽마고우라는 호칭은 조금 애매했다. 성격이 전혀 달랐던 탓에 몇 번의 부딪힘이야 당연히 존재했지만 끝으로 가면 매번 흐지부지하게 얼버무려지기 일쑤였다. 완벽한 해답이 나온 것도 아니고 어느 순간 적당히 침묵하는 기분을 느낄 때가 있었다. 어딘가 딱 맞는 듯 삐거덕거리는 순간들이 있었다. 무언가 해결이 된 것도 완전히 갈라진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 애매한 삐끗거림을 안고 살아온 시간이 바로 그 지긋지긋한 31년이었다. 애매한 삐끗거림……. 오이카와는 순간 그것이 완벽하게 들어 맞춰지는 기분이 들었다.


좋아.”


그러니 오이카와의 대꾸는 자연스러웠다. 삐끗거림의 이유를 알자 오히려 차분해졌다. 이와이즈미 또한 놀라지 않았다. 이제 완벽히 적응한 어둠 속에서 서로를 끌어안을 뿐이었다.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겨울을 코앞에 둔 바람이었으나 시리진 않았다.


두 사람의 포옹으로부터 4시간이 지났을 때 말발굽 소리가 시작되었다.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는 각자의 행렬 가장 앞 쪽에서 고삐를 틀어쥐고 있었다. 우렁찬 나팔 소리가 허공을 가르고 끝없이 올랐다. 이와이즈미는 손에 두어 번 휘감은 고삐를 다시 한 번 단단히 고정하며 시선을 돌렸다. 오이카와는 늠름한 자태로 안장 위에 앉아 있었다. 그때 오이카와도 이와이즈미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팔은 또다시 울렸다. 병사들은 사기를 돋우려는 듯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적진이 바로 앞이었다. 오이카와가 먼저 적진의 요새를 열었다. 그가 열어둔 길 뒤로 수많은 완전무장(完全武裝)의 병사들이 쏟아졌다. 나팔 소리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울렸다. 완벽한 선전포고(宣戰布告)였다.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가 이제 울리지 않는 나팔을 대신하여 제 허리춤에 있는 검을 높게 들어올렸다.


돌격하라!”


아마 뒤에 가서는 그 돌격하라는 말이 아군에서 나온 말인지 적군들이 뱉은 말인지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전쟁터란 원래 그런 곳이었으니 놀랄 것은 없었다. 귓가가 멀어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울려 퍼지는 비명과 고함이 공존했다. 그러나 그 비명과 고함의 주인은 중요하지 않다. 자신만 아니라면 됐다. 스스로가 죽지 않기 위해 상대를 죽이는 것이 전쟁터의 유일한 희망이었으며 그것이 바로 승리의 밑거름이었다.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는 착실히 희망과 승리를 쌓았다. 5년을 쌓아왔으니 오늘이야말로 끝장을 봐야할 터였다. 또한 그날은 더더욱 사기가 높았다. 급습의 성공과 더불어 오늘이 5년의 진정한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오이카와는 높게 든 검을 저 아래로 내려치며 이를 악물었다. 그날의 그는 아마 그 전쟁터 사이에서 손꼽히게 많이 검을 휘둘렀을 것이다. 그만큼 그가 쥐어짜낸 상대의 출혈 또한 상당했다. 오이카와는 아까부터 공중에 자욱한 비린내에 익숙해짐을 느꼈다. 무뎌졌다. 계속되는 광기의 광경조차 5년이 흐른 오늘에 와서는 제게 충격을 줄 수 없었다. 이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자 제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도 잊고 몸이 가벼워지는 착각까지 들었다.


오이카와?”


그즈음 이와이즈미가 돌연 오이카와를 찾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적정선이라는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이카와는 그것을 한참 뛰어넘은 채 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어느새 훌쩍 멀어진 넓은 등을 바라보며 고삐의 방향을 돌렸다. 반면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가 저를 부르는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느낌이 좋았다. 오늘은 기필코 이 전쟁의 마지막 단추를 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 나라의 적()도 지금 제 2군과 함께 성안으로 돌격했을 터이니 제가 조금만 더 이곳을 정리하면 후에 제압이 더욱 쉬워질 것이었다. 돌아갈 수 있다. 그리운 고향, 그리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돌아가면 31년간 찾아 헤매던 애매함의 해답 대신 딱 들어맞은 하루들을 보낼 수 있다. 다름 아닌 이와이즈미와 함께 말이다. 여러 문제들이 있겠지만 지금의 그에겐 그런 암울하고 복잡한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때의 오이카와는 단지 승리가 필요했고 돌아갈 내일이 중요했다. 전쟁의 끝이 한 걸음 앞인 와중에 그와 같은 생각이 들 리 만무했다. 오이카와는 끊임없이 적진을 갈랐다. 목을 베고 배를 찌르고 팔을 잘랐다. 그가 재빠르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올라탄 안장이 흔들렸다.


오이카와?”


이와이즈미가 그 이름을 다시 외쳤다. 그러나 이와이즈미의 목소리가 들리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이와이즈미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주위를 맴도는 비명과 고함 소리에 묻혀 쉽게 목숨을 잃었다. 이와이즈미는 제 앞을 가로막는 인물들을 차분하게 갈라나가며 급히 눈으로 오이카와의 등을 쫓았다. 어떻게든 놓치지 않으려는 그의 발악이었다. 그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벌어진 거리는 쉽사리 좁혀지지 않았다.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를 따라가는 만큼 오이카와 역시 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오이카와가 인파를 가르며 붉은 액체들을 계속해서 뒤집어썼다. 한 번은 오이카와의 팔이 잘릴 뻔하였으나 마침 날아온 화살에 적군이 말에서 떨어져 바닥을 뒹굴었다. 화살. 오이카와는 뒤에서 날아온 날카로운 촉을 보았다. 바닥에 쓰러져 피를 토하는 남자의 어깨를 보았다. 당최 정체를 알 수 없는 덩어리들을 쏟아낼 때마다 남자의 어깨가 가파르게 움직였다.


오이카와!”


오이카와가 이상한 기시감을 느낄 즈음 이와이즈미가 핏대를 세워 그의 이름을 외쳤다. 오이카와의 귓가에도 그 목소리가 희미하게나마 걸려왔다. 오이카와는 바라보던 남자의 시체에서 놀라 시선을 떼며 마구잡이로 팔을 휘둘렀다. 무언가가 베이는 소리와 함께 몇 차례 앞이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시야가 어지러웠다. 오이카와는 제 바로 앞까지 도달한 날카로운 칼날을 보며 침을 삼켰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왼쪽 눈 하나가 날아갈 수 있었다. 오이카와는 간발의 차이로 꽂아 넣은 제 검을 다시 회수했다. 갑옷을 뚫고 심장을 꿰뚫은 뾰족한 날에 군데군데 빠짐없이 피와 살점이 들러붙었다. 여린 살점에 머물렀던 찰나가 아쉽다는 듯 줄줄이 딸려 나오는 것들이 덜렁거렸다.


오이카와가 그것을 털어내며 눈가에 다닥다닥 여유 없게 붙은 피딱지들을 닦아낼 즈음 갑작스레 북과 나팔 소리가 들렸다. 아까 전 자신들이 출장을 할 때 불어댄 나팔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용맹하고 커다란 소리였다. 모두가 소리의 출처를 찾아 고개를 움직였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성 위로 깃발 하나가 올라왔다. 오이카와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 글자를 읽으려 애를 썼다. 설마, 설마! 승리의 글자가 올라왔다. 오이카와는 그 글자를 눈에 담는 순간 옆을 바라보았다. 제 나라의 적()이 보였다.


……이겼다…….”


오이카와가 중얼거렸다. 감격이 절로 섞인 목소리였다. 그 끝이 떨리는 것도 같았다. 오이카와는 들고 있던 팔을 내렸다. 오이카와 뿐만이 아니었다. 그 자리의 모두가 승리를 했기 때문이든 패배를 했기 때문이든 팔을 내렸다. 더 이상의 살생은 유효하지 않았다. 이미 모든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아까까지 죽음 바로 직전의 발악만이 울리던 들녘 위로 각자의 이유를 담은 울음소리가 퍼졌다. 누군가는 승리의 기쁨으로 울었다. 누군가는 패배의 통탄함으로 울었다. 포효 소리 또한 울렸다. 오이카와 또한 주책 맞게 올라오는 울음을 간신히 참아내며 뒤를 돌았다. 보고 싶은 얼굴을 마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돌아갈 수 있다. 이곳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목표로 삼았던 미래가 현실이 되었다. 돌아갈 수 있다. 오이카와가 그 사실을 되새김질하며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입을 열었다.


이와쨩.”


그때 분명 이와이즈미도 만면에 안도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고삐를 돌려 그에게 가려고 했다. 이제 거리가 아주 멀지 않았다. 이와지미가 열심히 앞으로 헤쳐 나온 덕이었다. 오이카와가 꽤 기다란 심호흡을 반복했다. 돌아갈 수 있다. 그 문장이 다시 한 번 오이카와의 머리를 지나쳤다. 몇 번을 생각해도 달콤한 문장이었다. 이와이즈미가 잔뜩 풀어진 오이카와의 표정을 보며 그를 부르려 했다. 가장 감격스러운 매순간마다 불러야만 할 것 같은 이름이었다.


오이카……,”


목젖을 타고 올라오던 이름이 멈추었다. 잔뜩 풀어진 채 이와이즈미를 바라보던 오이카와의 눈꺼풀이 팽창했다. 반대로 동공은 수축했다. 그의 입에서 피가 튀어나왔다. 울컥 터져 흐르는 피의 색이 선명했다. 턱을 타고 흐르는 피가 폭포수처럼 끊임없었다. 승리의 나팔 소리는 또다시 들녘을 울렸다. 그랬기에 사람 한 명이 쓰러지는 소리 따위는 들리지도 않았다.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으며 아무도 그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와쨩? 오직 오이카와만이 그 존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와이즈미의 가슴께를 관통한 그 칼날! 그의 가슴이 칼날을 낳았다. 탄탄한 가슴께 위로 칼날이 비집고 들어찼다.


이와쨩?”


오이카와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를 한 번 더 불렀다. 돌아갈 수 있다. 돌아갈 수 있다. 분명 이제 전쟁은 끝났다. 아까 전 승리의 포효로 모든 것이 끝났다. 그런데 왜? 오이카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이와이즈미가 왜 이 순간 말에서 떨어진 것인가. 도대체 왜 이와이즈미가 하필 이 시점에서 심장을 관통당한 것인가. 모두가 아주 슬퍼하거나 아주 기뻐하는 지금 이 시간에서 왜?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는 전쟁에서 승리했다! 돌아갈 수 있다! 돌아가야만 했다! 승전(勝戰)이 울리고 함께 손을 맞잡고 돌아가야만 했다! 함께 지내던 그곳, 고향으로! 이제 우리의 집을 만들어 함께 살아야만 했다! 돌아가야 했다! 오이카와는 울렁거리는 속을 참기가 괴로웠다. 조금만 고개를 숙인다면 토사물이 역류할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천천히 안장에서 내려왔다. 고작 안장에서 내려왔을 뿐인데 저 깊은 곳으로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그에게로 다가갔다. 환호와 울분 사이에 조용하고 얌전히 누워있는 그의 모습이 초라해보였다. 그에게 걸어가는 내내 그와 같이 누워있는 자들이 많았다. 오이카와는 그들 사이를 겨우 걸어가며 그에게 다가갔다. 오이카와를 쫓아가던 이와이즈미처럼 열심히 또 묵묵히 그를 향해 걸었다. 그때 누군가가 오이카와의 발목을 붙잡았다.


살려줘.


오이카와의 발목을 붙잡은 남자는 제대로 목소리조차 내뱉지 못했지만 필시 그 말을 뱉고 있었다. 그러나 오이카와에게 적군인지 아군인지도 모를 남자의 간청은 중요치 않았다. 아니. 만약 저를 잡은 것이 아군이었다 해도 그는 도움의 손길을 뻗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그의 두 손은 남자에게 뻗기 위한 손이 아니었다. 오이카와가 남자의 붙잡음을 무시하고 다시 발을 떼려했다. 아마 남자 또한 그즈음 오이카와가 저를 구해줄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남자가 경련이 일어난 손을 움직여 바닥을 나뒹구는 제 검을 쥐었다. 마지막 오기였다. 상대를 잃은 남자의 치졸한 복수였다.


이와쨩…….”


남자가 붙잡았던 발목 위로 칼날이 스쳤다. 오이카와는 그대로 넘어졌다. 시체더미 위로 코를 박았다. 악취가 그대로 코를 타고 올라왔다. 결국 오이카와는 더 참지 못하고 구역질을 시작했다. 꼭 제 뱃속의 창자를 전부 끄집어 내뱉을 기세로 몸을 들썩거렸다. 악취가 한층 심해졌다. 그때 오이카와는 제 발목을 쳐다보았다. 잘리기 일보직전으로 덜렁거리는 허연 살점 사이에 빼곡히 들어찬 핏줄과 은근하게 보이는 뼈가 그를 반겼다. 오이카와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구역질을 했다. 이제 한 발자국만 더 걸어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이와이즈미의 시체를 보며 구역질을 멈출 수 없었다. 그때 누군가의 말발굽이 이와이즈미의 팔을 짓눌렀다. 오이카와의 눈이 새빨갛게 부어올랐다. 눈으로 피가 흐르는 착각이 들었다. 착각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것을 분간할 수도 없었다. 오이카와가 바닥으로 고개를 더더욱 처박으며 어지러움을 느꼈다.


함성소리는 갈수록 커져갔다. 이와쨩. 오이카와가 제 목을 틀어막은 구역질에 그 이름을 부르지도 못하고 속으로만 겨우 발음할 즈음 제 기억이 아닌 다른 사람의 기억 같은 장면이 떠올랐다.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던 기억이 왜 제 과거처럼 생생히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 제가 끌어안은 등짝 위로 꽂혔던 화살! 타들어가던 그! 허망하게 바라보던 자신! 아득하게 밀려오는 기억이 있었다. 오이카와가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의 시야는 평소보다 반이 줄어있었다. 제가 얼마나 잠에 들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부어오른 눈두덩이가 무거웠다. 오이카와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간신히 상체를 지탱하고 제일 처음 마주한 것은 엉망이 된 제 다리였다. 거의 다 떨어져나갔음에도 용케 붕대와 함께 붙어있는 발목을 바라보던 오이카와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이와이즈미의 이름을 외쳤다. 밖에선 희미하게 북소리가 울렸다. 북소리? 오이카와는 또다시 머리가 아팠다. 이명(耳鳴)이 들리는 듯 했다. 그러나 아무리 이명이 어지러이 울려와도 북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언뜻 북소리와 함께 곡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오이카와는 그 소리에 몸을 일으키려다 한바탕 몸을 굴러야 했다. 완전히 낫지 않은 다리 때문에 절뚝거림이 심했다. 멀쩡한 곳이 없는 듯 온몸이 뻐근했다. 그래도 오이카와는 걸었다. 이 불안한 예감을 확인해야만 했다. 북소리가 가까워졌다. 더욱 선명해졌다. 오이카와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문을 열었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발걸음을 절뚝거리며 옮겼다. 몇 번이고 어색한 발목에 쓰러지기를 반복하다 종국엔 기어서라도 그곳을 향해 갔다. 무릎이 까졌다. 그 위로 자잘한 자갈이 박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미약한 고통이 오히려 오이카와가 살아있음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평소보다 낮은 시선으로 많은 인파사이를 헤쳤다. 모두가 이상한 사람을 쳐다보듯 오이카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수십 개의 눈동자가 오이카와에게 꽂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이카와는 잠에서 덜 깼던 그날처럼 비틀거리는 모양새로 무릎을 폈다. 무릎과 발목이 아렸다. 허리를 기준으로 밑의 감각이 아예 사라지는 착각이 들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돌렸다. 제 옆에 있는 여자가 울고 있었다. 섧게도 울고 있었다.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며 울고 있었다. 보낼 수 없다며 울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새파란 하늘 위로 지상에서부터 먹구름이 올라갔다. 불꽃과 함께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오이카와의 키보다 살짝 높게 쌓아올린 장작 위로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시체들이 놓여 있었다. 그 사이사이엔 여자인지 남자인지 분간도 되지 않을 만큼 형체가 불분명한 인물도 분명 존재했다. 오이카와는 가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다가오시면 안 됩니다.”


오이카와는 그제야 저를 가로막은 팔을 내려다보았다. 언제 이까지 걸어 나왔지? 저를 막아선 남자가 곧 혀를 찼다. 오이카와가 시선을 내렸다. 발목에서 또다시 피가 터져 흐르고 있었다. 반 즈음 꺾인 발목이 꼭 제 것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냥 모든 것이 제 것이 아닌 기분이 들었다. 제가 들이쉬고 있는 공기조차도 원래는 제가 마시면 안 되는 것만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불길이 치솟았다. 오이카와가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의 끝에서 이와이즈미를 발견했다. 수없이 많은 인물들이 뒤섞여 있어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들었으나 그는 이와이즈미를 발견했다. 그것은 분명 이와이즈미였다. 오이카와는 발갛게 달아오르는 시야 안의 이와이즈미를 똑똑히 바라보았다. 타들어가는 연기와 향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그 사이에서 이와이즈미의 체취를 맡았다. 이와이즈미였다. 그건 분명한 이와이즈미였다. 제 모든 삶을 다 걸고 말할 수 있었다.


누군가 북을 울렸다. 그들을 기리는 북소리가 점점 빠르게 반복되었다. 소가죽을 몇 겹으로 쌓아올려 만든 북을 내리칠 때마다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오이카와가 눈도 제대로 깜빡이지 못하고 그 소리들을 고스란히 듣고 있었다. 고막을 타고 들어온 둔탁한 소리들이 무언가를 자극했다. 생경한 기분이었다. 자신조차 모르는 제 과거를 건드리는 것 같았다. 자꾸만 꽁꽁 숨겨져 있는 어딘가를 두드렸다. 무언가 생각날 것만 같았다. 북소리가 이명의 손을 잡고 그를 찾아왔다. 오이카와의 머릿속이 울렸다. 뇌 속에 벌레를 집어넣은 사람처럼 꿈틀거림을 느꼈다.


절반.”


오이카와가 그것을 중얼거리며 갑작스레 몸을 틀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이었다.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제가 묻어둔 그곳이 바로 제 1군의 진지(眞知), 저와 이와이즈미가 함께 쓰던 천막의 밑이었다. 오이카와는 점점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다급한 마음과 다르게 성하지 못한 몸은 몇 번이고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으나 그래도 그는 흙을 닦지도 못하고 달렸다. 피가 나도 달렸다.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발목이 꺾이고 당장이라도 잘려 나갈 것만 같아도 달렸다. 지금의 오이카와는 발목이 하나 사라진다고 해서 알아챌 수 있을 정신머리가 아니었다. 오이카와는 달렸다. 발목이 덜렁거릴 때마다 그 사이로 기억의 조각들이 피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꼭 그 정도의 고통이 동반되면서 자꾸만 후회의 크기가 커졌다. 오이카와가 달리고 또 달려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이제 다 정리해가는 진지의 천막 앞에 섰을 때. 그는 고개를 숙였다.


소리 나게 주저앉아 손을 뻗었다. 꽤 오랜 시간 비가 오지 않아 단단하게 메마른 흙 사이로 기어이 손을 집어넣었다. 손톱 사이사이로 기분 나쁜 돌멩이들이 박혀왔지만 상관없었다. 그걸 느낄 여유도 없었다. 오이카와가 메마른 흙을 적셔가며 땅을 팠다. 어느 샌가 흐르고 있는 눈물을 뿌리기도 했고 침을 뱉기도 해가며 어떻게든 제 손으로 아래를 후벼 팠다. 한참을 그곳만 파댔다. 모두가 떠나고 이제는 찾을 필요가 없는 과거의 숙소에서 그 혼자만이 남아 더 깊숙한 과거를 찾았다. 종국엔 눈물과 침을 뱉지 않아도 손끝에서 자라난 핏방울이 흙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가 손바닥 가득 흙을 퍼낼 때마다 슬픔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내던진 흙이 그대로 제 머리 위에 쌓이는 착각이 들었다.


찾았다.”


오이카와가 탄식처럼 외쳤다. 제 양팔이 전부 깊숙이 들어갈 정도로 땅을 파고 나자 작은 병 하나가 튀어나왔다. 오이카와는 제 네 번째 손가락만한 크기의 병을 쥐었다. 모든 것이 허무해질 정도로 작은 병이 피와 흙투성이가 된 손바닥 가운데에 얌전히 자리 잡았다. 오이카와가 그것을 끌어안았다. 제가 이번 생을 몇 번이고 다짐하며 묻었던 것인데 어째서 또다시 이와이즈미가 죽은 후에야 이것을 떠올린 것일까. 오이카와는 흘러나오는 울음을 굳이 참지 않았다. 한참을 울었다. 파냈던 흙무더기 위로 머리를 들이박으며 오랜 시간을 후회했다. 한 번의 해가 저물고 다시 뜰 때까지 그 짓이 반복되었다. 눈앞이 어질어질하고 제 손바닥이 네 개로 보일 때까지 울었다. 한 번의 생을 건너뛴 것치고 형편없는 결과였다. 결국 또 이와이즈미가 죽었다.


이와이즈미를 살릴 수 있었는데도 또 그의 죽음을 바라만 보았다. 자꾸만 이와이즈미가 죽고 난 후에야 후회했다. 다시는 후회하지 않고 싶어서 아직 완벽한 이해조차 하지 못했던 새 삶을 선택했던 주제에 결국 또다시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했다. 멍청했다. 너무도 멍청했다. 오이카와는 애써 파낸 구덩이가 무색하게 그 안으로 다시 작은 병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위를 파냈던 만큼 흙을 덮어 채웠다. 다시금 눈물과 침과 피를 섞어 단단히 채웠다. 몇 번이고 덮인 흙 위를 매만지며 다짐했다. 다음엔 절대로. 다음엔 절대로 이와이즈미를 살려낼 것이다. 기필코 이와이즈미와 함께 평화롭고 오랜 세월을 살 것이다. 다음 생에서도 그의 평생, 그 영원에 남을 것이다. 오이카와가 봉긋 솟아오른 흙더미 위로 마지막으로 짧게 입을 맞춘 뒤 일어났다. 다 허물어져가는 천막 아래로 들어갔다. 그는 제가 덮고 지내었던 담요의 밑을 들춰 단도를 꺼내들었다. 두 번째 삶과 만남과 두 번째 후회였던 만큼 두 번째 죽음이었다. 두려움은 처음보다도 없었다. 오이카와는 조금의 지체 없이 심장을 찔렀다.


 

그때 그의 수명 중 80년의 몫이 또다시 빠져나갔다. 그의 두 번째 리프였다.

 

 

 

 

처음을 합쳐 그들이 만난 건 그 후로 총 아홉. 그곳에 바친 오이카와의 시간이 어느덧 900년이 되었다. 왕과 적()의 신분으로 만난 태초의 25년부터 처음 리프를 사용하고 죽은 31살의 시간을 지나 이후로도 오이카와는 일곱 번이나 이와이즈미를 쫓았다. 그러나 그 모든 만남의 끝은 이와이즈미의 죽음이었다. 무슨 타이밍의 장난인지 오이카와는 항상 억울하고 이른 죽음 후 타오르는, 혹은 죽음으로 타올라가는 이와이즈미를 보며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두 번째 리프 이후 26, 24, 27, 33, 한 번 더 27살과 33, 그리고 34살까지. 모두 젊고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더불어 그건 오이카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와이즈미가 죽고 난 뒤 기억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리프를 선택했다. 그 시간이 채 사흘을 넘긴 적이 없었다. 언제나 이와이즈미가 먼저 죽고 태어났으며 그 뒤를 오이카와가 따라 죽고 태어남을 반복했다.


어쩌면 그 긴 시간 동안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는 한결같지 않았을 것이다. 기실 몇 번의 삶을 반복하며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의 이름이 매번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 였던 것은 아니다. 생김새가 늘 똑같았던 것도 아닐 터이다. 항상 같은 장소에서 태어났을 것도 아니었다. 동양과 서양을 오가며 여러 이름과 여러 생김새로 몇 번을 태어났을 것이다. 다만 그래도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는 만났다. 어떤 이름과 어떤 생김새와 어떤 환경을 가지고 있든 서로를 만났다. 왕과 적()으로 만났을 때에도, 전쟁에 참전한 병사와 병사로 만났을 때에도, 평범한 백성과 백성이었을 때에도,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讎)의 가문 사이로 만났을 때에도, 목수와 귀족으로 만났을 때에도, 길거리 악사와 여행객로 만났을 때에도, 무명 소설가와 화가로 만났을 때에도, 소방관과 의사로 만났을 때에도, 그리고 지금 또다시 오이카와가 제 심장에 스스로 칼을 꽂는 이번 생까지도.


그들은 길지 않은 시간을 두고 나란히 태어나 생의 대부분을 함께했다. 아마 갖가지 언어로 서로의 이름을 매번 불렀을 것이다. 다 다른 언어로 뻔한 고백의 서사를 읊고 늘 다른 얼굴과 이름을 마주하며 지내왔으리라. 오이카와의 능력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이즈미의 옆에서 태어나는 것이 전부였으나 그들은 매번 고백의 서사를 읊게 되었다. 비록 어떤 삶을 살든 결말은 항상 같았지마는.


이번 생에서 심장을 찌르기 전, 오이카와는 제게 남은 시간을 계산해보았다. 25, 31, 26, 24, 33, 27, 또다시 33년과 27, 34. 그곳의 사이사이에 80년을 더하자 정확히 900년의 값이 구해졌다. 자그마치 900년이었다. 수두룩한 실수와 후회 그리고 그것의 반복이 진행된 시간을 계산해보면 900년이었다. 오이카와는 충혈 된 눈을 비볐다. 그러나 900년을 바쳐 같은 어리석음과 결말이 반복되어도 이와이즈미의 죽음만큼은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누구보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제 심장을 찌르는 것은 쉬웠으나 이와이즈미의 죽음을 받아드리는 것은 언제나 고통스러웠다. 오이카와에게 남은 시간은 이제 100년뿐이었다. 애초에 가지고 태어난 수명의 10분의 1만이 남았다. 말이 100년이었지 여기서 리프를 사용한다면 또 80년이 빠져나가 20년이 고작일 터였다. 20. 20년이라. 그렇다면 다시 만났을 때 함께해온 삶들 중 가장 짧은 만남일 것이었다. 혹 처음으로 오이카와가 먼저 죽음을 겪게 되는 삶일지 모른다.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제게 한 번도 다음 생에서 만나자는 말을 한 적이 없는 이와이즈미를 굳이 몇 번의 생에 걸쳐 따라다녔다. 어쩌면 이와이즈미는 처음의 삶부터 그 후로 모든 삶을 저 때문에 죽었던 것일 수도 있다. 멋대로 바꿔버리고 꼬아버린 운명을 보답하듯 신이 이와이즈미의 목숨을 앗아간 것일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자신이 그의 곁으로 태어나길 바라지 않는다면 이와이즈미는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개소리.”


오이카와가 중얼거렸다. 부질없는 고민이고 걱정이었다. 오이카와가 제 심장을 칼로 찔렀다. 터져 흐르는 핏줄기 사이에서 오이카와가 곱게 눈을 감았다. “또 만나 이와쨩.” 입을 벌려 뱉어낸 목소리 사이로 그리움이 묻어있었다. 80년의 몫이 빠져나갔다. 남은 건 20년이었다.


그리고 610, 일본 미야기에서 이와이즈미 하지메가 태어났다. 720, 오이카와 토오루가 따라 태어났다. 이름부터 생일까지 모든 것이 비로소 딱 들어맞는 삶이었다. 이와이즈미 하지메와 오이카와 토오루의 열 번째 만남이었다. 이제 막 울음소리를 내며 세상에 눈을 뜬 그들이야 알지 못하겠지만 태어남과 동시에 20년의 시한부 선고가 떨어졌다. 오이카와가 힘차게 울었다. 20년의 카운트가 시작되었다.


어떤 방법으로든 닿게 할 거야.”


유언은 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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