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HQ / 전생파트



이와이즈미의 말대로 신뢰(信賴)라는 것은 무작정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그리고 운에 따라 알맞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저 세 가지 중 하나만 맞지 않아도 계약은 성사되기 어렵다. 그러니 신뢰라는 것은 정당한 지불 이후에야 겨우 가능성이라는 것이 생기는 아주 까다로운 명사였다. 그렇다고 그것이 가능성이 생기거나 혹은 운 좋게 전부 얻어진다고 해도 유지가 쉬운 것은 아니었다. 생성만큼이나 힘든 것이 바로 신뢰의 유지였다. 아무리 많은 공을 들인 탑도 벽돌 하나를 빼는 순간 와르르 무너지기 십상이다. 사람의 마음이라고 다른 것은 아니었다. 더하면 더했지 더 쉽진 않았다. 아무리 많은 신뢰와 장면을 쌓아 와도 의심이 가는 행동을 하는 순간 모든 것은 허무로 돌아간다. 이처럼 신뢰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힘든 존재임이 분명했다. 그러니 무한하고 영원한 신뢰란 얼마나 꿈같고 대단한 것인가. 살아가면서 스스로가 믿고 상대도 인정할 수 있는 무한하고 영원한 신뢰라는 것은 과연 실존하기는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도대체 그 무기한을 얻을 수 있는 대가란 얼마나 거대한 것인가. 대부분이 이러한 질문을 던졌을 때, “글쎄. 목숨이라도 걸어야 하지 않을까?” 라고 대답할 것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답이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은 맞으나 정말로 걸 필요는 없었다. 만약이라는 단어가 가진 힘은 참으로 크다. “만약 이로 인해 죽을 수 있다고 해도.”, “만약 이 행동으로 인하여 큰 재앙이 몰려온다 해도.” 딱 이 정도의 만약을 남겨둔 상태에서 행동하는 정도면 족하다. 기실 사람은 일어난 일보다 상상이 더욱 큰 법이다. 현실은 어느 정도의 끝이 있지만 상상엔 끝이 없다. 당장 죽음에 대한 상상으로 온갖 재난과 고통과 수모, 고문 끝의 타살을 생각해도 현실에서 보통 사람이 그렇게 죽기는 힘든 것처럼 말이다. 누구든 상상으로는 이어진 핏방울에서 버짐이 피어나고 진물이 흐르고 핏줄이 터지는 근육이 팽창하는 상상을 할 수 있다. 현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인데도. 대부분이 그러한 만약의 상상을 걱정하여 의심스러운 행동은 하지 않게 된다.


그러니 딱 그 정도의 만약만 부순다면 이미 어느 정도의 탄탄한 신뢰를 구축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그것이 살면서 단 한 번 신뢰의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는 오이카와 토오루에게라면 더더욱 그랬다. 오이카와에게 있어 이와이즈미란 그 순간부터 만약을 깨부순 최초의 존재가 된 것이다. 오이카와는 피가 새어나오는 붕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잘 아물어가던 상처가 다시 엉망이 되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그의 몸에 흉터가 지게 생겼다. 그러나 그것이 화가 나거나 슬프지는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물론 이와 같은 사건이 있었다고 해서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가 약속한 듯 운명적인 만남을 자주하고 갑작스러운 연정(戀情)이 몰아칠 리는 없었다. 처음이란 모두 약간의 변화로 시작된다. 둘은 마주치는 눈을 구태여 빠르게 피하지 않는 법을 배웠고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방식을 터득했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는 데에 무리는 없었다. 오히려 배움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면 느끼고 있다고 할 만큼 그들은 서로에 대한 배움을 게을리 할 때가 없었다. 그러기엔 전혀 다른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 굉장했다. 지금까지 어떻게 전부 눌러 참아왔나 싶을 정도로.


그러니까. 도롱뇽은 안 먹는다고?”

그걸 어떻게 먹어, 징그럽게.”

근데 왜 자꾸 상에 올리라는 거야.”

아니. 그냥 다들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아서.”


어쩐지 평범한 음식들만 먹으려 들면 의아해하더라고. 오이카와의 덧붙임에 이와이즈미가 우습다는 목소리를 냈다. “당장 내일부터는 올리지 말라고 하마.” 말하는 목소리가 제법 단호했다. “그래. 걔네도 요즘 찾기 힘들다고 하긴 했어.” 이어지는 오이카와의 나긋함을 뒤로 이와이즈미가 읽고 있던 책에서 시선을 떼었다. 그가 들고 있던 건 왕실의 역사 따위가 지긋하게 적힌 책이었다. 누렇게 색이 바랜 책에서 시선을 돌리자 이제 막 꽃봉오리가 진 들꽃이 여기저기서 넘실거렸다. 예전, 오이카와의 부모가 원하여 만들어진 정원은 현재 둘의 휴식 장소였다. 때로는 이와이즈미 혼자 그곳을 방문했고 때로는 오이카와 혼자 그곳을 방문했다. 오늘처럼 마음이 맞은 날이면 함께 진을 치고 잠시나마 평화로움을 만끽하는 장소였다. 오이카와는 조심스럽게 연못에 발을 집어넣으며 발장난을 쳐댔고 이와이즈미는 그 옆에 앉아 일정한 속도로 하품을 찍찍 내뱉으며 책을 읽고 있었다. 정원의 정자는 두 사람이 들어가고도 한 사람이 더 들어올 수 있을 정도의 크기가 있었기에 둘의 거리가 아주 가까운 것은 아니었다. 적당한 거리감. 그리고 적당한 고요함이 공존하는 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부터 어쩐지 다들 바쁜 것 같던데.”

. 연회 준비가 있어서.”

연회? 무슨 연회.”

있어. 쓸데없이 거추장스러운 날 같은 거.”


그 말을 끝으로 이와이즈미가 다시 하품을 뱉었다. 오이카와도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왕궁 내에는 워낙 자잘한 것부터 큼직한 것까지 여러 행사가 잦았다. 오이카와 역시 이와이즈미의 대답을 들었을 때 그 중 하나일 것이라고 유추했다. 말하기가 무섭게 어린 궁녀 한 명이 여러 가지 연회에 필요한 비단들을 품에 안은 채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까닥하면 넘어질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 뒤 오이카와가 그 연회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아니다. 대략 사흘이 지난 후였다. 사흘째가 된 아침, 자신을 돌보는 시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연회의 주제에 대해 말했다. 연회의 이유를 들은 뒤 오이카와의 반응은 잠깐의 침묵, 잠깐의 놀람, 잠깐의 서운함, 그리고 잠깐의 이해. 오이카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시녀는 의복을 준비하겠다는 말을 던진 후 멀어졌고 오이카와는 얌전히 그녀의 재등장을 기다렸다. 곧 그녀가 녹색 의복을 가져왔다.


연회는 생각보다 더욱 거대했고 생각보다 더욱 요란했다. 갖가지 소음들은 물론이요 온 거리는 술과 음악에 매료되어 평소보다 몇 십 배의 크기로 소란스러웠다. 굳이 거리로 나오지 않았어도 왕궁에서 그 모습을 훤히 다 볼 수 있을 것 같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관례(慣例)란 대부분 알아도 행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이기에 지금 오이카와는 별 투정 없이 가마 안에 앉아있었다. 살짝 흔들리는 느낌이 은근한 어지러움을 유발하는 듯 했으나 그것도 익숙해지자 잠잠해졌다. 오이카와는 자신과 똑같은 크기지만 색이 전혀 다른 제 앞의 가마를 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당연한 말이지만 투시를 할 수 없으니 가마 안의 풍경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지루한 시간이었다. 책이라도 한 권 가지고 나올 걸. 오이카와는 시시한 후회를 내던지며 턱을 괴었다. 나라는 평화로웠다. 이 나라를 처음 방문해본 이도 알 수 있을 법한 사실이었다. 제가 적()의 자리에 앉기 전 부모가 살았던 당시의 이곳을 생각해보면 천차만별이었다. 새삼 이와이즈미가 얼마나 타고난 군주인지 깨달을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없던 존경심이 갑작스레 솟아나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오히려 의문이 들었다면 의문이 들었다. 왜 자신의 가족도 아닌 사람들에게 이토록 신경을 쓰는 것이지? 귀찮은 관계가 싫은 오이카와에겐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오이카와는 언젠가의 이와이즈미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하품을 뱉었다. 벌써 나라의 반을 돌았다. 애초에 그다지 거대한 나라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둘러보면 볼수록 좁다고 느껴졌다. 다 비슷비슷한 풍경, 더 비슷비슷한 사람들, 행렬 하나로 꽉 찬 거리, 등등. 오이카와는 그것에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안심했다. 작고 얌전한 나라. 이토록 자신에게 걸 맞춰진 나라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니 이러한 이유로 다시 한 번 평화의 유지에 큰 일조를 해주고 있는 누군가를 향한 감사를 괜스레 읊조리는 것이다. 오이카와 본인은 아닌 척 했지만 기실 장황한 핑계였다.


연회의 모든 관례는 밤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조례와 행렬을 끝내고나자 하늘엔 이미 짙은 어둠이 찾아왔고 그 뒤 쏟아지는 관료들의 축하 인사 따위를 일일이 상대해주다보니 드디어 쉴 수 있구나 느낀 것은 거의 자정 직전이었다. 이와이즈미는 하루 종일 나름의 미소를 짓느라 내내 경련을 일으켰던 안면 근육을 풀어주며 한숨을 쉬었다. 아마 이와이즈미의 인생에서 가장 많이 감축 드린다는 말을 들은 하루로 기록될 것이 분명했다. 그에게 있어 오늘은 그 정도의 가치에 불과했다. 그는 과연 자신이 역사 속에 기록되기를 바라는지, 혹은 역사가 누군가를 기록하기 위해 자신을 선택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고민을 해대며 발걸음을 옮겼다. 피곤함의 깊이로 보아 당장 침실로 돌아가야 했음이 맞는데도 무의식중에 저가 찾은 곳은 침실이 아닌 궁 안의 정원이었다. 이와이즈미가 평소에 비해 유난히 발끝을 질질 끌며 그곳으로 향했다.


어라. 왔네.”

뭐 하냐.”

그냥. 탄신일 축하해. 전하.”

그런 건방진 인사는 처음 받아보는데.”


이와이즈미가 어깨를 털며 웃어보였다. 꽤 밍밍한 웃음이었다. 오이카와는 늘 그렇듯 정원 안의 연못에 발을 집어넣은 채 이와이즈미에게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이와이즈미는 곧 오이카와의 옆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딱딱한 나무 바닥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어디든 엉덩이를 붙이니 그제야 조금 살 것 같은 기분이 그를 관통했다. 하루 종일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던 무릎이 왜 이제야 자신을 내버려 두는 것이냐며 원망하듯 그 짧은 움직임에도 꽤 단호한 뼈 소리를 내보였다. 오이카와는 발가락을 움직여 짧은 물장구를 쳤다. 시원하게 찰싹거린다고 하기엔 영 힘도 크기도 없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울었다. 오이카와는 무언가 고민을 하는 사람처럼 턱에 호두를 만들어 보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와이즈미는 평소보다 더 구부린 허리로 고개만 돌려 오이카와를 쳐다보았다. 오이카와가 물었다.


연회는 어땠어?”

피곤했다. 정신도 없었고 재미도 없었고.”


떨어지는 대답이 빠르고 간결했다. 그의 말에 오이카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와이즈미는 뭘 그런 것을 묻느냐는 얼굴로 작은 콧김을 내뱉었다. 오이카와에게 한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연회는 당최 누구의 탄신을 축하하는 것인지 모를 만큼 이와이즈미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만의 축제였다. 정작 연회를 벌이게 된 이유의 중심에 있는 이와이즈미는 오히려 늘어난 일거리에 골머리를 앓았고 억지로 인자한 척 지어보이던 미소 때문에 입가엔 몇 번이고 경련이 일어나야 했다. 이와이즈미에겐 그 모든 것이 그저 피곤한 행사에 지나지 않았다. 딱히 이렇다 할 보람도, 신나는 기분도 뜻밖의 호기심과 사건이 있지도 않은 어정쩡한 하루였다. 하긴. 원래 이와이즈미는 제 생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좋아하기는커녕 만약 자신이 엄청난 권력을 쥐게 되어 달력에서 하루를 뺄 수 있다면 주저 없이 610일을 빼고 싶은 심정이었다. 작년 이와이즈미는 611일에 왕의 자리에 올랐다. 제 생일이 끝난 뒤 하루가 지난 후였다. 정확하게는 약 2시간이 흐른 뒤였다. 어떻게 보면 거창하고 거대한 생일선물과 같은 자리였으나 그에겐 전혀 그렇지 못했다. 이와이즈미에게 있어 그날의 감정들 중 기쁨은 없었다.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드디어 나라에 새 바람이 분다며 술잔을 들고 휘파람을 불었지만 꼭 자신만큼은 아니었다.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필시 그에게 생일이라는 날은 그날을 기점으로 늘 이질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만큼의 시간이 흘렀음을 제게 명명백백히 보여주면서 떨떠름한 기분만을 안겨주는 날이었다.


네 생일은 언젠데.”


이와이즈미는 조금 재빠르게 오이카와에게 질문했다. 분명 그 질문은 그러한 생각들로부터의 도피였다. 이와이즈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오이카와는 고민하는 듯 했다. 갈색 눈알을 옆으로 살짝 굴렸다가 원위치한 그는 이번엔 짧은 콧소리를 냈다. 고작 제 생일 날짜를 말하는 것치고는 뜸을 들이는 것이 길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연 쪽은 또다시 이와이즈미였다. 그는 답답한 것을 참을 수 없는 성격이었다.


언제냐고.”

알아서 뭐하게? 연회라도 열어주려고?”

하고 싶으면 하던가. 아무도 반대 안할걸.”

못하는 거겠지. 다들 웃고 있어도 정말 축하하는 것도 아닐걸?”

오늘도 마찬가지야.”

아닐 텐데.”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말싸움이었다. 이와이즈미가 습관처럼 인상을 찌푸렸고 오이카와는 그 모습을 보며 자세를 바꿨다. 손을 뒤로한 채 몸을 지탱한 오이카와는 고개를 꺾어 위를 쳐다보았다. 정자 때문에 하늘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고목의 무늬가 보였다. 오랜 세월을 걸쳐 스스로 만들어낸 불규칙한 무늬였다. 얼핏 바라보면 사람의 손금과도 비슷해보였다. 오이카와는 그 무늬의 줄을 세어보며 입을 열었다. 이상하게도 이와이즈미의 앞에 있으면 아이 같은 소리가 자꾸만 튀어나왔다. 겨우 피를 맞댄 것만으로 이만큼 입을 열고 있자니 새삼 자신이 쉽게만 느껴졌다.


우리한테 생일은 별로 필요 없어. 대부분 다 잊어버리고 기억도 안 한다고. 우리 부모님도 그랬어.”


오이카와는 이제 열아홉의 여름을 맞이했지만 그에게 허용된 시간은 그것의 곱절을 하고도 한참이 남는다. 얼마나 긴 시간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1000년이라는 시간은 그랬다. 일천년의 크기는 까마득하게 멀었다. 그 긴 허용의 시간 동안 태어난 하루가 무뎌지는 것은 당연했다. 어딘가에 표시해두지 않으면 제가 태어난 날도 잊어가는 것이 자신들이었다. 오이카와의 부모 역시 예외는 아니었으며 오이카와가 읽어왔던 책 속의 인물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남의 생일은 고사하고 자신의 생일조차 잊는다. 기억을 하고 있는 이들이 간혹 존재하기는 했으나 그마저도 리프를 하게 된 다음이면 잊기 일쑤였다. 다시 태어난 삶에서 이 전 삶의 생일은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태어난 날이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이고 반복할 수 있는 평범한 날이었다.


그냥 말하라고 물어봐줬을 때 말해라.”


그러나 그 삶을 알 수 없는 이와이즈미의 입장에선 같잖은 청승에 불과했다. 이와이즈미는 자신과 같은 나이이면서 세상이라도 초월해 존재하는 것 같은 모습을 싫어했다. 비록 이들이 영원을 산다고 하지마는. 이와이즈미는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었다. 그 사실을 오이카와가 아직 절감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와이즈미도 다를 바 없기 때문이었다. 저와 같은 나이인 오이카와가 지금 자신이 디디고 있는 땅이 허물어져 없어질 때까지 평생 살아갈 것이라고 대뜸 믿어지지가 않는 것이었다.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가 절대로 같아질 수 없는 부분에서 나타나는 입장 차이였다.


아마 적()과 평범한 이들이 완벽히 섞일 수 없는 이유도 시작은 이처럼 잔잔한 차이일 것이다. 이미 이 작은 주제에서부터 맞는 것이 없었다. 두 가지의 종()은 단순히 생일을 기억하는가 안 하는가에서 부터 시작하여 죽음은 두려운가 아닌가를 향해 나아간다.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처럼 올곧은 평행선도 없을 것이다. 오이카와는 그 차이의 시작을 실감했다. 그즈음 이와이즈미가 성대를 움직였다. 피곤함이 듬뿍 묻어나는 것과 다르게 입은 쉴 새 없이 꿈틀거렸다. 그건 제 입장에 대한 정리였다. 더 이상 토를 달면 주먹이라도 날아올 것 같은 단호한 정리였다.


()은 불로불사(不老不死)의 몸이라지만 뭐든 태어난 순간은 있을 거 아냐. 네가 평생을 살든 말든 나는 해봐야 50년 정도가 지나면 죽을 텐데 50년 동안 네 생일 하나를 더 기억 못할 만큼 나쁜 머리는 아니다.”


글쎄. 흔히들 말하는 영원(永遠)의 길이는 어느 정도로 잡아야 하는 걸까. 애초에 영원이라는 말 자체가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라고는 한다지만 모든 것이 무()가 된 이후의 시간 이래봤자 쓸모가 없을 터이니 대충 세상에 살아있는 생물이 남아 있는 날까지 정도로 기준을 잡아보자고. 간단하게, 디디고 있는 땅과 올려보고 있는 하늘이 각각 꺼지고 무너져 거짓말처럼 세상이 끝나는 순간까지를 영원이라고 칭해보자. 세상의 시작과 끝까지를 영원이라고 한다면 혹 영원은 내일까지일 수도 있다. 갑작스럽게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면 그것으로 영원한 순환의 종지부가 찍히는 것이니 말이다. 그럼 단언컨대 일천년의 시간도 부질없어질 것이다. 그 후로는 무()의 영원이 전부다. 일천년의 시간은커녕 채 50년의 세월도 쓰지 못하고 끝나버릴 수 있다. 세상의 영원이라는 것은 그렇게나 부질없고 끝을 가늠할 수 없다. 그러니 와 닿지 않는 것이리라. 꼭 제가 일천년을 살 수 있다는 사실처럼.


그렇다면 조금 더 범위를 줄여 살펴보았을 때 개개인에게 있어 영원은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일까. 이 또한 적당한 기준을 세워 대강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라고 잡는다면 한 사람이 가진 영원의 시간은 지극히 짧다. 그러니까 사람의 삶을 영원이라고 하는 대신 평생(平生)이라고 칭하겠지. 그러나 어떻게 보면 그 평생이야 말로 절대적인 영원일 것이다. 나이가 들고 수명이 다 해 죽어버리고 또다시 태어나고를 반복한다고 해도 결국 모든 삶이 끝날 때마다 그 사람의 잔해는 여전히 지속되는 세상을 떠돈다. 극단적으로 오이카와가 지금 바로 리프를 택하고 죽어버린 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지금의 삶을 살았던 오이카와는 죽은 채 영원을 떠다니는 것으로 남겨진다. 지금의 오이카와는 죽어도 이 시간에 갇혀 이 세상이 끝나는 순간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어찌 되었건 죽어버린다면 다시 오지 않을 생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언제야?”


그런데 이와이즈미는 제 평생 동안 오이카와의 생일을 기억해주겠노라 말했다. 생각해본 적 없는 제안이었다. 거창하게 따진다면 누군가의 영원 속으로 발걸음을 하는 것이었다. 후에 50년이라는 시간이 더 지난 뒤 이와이즈미가 죽고 그의 시간이 멈춘다면, 그리고 그가 그때까지 오이카와의 존재와 생일을 기억한 채 눈을 감는다면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에게 영원히 기억되는 것이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 영원히. 영원히 남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영원히 남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저조차 언젠가 잊어버릴 그날을 이와이즈미가 대신 영원히 기억해주는 것이다.


……720.”

한 달 뒤네.”


소리 내어 생일을 밝혀보는 것이 얼마만인가. 아니. 처음인 듯 했다. 오이카와에게 쓸모없던 생일이라는 날이 이와이즈미에게 날짜를 밝힘으로서 의미를 되찾았다. 50년간은 적()들 중 거의 유일무이하게 생일이 기억되는 존재로 남을 것이라 생각하자 오묘하기 그지없었다. 두 가지의 종()은 단순히 생일을 기억하는가 안 하는가에서 부터 시작하여 죽음은 두려운가 아닌가를 향해 나아간다.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처럼 올곧은 평행선도 없을 것이다. 물론 역사 속에선 간혹 둘의 간극을 이해해보려 한 인물들도 당연히 있었다. 맞지 않는 가치관을 어떻게든 이해하고 조정하고 배려했다. 대부분 끝에 가서 더 큰 파멸을 막지 못하는 불상사가 있었으나 분명히 존재는 했다. 꾸준히 존재했다. 어째서 그 위험을 감수하고? 그거야 그것이 그들의 새로운 가치였으니까. 그렇다면 이 시간에서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는…….


. 720일이야. 이와쨩.”


오이카와가 웃었다. 이와이즈미는 그 실없는 웃음과 호칭을 들으며 기가 차다는 듯 따라 웃어보였다. 정확한 의미가 없는 웃음이었다. 이와이즈미의 열아홉 생일은 그렇게 완전히 갔다. 일 년에 하루밖에 없는 날이라지만 그 어떤 날도 일 년 중 반복되는 하루는 없었으니 전혀 아쉽지 않았다. 열아홉의 처음이자 마지막 610일이 갔다. 아마 내일은 열아홉의 처음이자 마지막의 611일이 올 것이다. 생각하니 단지 배가 고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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