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HQ / 미래날조



그날은 특별한 날이었다. 이와이즈미는 평소 눈을 뜨고도 한참 침대에서 꾸물거리던 지난날과 다르게 한 번에 몸을 들어 올렸다. 어쩐 일로 맞춰 놓았던 알람보다 빨리 눈을 떴다. 이와이즈미의 어머니도 그런 그가 신기하다는 듯 농담 몇 개를 던지며 아침밥을 이야기했다. 이와이즈미는 식탁으로 향하는 와중에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역시나 그가 예상했던 대로 알림창이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다. 진동으로 설정해놓은 탓에 잠시 핸드폰을 올려둔 그의 무릎이 떨렸다. 이와이즈미는 끊임없이 제 존재를 알리며 온몸을 부르르 떨어대는 핸드폰을 무심하게 열어보았다. 무수히 쏟아지는 연락들과 축하들. 특히 고교 시절 배구 부 라인 방은 채팅을 하나하나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메시지가 쌓이기 시작했다. 평소였다면 시끄럽다고 면박을 줄 법도 하건만 오늘의 이와이즈미는 오히려 오늘이 정말 오고야말았다며 싱거운 웃음을 내뿜는 게 고작이었다. 어쩌면 이들 중 가장 오늘을 기다렸다. 아직 다 사라지지 않은 그의 소년미가 그 웃음 위에 적나라하게 올라탔다.


그날 이와이즈미의 예상과 다른 점이 있다면 분명 채팅 방에서 가장 화려한 이모티콘과 시끄러움을 담당해야할 누군가가 조용했다는 것이다. 아직 자고 있나? 이와이즈미는 오늘따라 유독 조용한 누군가의 라인 프로필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짐작이 가는 사람이었다. 이와이즈미는 그의 프로필을 클릭해보았다. 꼭 제 삐죽한 머리가 모퉁이에 살짝 드려져 있는 사진이었다. 프로필의 주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든 채 혀를 약간 내밀고 있는 사진부터가 시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이즈미는 확대된 프로필 사진을 잠시 바라보다 그 갈색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이와이즈미의 손길에 제 멋대로 액정 속 사진을 확대한 핸드폰의 화질이 선명했다. 이와이즈미는 그 모습을 보며 또다시 중얼거렸다. 오늘이네. 드디어 오늘이 밝아오고야 말았다. 몇 번을 중얼거려도 부족한 깨달음이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이와이즈미에게 있어 디데이와 같은 날이었다. 조금 지겹다면 지겨운 레퍼토리이다마는 오늘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에게 그동안 이어온 친구 관계를 그만두자 선언할 생각이었다. 떨어진지 고작 이주일이 조금 넘었다. 졸업 이후 대학이 떨어져 예전에 비해 만남이 줄어들기는 했으나 그래도 꼬박꼬박 만나왔다. 기실 그리 먼 대학도 아니었기에 못해도 사흘에 한 번씩은 짧게나마 눈도장을 찍어왔다. 그리고 열아홉의 겨울이 찾아왔다. 장기 합숙 훈련을 떠난 오이카와 덕에 제대로 얼굴을 보지 못한지 벌써 이주가 넘었다. 어떻게 본다면 둘의 인생에 있어 가장 멀리 떨어져 지낸 기록이었다. 고작 14일이 말이다. 그러나 이와이즈미는 그 14일 남짓 되는 시간 동안 몇 년을 참고 참아오던 감정의 폭발을 참느라 혼쭐이 난 참이었다. 알음알음 쌓아오던 벅차오르는 감정들을 어르고 달래길 14일이었다. 그러니 그만큼 오늘은 그에게 결전의 날이었다. 이미 선고는 끝냈다. “내일 12. 시간 비워놔.” 거의 결투장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만큼 일방적이고 공격적인 선언이었다.


어제 오이카와에게 그 라인을 보내었을 때 오이카와는 오이카와씨는 장미꽃 같은 건 별론데.” 따위를 주절거렸다. 눈치만 빨라 얄미웠다. 새삼 그 얄미움을 회상하니 다시 헛웃음이 그의 얼굴을 스쳐지나갔다. 이와이즈미는 문득 제 방 책상 위를 쳐다보았다. 괜히 주위를 둘러본 다음 조심스럽게 뻗은 손길에 잡혀온 것은 오이카와가 늘 사용하고 있는 브랜드의 하얀 무릎 서포터였다.


그날이 열아홉의 1231일이었다. 약속 시각은 12, 현재 시각은 11. 어찌 보면 결과를 뻔히 알고 있는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바닥에는 가볍게 땀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혀를 차며 입고 있는 정장바지 위로 손바닥을 문질렀다. 그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박하사탕을 입안에 넣고 굴리며 나갈 채비를 했다. 입안에서 굴려지는 박하사탕이 온몸을 녹여가며 시원함을 내뿜고 있었다. 상쾌함이 발끝을 스쳐갔다. 아마 이후에 돌아오는 발걸음 역시 상쾌하리라.


그의 계획대로라면 원래 그날은 그런 날이어야만 했다.



 

이와이즈미는 완전히 부서진 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그날 오이카와는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았다. 조금 늦을 것 같다는 라인에 속으로 핀잔을 주고 기다린 지 한 시간이 흘렀을까? 결국 답답함을 참지 못한 그가 오이카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받지 않았다. 몇 번을 반복하여 걸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은 기계음뿐이었다. 두 시간을 기다렸을 때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의 집으로 찾아갔다. 오이카와의 어머니는 그가 이미 집을 나간 지 꽤 시간이 흘렀다고 대꾸했다. 설마 동네에서 길을 잃었으려고. 이와이즈미는 당최 어디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 모를 오이카와를 열심히도 기다렸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나타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와이즈미를 만나주지 않았다. 이와이즈미가 아무리 그를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오이카와 토오루가 실종됐다. 이와이즈미가 제 스스로 던져 깨트린 손목시계를 무시한 채 핸드폰을 들었다. 오이카와와의 라인 방은 여전히 1231일 오전 1159분에 도착했던 미안 조금 늦을 것 같아! 사랑해 완전 사랑해 이와쨩하는 메시지와 엉엉 울고 있는 이모티콘 하나가 전부였다. 그것이 끝이었다. 그리고 오이카와 토오루는 아무 실마리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그 누구도 그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소멸로 향한 전력질주였다.


하루 하고도 8년 남짓이 흘렀다. 그사이 이와이즈미는 피할 수 없는 성년을 맞이했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모두에게 있어 미성년의 모습으로 머문 채였다.

 

 

이와이즈미는 구두의 앞 코로 바닥을 두들겼다. 오늘 아침 막 비가 그친 바닥은 그가 두들길 때마다 아직 남은 습기를 피어 올리며 작은 물방울들의 튕김을 만들어내었다. 이와이즈미는 그것을 바라보다 들고 있던 곤봉을 휘휘 돌려대었다. 근래, 그는 곤봉을 들고 마을의 가장 큰 사거리에 서 있는 시간이 늘었다. 이와이즈미는 이제 손에 착 감기는 곤봉을 다시 한 번 힘차게 휘두르며 서로 크락션을 울리기 바쁜 자동차들의 방향을 정해주기 시작했다. 가끔 큰소리로 고함을 치며 다리를 바쁘게 움직이기도 했다. 그가 소리를 칠 때마다 가느다랗게 핏줄이 섰다. 핏줄을 따라 그의 답답함도 불룩거리는 기분이었다.


이 짓을 시작한지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이와이즈미는 오늘도 어김없이 삿대질을 하며 화를 내는 아줌마 아저씨들을 말리다 나가버린 목에 걸걸한 가래를 내뱉었다. 젠장. 이놈의 신호등은 언제 즈음 정신을 차릴 런지. 이와이즈미는 계속해서 색을 왔다 갔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신호등을 쳐다보았다.


최근 마을에 일어나는 일들이 심상치 않았다. 아니. ‘심상치 않았다.’ 라고 하기엔 어쩐지 사소했고 사소하다고 끝내기엔 계속해서 눈에 밟히는 거슬림이 가득했다. 몇 년이고 멀쩡하던 신호등이 일주일에 몇 번씩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깜빡거렸고 아직 초여름임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비정상적일 정도로 기온이 올랐다. 그 더위 때문인지는 몰라도 광장에 있는 커다란 분수대는 하루에 적어도 세 번 이상 수도관이 터져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갑작스러운 단수와 정전의 횟수도 늘었으며 핸드폰 통신 이상도 마찬가지였다. 하나씩 떼어놓고 보자면 참으로 사소한 일일지 몰랐으나 그 모든 것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 사람들은 답답함을 느끼고 한껏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일주일이나 지났음에도 아무런 원인도 찾지 못했다. 그러니 당연하게 해결법도 없었다. 그때 까마귀가 울었다. 몸집이 꽤 커다란 녀석이 여럿이다. 전봇대에 일렬로 앉은 그들은 깍깍, 절대로 빈말로도 예쁘다 할 수 없는 목소리를 내며 저들끼리의 곡조를 읊어댔다. 이와이즈미는 목울대를 만지작거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막 하늘 정중앙에 멈춰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여름 햇살이 사방에서 그를 찔러댔다. 근심을 가득 담은 땀 한 방울이 그의 이마를 날렵하게 타고 흘렀다.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어느새 어엿한 경찰이 되었다. 잠깐의 방황을 제외하면 누구보다 그 과정을 착실히 밟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이와이즈미는 하루 종일 머리에 얹고 있는 경찰모를 살짝 벗겨내며 그 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었다. 하얀 와이셔츠의 등 부분이 땀으로 정복당하기 시작했다. 이와이즈미는 제 손목에 조금 헐겁게 매달린 채 달랑거리고 있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오후 2시 반. 30분의 휴식 시간 다음 다시 마을을 한 바퀴 돌아야 했다. 그가 아침부터 곤봉을 휘두른 것을 하늘도 가엽게 여겨준 모양인지 마침 신호등도 멀쩡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와이즈미가 얼른 그곳을 빠져나왔다.


더워.”


그는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는 단어를 짓뭉개며 발걸음을 옮겼다. 내내 소매를 걷고 있었던 탓인지 강렬한 햇빛에 노출되었던 팔 부분이 빨갛게 그을린 채 화끈거렸다. 그는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 무심하게 손끝으로 꾹 눌러보았다. “이와쨩, 그러다 진짜 새카맣게 변해버린다!” 어느 목소리가 울렸다. 그는 여지없이 찾아오는 두통에 눈을 감았다 뜨며 잠시 일사병과 비슷한 현기증을 느껴야 했다. 그래.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어느새 어엿한 경찰이 되었다. 그리고 오이카와 토오루가 실종된 지 8년 하고도 반년이 넘게 흘렀다. 19살의 1231일에 실종된 오이카와 토오루를 28살의 여름이 되도록 찾지 못했다.


마을이 이유를 찾을 수 없는 미묘한 일들에 둘러싸인 이후 누구도 함부로 언급할 수 없는 경계가 생겼다. 모두들 예민함과 경계심을 안고 매일을 살아갔다. 이와이즈미는 몰래 골목에 숨어 급하게 담배를 입에 물었다. 들키면 사살.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는 두 볼이 움푹 들어가고 폐가 살짝 쪼그라들 정도로 연기를 끌어마셨다. 그리고 그는 새삼 골목 안 쪽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쪽은 관할 구역이 아니라는 이유로 제대로 둘러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생각하니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딱히 그의 성격에 관할 구역이 아니라는 이유로 30cm 정도 차이 나는 골목 안 쪽을 돌아보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것이 요즘 같은 판국이라면 더욱이. 이와이즈미는 담배꽁초를 발로 비벼 끈 다음 그것을 주워들어 주머니 속에 쑤셔 넣었다. 그의 마지막 양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는 담배 냄새가 깃들었다. 그는 골목 안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곳에 이런 장소가 있었던가? 순간적으로 고개를 스쳐가는 의문이었다.


이와이즈미는 마치 이방인처럼 그곳을 둘러보았다. 높지 않은 건물들의 높이가 그의 눈 안에 딱 들어맞게 박혔다. 그때 까마귀가 울었다. 순간적으로 소리가 울리는 곳에 고개를 돌렸던 이와이즈미는 제가 쳐다보자마자 푸드덕거리며 날아가는 까마귀 떼에 다시 시선을 옮겼다. 꽤 이른 감이 있는 움직임이었다.


폐가?”


이와이즈미가 중얼거렸다. 그의 말 그대로였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천장이 반 즈음 가라앉은 폐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한 눈에 보아도 거미줄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분명 작년 초봄 마을의 대대적인 재개발이 있었는데 이 골목은 아니었던가? 그는 느릿한 시선으로 폐가의 풍경을 눈 안에 담기 시작했다. 그때 이와이즈미는 그 풍경을 보며 어떠한 말을 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무전기가 울었다. 이와이즈미는 급하게 무전기로 손을 뻗었다. 그의 허리춤에 걸려있던 무전기에서는 제 구역 이름을 외치고 있는 선배의 목소리가 바쁘게 울리고 있었다. ! 이와이즈미는 선배가 부르는 목소리에 우렁차게 대답하며 바쁘게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 망할 신호등이 또 고장 난 모양이었다.


그래서 내가 무슨 말을 하려했지? 이와이즈미의 삐죽거리는 머리칼 위로 물음표가 그려졌지만 이내 그 의문문조차 머리에서 사라졌다. 아마 이와이즈미는 알지 못했겠지만 그는 그 말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내뱉을 수 있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그 천장이 반 즈음 내려앉고 거미줄이 즐비한 폐가를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어떠한 단어 혹은 문장을 내뱉으려했다는 사실이다. 발걸음에 묻는 미련이 애매했다.


 

이와이즈미는 뭉친 어깨를 앞뒤로 돌리며 스트레칭을 했다. 수고하십시오. 이와이즈미는 홀가분함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담고 있는 목소리로 그 말을 내뱉고 신속하게 경찰서를 벗어났다. 그의 등 뒤로 그래, 수고했다!”, “쉬어라!” 부러움과 수고의 인사가 쏟아졌다. 오랜만의 휴일이었다.


오랜만의 휴일. 단어만으로도 무너질 것 같던 허리가 곧추서는 기분이었다. 꼬박 일주일을 내도록 밤샌 뒤 생일이라는 핑계로 겨우 얻어낸 하루의 휴일이다. 하긴. 하루도 엄청난 성과였다. 이마저도 그가 현재 근무 중인 경찰서에서 가장 어린 와중에 또 가장 많은 일을 처리한 것을 인정받아 겨우 받아낸 것이다. 이와이즈미는 집에 도착하여 제복을 벗자마자 마법이 풀린 것처럼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담배로 손을 뻗었다. 그가 베란다로 향했다. 이 순간만큼을 기다렸다는 듯 재빠른 행동이었다. 그때의 시간이 69일 오후 1130분이었다.


물론 경찰들은 하루 종일 담배를 피울 수 없다! 하는 법이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그는 근무복을 입고 있는 시간 동안은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피우지 못했다. 굳이 피우려면 눈길을 피해 못 피울 것도 아니었으나 그는 적어도 근무 중에는 담배를 멀리했다. 정말 간혹 그 절대 잊고 싶지 않지만 떠오를 때마다 어김없이 손끝을 쑤시게 만드는 누군가를 생각했을 때가 아니라면 말이다. 가령 오늘처럼. 기실 그러한 것들을 다 떠나서 굳이 매일 매일 모든 근무 시간에 경찰복을 완벽히 입을 필요는 없었다. 특히 근무 시간 내도록 모자까지 전부 착용하고 있는 인물은 이와이즈미 혼자였다. 그러나 이와이즈미는 근무를 하는 모든 순간동안에는 무조건 제복을 입고 있었다. 가끔 더운 여름이 와 일사병이 일어도 그는 절대로 무엇 하나 벗지 않았다. 모자를 벗어내고 땀을 닦는 행동조차 조심스러웠다. 주위에서는 도대체 왜 그러느냐며 그의 답답함에 의문을 가졌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순찰 다녀오겠습니다.” 하는 지극히 그답고 고지식한 회피의 기술을 이용할 뿐이었다.


이와이즈미는 매캐한 담배 냄새를 들이마시며 피로를 함께 뱉어내었다. 생각해보면 성인이 되자마자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던 마츠카와에게 그런 걸 왜 피우냐며 핀잔을 주었던 때가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오히려 반대였다. 마츠카와는 담배를 끊었고 이와이즈미는 소위 말하는 골초가 되어 있었다. 이젠 이와이즈미가 잔소리를 듣는 입장이었다. 이와이즈미는 그 뒤바뀜에 의미 없는 웃음을 보이며 베란다의 난간에 기대었다. 평화롭네. 베란다 난간에 기대어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히고 있던 이와이즈미는 제 머리칼을 살랑거리며 지나가는 바람을 만끽했다. 이와이즈미가 젖혔던 고개를 똑바로 들었을 땐 베란다 창문 너머 TV 모니터가 보였다. 뉴스가 틀어진 TV를 바라보자 오래도록 손대지 않았던 게임기가 떠올랐다. 오늘 밤개기월식…」동시에 깜빡하고 사오지 못했던 맥주 한 캔이 떠올랐다.


, 결국. 이와이즈미는 새삼 욕망에 충실한 스스로를 향해 감탄을 내뱉으며 주머니 안으로 손을 찔러 넣은 채 부지런히 다리를 움직였다. 그는 얇은 후드 티 모자를 푹 눌러쓰고 휘적거리며 밤거리를 걷고 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 수상해보이기 좋은 차림새였다. 귀찮아. 입은 끊임없이 그 말을 외치고 있었지만 그는 어느새 기대감 섞인 발소리의 볼륨을 높이고 있었다. 그의 집은 혼자인 남성이 살기에 가격 대비 꽤 넓은 축에 속해있었고 교통편 역시 썩 나쁘지 않은 편에 속했다. 다만 단점이 하나 있었다면 집에서 편의점까지 거리가 꽤 있다는 사실이었다. 뭐 그것도 오늘처럼 괜찮은 기분을 가진 하루라면 산책하는 기분으로 간간이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갈 수 있었으니 나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결론적으로 이와이즈미는 캔 맥주가 든 검은 봉지를 얻는 데에 성공했다. 그는 손가락에 끼운 검은 봉지를 슬쩍 내려 보다 만족스럽다는 듯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얼른 돌아가 샤워를 한 다음 목구멍에 맥주를 들이 붓고 싶었다. 그 뒤는 시시한 계획이지만 오래 눈을 붙이고 싶었다. 골이 아플 정도로 오래 자고 싶은 것의 그의 소박한 소원이었다.


,”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던 이와이즈미의 발걸음을 잡아 끈 가게가 하나 있었다. 낯선 곳은 아니었다. 가끔 그가 들렸던 24시 중고 게임 거래 센터였다. 이 마을에 정말 오래도록 자리를 잡고 있는 가게였다. 그것도 곧 아니게 되는 모양이지만. 아직도 눈이 아프도록 강렬하게 형광등 불빛을 내뿜고 있는 가게의 창문 위로 폐점 정리 세일이라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그 폐점 정리 세일이라는 문구를 보며 걷던 그대로 백스텝을 했다. 자신이 이토록 유혹에 약한 사람임을 절실히 깨닫는 하루였다. 그는 지나쳤던 길을 도로 돌아가 민망한 손길로 가게의 문을 열었다. 그가 문을 열자 딸랑거리는 익숙한 종소리와 함께 여전히 푸근한 인상의 아저씨가 오랜만이네, 이와이즈미군.” 정겨운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그가 이 게임 가게에서 오래된 단골 취급을 받게 된 계기는 무려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8년 전, 20. 이와이즈미는 그때 멀쩡히 다니고 있던 학교에 휴학계를 낼 정도로 게임에 빠져 살았다. 그 당시 이와이즈미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말릴 방법도 없었다. 그는 집 밖으로 나오지도 문을 열어주지도 그렇다고 연락을 받아주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게임만 하며 살았다. 가족들이 울면서 찾아오든 말든, 친구들이 전화기에 불이 날 정도로 전화를 하든 말든. 게임기 하나를 붙잡고 온종일 그것만 붙들고 살 뿐이었다. 배가 고프면 냉장고를 뒤져 한가득 쌓아 놓은 시리얼, 라면, 통조림 따위를 따 먹었고 그 외에 움직일 때는 화장실에 갈 때가 전부였다. 엉망으로 살았다. 다시 생각해보면 민망할 정도로 방탕했던 시간이었다. 그가 그랬던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게임을 하며 그 시끄러운 세상 속에 뛰어드는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게임의 사운드와 눈 아프고 어지러운 모니터 스크린을 보는 것이 좋았다. 눈앞에 펼쳐지는 몬스터들 혹은 미션들을 해치우는 데에만 집중을 하면 된다는 점이 좋았다. 오로지 그것에만 집중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와이즈미는 불을 뿜으며 저를 덮치려드는 몬스터들을 건조한 눈길로 쫓으며 칼로 찔러 죽였다. Game Clear! 그리고 그 창이 뜨면 찰나의 쾌감과 더불어 그 여느 때보다 우울한 박탈감이 그를 덮쳤다. 그러면 그는 그것을 회피하기 위해 다음 게임을 열어볼 수밖에 없었다. 게임 외의 다른 생각이 드는 것을 막기 위한 극단적인 수단이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지금의 그는 그렇지 않았다. 지금도 종종 게임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 때가 있었지만 다시 그 정도로 오래 게임만을 붙잡고 하진 않았다. 이제 완전히 건전한 취미 생활이 중 하나였다. “나는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심장이 떨린다.” 그의 어머니는 이제 겨우 그날에 대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이즈미는 눈에 보이는 게임팩들을 들어보며 이것을 집으로 데려갈지 말지 고민했다. 결국 아주 마음에 끌리는 게임이 없었던 그가 들고 있는 게임팩을 다시 내려놓을 심산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가 주인아저씨와 머쓱한 안부인사라도 나눌까 싶어 고개를 돌렸다. 그때 계산대 옆 선반이 그의 눈에 담겼다. 그 위로 경찰 제복을 입고 있는 장식용 레고 하나가 보였다. 동시에 떠오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당황하여 손에 잡히는 아무 게임팩을 덥석 집어 들고 말았다.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경찰? 멋지지. 제복 입은 이와쨩이라니. 이와쨩은 못생겼지만, 아야, 아파! 아무튼! 어울릴 거야. 멋지잖아. 있잖아, 그 모습 나 꼭 처음으로 보여줘.

 

그는 습관처럼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 풀어내려 했다. 그러나 손에 잡힌 것은 단추가 아닌 얇은 후드 티의 면 자락이 전부였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젠장. 담배를 두고 왔다. 그가 금단 증상처럼 달달 손을 떨었다. 가게 아저씨는 그런 그에게 냉큼 계산된 게임팩을 쥐여주었다. 감사합니다. 이와이즈미는 꾸벅 인사를 하고 밖을 나섰다. 그리고 그때야 제 손에 들린 게임팩을 내려다보았다. SF 판타지가 어쩌고. 이와이즈미는 어쩐지 살짝 싼 티가 흐르는 커버를 쳐다보며 재차 한숨을 쉬었다. 계획 없던 돈을 버린 기분이 들었다. 얄팍한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가게에 들어온 과거의 제가 후회스러웠다. 그래도 그는 그 게임팩을 버리지 못했다. 차마.


이와이즈미는 집에 돌아와 원래 목적이었던 맥주의 캔 뚜껑을 따내었다. 캔 입구가 열리며 시원한 소리가 울렸다. 그와 함께 하얀 거품이 일제히 솟아올랐다. 이와이즈미는 급히 그 위로 입술을 가져다대며 가지고 있던 검은 봉지를 소파 위로 집어 던졌다. 그리곤 맥주와 같이 사왔던 과자들을 펼치며 무미건조하게 TV를 켤 뿐이었다. 기계적으로 리모컨을 눌러 채널을 옮기던 그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오늘은 볼 것이 없음을 인정하고 말았다.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니 무언가 재미난 방송을 바라기에는 양심 없는 새벽 시간이기는 했다. 이와이즈미는 한숨을 쉬며 지루하다는 말을 뱉어버리고 눈을 감았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 보니 잠에 살짝 빠져들 뻔하기를 잠깐, 졸다가 머리통이 한 차례 꺾인 그는 놀라서 눈을 떴다. 차라리 침대에 가서 자자. 그는 그렇게 다짐하며 기지개를 켰다. 그는 방으로 떠나기 전 펼쳐놓았던 간식거리들을 치우려했다.


주섬주섬 쓰레기를 치우고 있는 그의 발끝에 무언가 결렸다. 얼레. 그는 무언가 묵직하게 들어찬 검은 봉지를 바라보다 그제야 둔탁한 탄식을 내뱉었다. 걸어오는 내도록 이것을 왜 샀는가에 대해 고민을 했으면서 집으로 들어온 순간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던 존재였다. 이와이즈미는 뒤통수를 만지작거리며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냥 자려고 했는데. 그는 그새 달아나버린 잠을 아쉬워하며 검정 봉지를 털어냈다. 바닥에 떨어진 게임팩은 여전히 그의 취향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커버 사진을 뽐내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그것을 잠시 쳐다보다 곧 어깨를 으쓱거리곤 이것도 오랜만이라며 스스로와 합의를 했다. 그는 익숙한 손길로 CD를 꺼내 게임기에 집어넣은 뒤 로딩을 기다렸다. 모니터 위에 금세 기다란 바가 나타나 로딩의 끝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검은 스크린. 연결이 잘못되었다는 알림이 떴다. 뭐야. 기껏 사온 CD가 불량인가? 이와이즈미가 역시 돈을 버린 것이 맞았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모니터를 끄려했다.


그 순간 화면 가득 게임 배경이 차올랐다. 고쳐진 건가? 이와이즈미가 중얼거렸다. 커버에 있는 사진과는 느낌이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시대 배경이 고전인 게임이었던가? 아니면 처음 시작만 이런 건가. 이와이즈미는 금방이라도 눈 아픈 빛을 뿜으며 세계를 구해야할 것만 같던 게임 커버와는 다르게 어딘가 조용히 가라앉은 배경을 의아스러워했다. 시야가 조금 따가웠다. 게임 특유의 바람 소리가 이상하게 생동감이 넘쳤다. 그리고 게임은 천천히 카메라 앵글을 돌려가며 주위를 비춘다. 화려하게 장식된 누군가의 방, 온통 붉은 인테리어 속에서 유일하게 파란색을 뽐내고 있는 침대, 못해도 몇 백 년 전인 것 같은 창밖의 풍경, 제 선배가 챙겨보는 사극 드라마의 세트장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와이즈미가 데자뷰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때 스크린이 떴다.

 

게임을 시작하시겠습니까?

.

아니오.

 

딱히 그 질문에 고민을 할 이유가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망설임 없이 .’ 버튼을 클릭했다. 그리고 그때 다시 새로운 스크린이 떴다.

 

이 게임은 실제 과거를 투영했으며 플레이를 오래 지속할 경우 정신적 피곤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정말로 게임을 시작하시겠습니까?

.

아니오.

 

실제 과거, 투영, 피곤함, 이와이즈미는 몇 가지 단어가 거슬린다고 생각했다. 역사를 반영했다는 게임은 많이 보았으나 실제 과거를 투영했다는 문장을 사용한 게임은 처음이었다. 그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등 뒤를 타고 꾸물거리는 것을 느꼈다. 역시 그냥 잘 걸 그랬나.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게임을 하면서 아주 보지 못할 문장들은 또 아니었다. 단순히 단어 선택이 조금 특이한 것뿐이겠거니. 이와이즈미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제 거의 다 마셔가는 식어버린 맥주 캔을 들어올렸다. 이번에 그는 네와 아니오 사이에서 고민을 했다. 그 순간 그를 기다릴 시간이 없다는 듯 급하게 스크린이 넘어갔다.


그때, 스크린 한 가득 오이카와의 얼굴이 스쳐갔다.

 

그 순간 이와이즈미는 눈을 떴다. 언제 잠에 든 것이지? 이와이즈미는 그 순수한 의문을 지으며 게임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게임은 종료되어 있었다. 또다시 연결이 끊어졌다는 듯 검은 화면을 유지하고 있었다. 제가 꿈을 꾼 것일까? 그러나 분명. 아니. 아니다. 그럴 리 없지. 이와이즈미는 그것을 단순 기분 나쁜 꿈으로 치부하며 그대로 그 게임팩을 서랍장 깊숙한 곳에 처박아두었다. 바깥은 어둠이었다. 온통 어둠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날 이와이즈미의 꿈엔 오이카와가 나오지 않았다. 사실 오이카와가 실종된 다음 그는 이와이즈미의 꿈에 나타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그 게임의 기억을 단순 꿈이라 여기며 허무한 욕설을 날렸다. 어떻게 처음으로 꿈에 나와도 그런 모습으로 나오는지. 그는 터져 나오는 허무함과 함께 그 불쾌한 꿈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이와이즈미가 게임을 최초로 실행한 것이 스물여덟의 610.

그 뒤 그는 꼬박 한 달이 넘도록 그 게임의 존재를 잊었다.

 

 




 

 

안녕하세요 비비빅탑입니다.

7편을 끝으로 웹연재 분량은 끝이 났습니다.

덧붙여 카르마는 너와 나의 블루와 평행 세계를 이루고 있는 소설입니다.


다만 따로 읽을 경우 전혀 상관이 없으므로 굳이 두 권을 읽으셔야 내용 이해가 가능하거나 하는 일은 없습니다.


길다면 긴 분량을 함께 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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